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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에 걸친 효자 임씨이야기

천부인권 2010. 11. 2. 10:48

 

 

<용강리에 있는 나주임씨 삼대 효자비>


 

소학에 이르기를 부자(父子)는 골육(骨肉)으로 맺어졌고 군신(君臣)은 의(義)로서 맺어 졌다고 하였다. 만약 부(父)에 허물이 있어 세 번 간(諫)하여도 끝내 듣지 않으시면 울면서 끝까지 따라야하고, 임금에 세 번 간하여도 듣지 않으시면 의(義)를 버려야 한다고 하니, 부모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한다.


 

 

<정면 방향의 효자비>

 

 

창원시 의창구 동읍 용강리 481번지에 가면 나주 임씨 일가의 삼대에 걸친 효행을 기리는 비 세 개가 나란히 서있다. 창원 소답동에서 동읍 방향으로 따라가다 용강검문소 600m를 지나 좌측으로 진입하여 용강마을로 가면 큰 정자나무가 있고 그 옆에 마을 회관이 있는데, 바로 맞은편에 벽돌로 담장을 친 곳에 효자비 세 개가 나란히 서있다. 좌측으로부터 임성립(林星立), 임빈, 임윤국의 비인데, 가첨석의 양 쪽으로는 주(柱)를 세운 형태로 규모는 3기가 흡사하며 높이 99cm, 너비 87cm이며 비신의 규모는 높이 50cm, 너비 32cm이다.

 

 

 

<효자비 앞쪽에 있는 제단>


나주임씨의 삼대에 걸친 효행비에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오는데 경남농협이 1997년에 발행한 “경남의 전설을 찾아서” 293페이지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조선조 때 동읍 동강리에 임성립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성립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였는데 효성이 지극하여 온 고을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런데 성립이 열네살 되던 해 겨울 어머니께서 우연히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자 백방으로 약을 구하는 한편 인근의 용하다는 의원을 찾아 진맥하여 약을 지어 드렸으나 차도가 없었고 오직 구렁이가 특효약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눈보라치는 엄동설한에 구렁이를 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성립은 밤낮으로 어머니를 간호하며 천지신명께 기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앞산 정상에 머리가 허연 백발노인이 나타나 손짓을 하는 꿈을 꾸고 다음 날 아침 일찍 그 곳에 가보니 커다란 구렁이가 눈 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게 아닌가! 구렁이를 달여 어머니께 드렸더니 병은 거짓말 같이 낫게 되었다.
그 후 어머니께서 돌아가시자 성립은 3년 동안 온갖 정성을 다하여 시묘살이를 하였고 고기를 일체 입에 대지 않았다. 한편 성립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 못지 않게 효자로 이름이 높았다. 아버지 성립이 병들어 눕게 되자 두 아들이 번갈아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넣음으로써 수명을 연장 시켰다, 얼마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고 그의 아버지처럼 고기를 일체 먹지 않았다고 한다.
임윤국은 임빈의 아들이니 곧 성립의 손자가 된다. 윤국 또한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아버지 못지않을 정도로 효성이 지극하였기에 조정에서는 효자비를 세워 그 효행을 기리고 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용강마을 보호수>

 

2007년 1월 29일 보호수로 지정이 되었다. 수령은 300년 정도 이며, 수고 13m, 나무둘레 13m이고, 수종은 팽나무이다.

 

 

<김소남여사 열부비>


 

그리고 용강마을 입구(창원시 의창구 동읍 용강리 160번지) 우측 감나무 밭에는 “열부김녕김소남여사영선비(烈婦金寧金小南女史影善碑)”라 음각으로 새겨진 현대의 비석이 있다. 이 비는 김소남 할머니가 남편이 중풍에 걸리자 자기 엉덩이 살을 때내어 그 살을 구워 남편에게 먹였으나 결국 남편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열부를 기리는 비석이다. 비석의 뒷면에는 김소남여사가 1895년 4월 1일생이고, 1970년에 돌아가셨다고 적어 두었다.
비석의 전체 높이 180cm, 비신높이 128cm, 너비 45cm이며 가첨석과 비대를 갖춘 형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