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창원의 정신과 역사를 간직한 곡목마을

천부인권 2010. 7. 29. 11:42

 

 

 

창원시 동읍 화양리 곡목마을은 30번 지방도로를 따라 동읍 다호리에서 화양리로 1km여를 가다 보면 길 좌측에 비석군이 보이는 마을이다. 주남저수지 일대가 그러하듯이 청동기시대에서 가야시대의 유물들이 마을 인근에 산재해 있어 예부터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곳 곡목마을이 중요한 것은 창원 유학의 정신적 지주라 할 눌재(訥齋) 김병린(金柄璘)과 그의 제자 유당(攸堂) 김종하(金鍾河), 칠원의 중원(中園) 배문회(裵文會), 대전의 육천재(育泉齋) 안붕언(安朋彦)이 수학하였던 곳이다.


 

 

 

 

 

마을입구 동읍 화양리 45-4 양쪽에 세워져 있는 비석군들을 살펴보면 조선에서 일제강점기까지의 충효비 4기와 화목김씨세거지지(花木金氏世居之地)이다. 가첨석과 비신, 비대를 다 갖춘 화목김씨주종사세기행비(花木金氏冑宗四世紀行碑)와 육천재(育泉齋) 안붕언(安朋彦)이 골필로 쓴 용강헌경제이김공유행비(龍岡軒敬齊二金公有行碑)도 가첨석과 비신, 비대를 다 갖춘 형태로 서있다.
 

또한 눌재김선생유허비(訥齋金先生遺墟碑)는 구한말의 학자 김병린(金柄璘)을 기리기 위한 비석이다. 호는 눌재(訥齋)라 하고 본관은 김해 김씨이다. 일찍이 이만구 문하에서 수학하고 도학과 문장으로 영남 일원에서 이름이 났고, 17권 9책의 눌재집(訥齋集)과 용계아언(龍溪雅言) 1권을 남겼다. 사후 문인들이 세운 용계서당에서 음력 2월 20일에 예(禮)를 올리며 유덕을 추모하고 있다. 비의 전체 길이 230cm, 가첨석 길이 60cm, 비대의 길이 30cm이다.

 

바로 옆에는 괴희자포효비(愧喜子褒孝婢)가 세워져 있는데, 조선말기 괴희자 김만경(愧喜子金萬警)이 부모를 극진히 봉양하고 상을 당한 뒤 3년간 여막생활을 한 효행을 기린 것이다. 문현공 성재 허전(性齋 許傳)이 효행록 서를 찬하였다. 전체 길이 220cm, 가첨석 길이 50cm, 비대 길이 30cm, 비신의 폭은 80cm이다.

김만경의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중약(仲若), 호는 괴희자(愧喜子). 사정공파(司正公派)15세손으로 김귀(金龜)의 후손이다.

김만경은 효행이 특이하여 부모 봉양을 극진히 하였으며 친상 중 여묘 3년간 매일 밤에 범이 와서 호위하는 이적을 보였다. 
참고창원향교지디지털창원문화대전

 

 

 

이정문(履正門) 편액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눌제 김병린 선생이 강학소로 쓰던 용계서당(龍溪書堂)이 있는데, 눌제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후학들이 스승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1935년에 창건된 건물로 외무부 장관을 역임한 한학자 변영만이 글을 짓고 여택헌의 기문은 안붕언이 지었다고 한다. 건물의 대문에는 ‘이정문(履正門)’이라는 현판을 걸었으며 본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기사일은 음력 2월 20일이라 한다.

 

 

 

용계서당 바로 위에 한림 금산공(琴山公) 김구(金龜)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1976년에 세운 ‘도남서원(道南書院)’이 나온다. 금산공은 조선조 단종 계유년에 진사, 갑술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의정부좌참관에 이른 분으로 이극돈의 무고로 창원에 와서 지내다가 1485년(성종16)에 60세로 세상을 떠났다. 향사일은 음력 3월 7일이다.

