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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원당 조광익선생 효자정려각(문화재자료 제358호)

천부인권 2009. 12. 15. 08:25

 

 

 

 

 

밀양시 초동면주민센터가 있는 오방리(五方里)를 벗어나려는 지점 도로좌측 아래에 자리한 취원당 조광익선생 효자정려각(聚遠堂 曺光益先生 孝子旌閭閣)은 일부러 찾지 않으면 스쳐 지나기 쉬운 곳이었다.

 

정려각의 내부는 비석이나 다른 시설물은 없었고 “효자조봉대부형조정랑 겸 춘추관 기주관 조광익 려”라는 글자가 새겨진 편액이 화려한 매화꽃 아래에 걸려 있다. 마주보이는 정면에는 청년이 얼음 속에서 잉어를 잡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고, 우측 벽면의 위쪽은 기러기 두 마리가 날아가는 모습을 그렸고, 아래에는 강가에 낚시를 드리우고 있는 강태공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좌측에는 한가로이 거니는 노인이 그려져 있다.
려각 내부의 그림들은 아마 조광익선생(曺光益先生)의 일생을 그림으로 남겨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이곳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취원당 조광익선생 효자정려각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58호
경남 밀양시 초동면 오방리 63

 

『이 정려(旌閭)는 효자 조광익(曺光益,1537~1578)의 대효(大孝)를 표창하라는 왕명으로 세워진 “효자조봉대부형조정랑 겸 춘추관 기주관 조광익 려”이다.
본시 태생지인 창원 지개동에 세워졌는데(1592) 임란에 소실되어 이곳으로 이건하였다.(1634)

 

공은 일찍 퇴계(退溪)의 문도가 되어 경학을 강마하였으며, 사마시에 합격하고 중시(重試)에 장원급제하여 형조정랑으로 승천되었다.
친상을 당해 상례(喪禮)가 어김이 없었고 모친을 지효로 섬기니 향리는 물론 밀양, 창원, 영천의 사림이 감복하여 순찰사가 그 효행을 나라에 장계하였다. 모상을 당하여는 려묘(廬墓)살이를 통한 과애로 거의 죽게 되니 한강, 율곡, 고봉 등 재현들이 글로서 타이르고 선생 38세에 도내 사림이 또 선생의 효행을 들어 장계를 올리니 순찰사가 왕에게 진달했다.

 

상기를 끝내자 동생 호익(好益)이 강동(江東)에 적거(謫居) 중이므로 평안도사를 자청 형제간 손잡고 정회를 풀다가 임지에서 졸하였다.(42세)

 

선조(宣祖)가 부음을 듣고 교서를 내려 “조광익의 효는 정말 출천이다. 지성으로 어버이를 섬겼고 부모상을 당하여는 예로서 다하니 향리가 탄복했다. 삼강행실(三綱行實: 봉양, 수상, 려모의 세편도상이 있다.)에 기록하고 정려로써 표창하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