 

 

 

도남서원 바로 위에는 김해김씨의 사당인 ‘구봉사(九峰祠)’가 자리하는데 당초 화천사로 창건하였다가 개칭한 것이다. 대문에는 ‘유정문(由正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본 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와가(瓦家)이다.

 

 

 

 

 

 

 <죽천(竹泉) 편액, 김병우의 호가 죽천이다.>

 

마을 안 위쪽에는 주남저수지를 굽어보는 언덕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바깥쪽이 마루로 된 집에는 ‘충신당(忠信堂)’이라는 안붕언이 골필로 쓴 현판이 걸려있다.

 

 

 

 

대나무 숲으로 가려진 ‘침벽정(枕碧亭)’으로 가는 홍설내를 따라 가다보면 큰나무 두 그루가 홍설내의 절벽에서 자라고 있고 그 앞에는 작은 길 양쪽으로 큰 바위가 마주보고 있는데 여기에 설계(雪溪) 각자(刻字)와 화목(花木) 각자가 각각 새겨져 있다.
설계(雪溪)는 우리말로 홍설내라는 의미이고 옛날에 붉은 눈이 내렸다하여 불리운 것이라 하나 근거는 없다. 이 글자는 소은 김제원(小隱 金濟元)이 썼다고 하며, 그 곁에 작은 글씨로 ‘갈암선생장루지지(葛庵先生仗屢之地)’라는 글씨도 있다. 이것은 갈암 이현일과 그의 제자 곡천 김상정의 회동을 기념하여 각자한 것이라 한다.

 

 

 

설계 각자 길 건너 암괴에 새긴 화목각자(花木(刻字)는 눌재(訥齋) 김병린(金柄璘)선생이 음각으로 15cm 정도의 크기로 새긴 것으로 예전에는 곡목마을이 화목마을 이었음을 알려 주고 있으며 이곳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나는 마을 이란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곡목마을의 중요성을 말하는  창원의 유학  

 

 

 

화목각자 길 위쪽을 바라보면 오래된 은행나무가 서있어 이곳에 무언가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갖게 했다. 올라가보니 대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와가 ‘침벽정(枕碧亭)’이 자리하고 있다. 정면에는 침벽정(枕碧亭), 죽와(竹窩), 쌍주재(雙珠齋), 만휴(晩休)의 현판이 각 칸마다 걸렸다. 뒤쪽에 있는 창고 대들보에는 ‘성조개국오백이십칠년병인정원이십육일입주상량’이라고 쓰여 있어 1925년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 된다. 이 집은 200여년전 김성균씨의 7대조 할아버지인 김병기에 의해 건립되었고 해방 전후에 중건 되었다고 한다. 창원시 동읍 화양리 578번지

 

이 집에 걸려 있는 만휴(晩休)라는 편액은 김만현(金萬鉉)의 호에서 따온 것으로 보아진다. 동읍 곡목에서 활동한 사람으로 곡천(谷川) 김상정(金尙鼎)의 후손 만휴(晩休) 김만현(金萬鉉)이 있다. 그의 문집인만휴집(晩休集)1935년 재종손 김병린(金柄璘) 등이 간행하였다. 책머리에 영가(永嘉) 권상규(權相圭)만휴당집서(晩休堂集序)가 있고, 책 말미에는 파산(巴山) 조정래(趙正來)와 그의 증손 김광하(金光河)의 발문이 있다.[출처 분성배씨종친회-창원의 유학]

 

 

 

그리고 야트막한 마을 뒷산인 구룡산 정상부(377m)에는 염산성이 자리하고 구릉 아래에는 석천각자(石泉刻字)와 영귀대각자(詠歸臺刻字) 등 많은 유적이 산재해 있어 마을길을 따라 걷다보면 역사와 문화 그리고 유학의 정신을 배울 수 있는 참으로 유서 깊은 마을임을 알게 된다.
창원시는 이러한 유서 깊은 마을에 옛 문화를 따라 걷는 길을 만들고 문화유산 해설사를 배치하여 홍보한다면 창원의 역사를 홍보하는 일에도 한몫할 것이고 농촌과 도심의 마음을 잇는 가교의 장이 되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