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밀양 무봉사와 진해 천자봉에 얽힌 전설

천부인권 2009. 12. 26. 13:37

 

 

 

의창군(義昌君)에서 발행한 ‘내 고장의 전설’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1,200여년전 신라 혜공왕 때 법조(法照)라는 한 도승이 밀양의 무봉사(舞鳳寺)를 세울 당시의 일이다.
하루는 선사가 급한 용무로 뒷간을 갔더니 호랑이가 뒷간 앞에 있는지라 다른 곳에서 용무를 마쳤다. 그런데 이틑날 밤, 또 뒷간을 갔더니 이번에도 호랑이가 있는 것이 아닌가. 화가치민 선사가 들고 있던 지팡이로 호랑이의 이마를 쳐버렸다. 그랬더니 호랑이의 이마에서 흰나비 한마리가 날라 나오고 호랑이의 몸은 사라져 버렸다. 선사는 하도 이상하여 흰나비를 따라 나섰다.
나비는 하늘하늘 앞장서가더니 새벽녁에 어떤 산봉우리에 앉았다. 흰나비의 동정을 지켜보니 이번에는 날아서 산 아래 어떤 집으로 들어갔다. 그 집을 찾아들어가니 슬하에 자식이 없는 쉰살 가량의 부부가 살고 있었다. 이들 부부도 간밤에 매우 이상한 꿈을 꾸었다.
부부가 꾼 꿈이 똑같은 내용인지라 기이하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법조선사(法照禪師)가 흰나비를 따라 이 집안으로 들어섰던 것이다.
선사가 두 사람의 꿈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 꿈의 내용은 간밤에 선사가 격은 흰나비와도 관련이 있는 꿈이었다. 이윽고 선사가 "오늘부터 열달 후에 소승이 다시 찾아 주인장에게 청을 하나 드리겠으니 절대로 청을 거절하지 마시길 미리 약조해 주십시오."하고 다짐하여 주인 남자에게 허락을 얻고 떠났다. 열달 후 이집의 부인이 해산하여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날 아침 약속대로 선사가 찾아와서 말하길 "이 아이는 액이 있어 이집에 있으면 머지않아 죽게 될 것이니 소승이 데려가 길러야 하겠으니 맡겨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주인 부부는 열달전 약속도 있고 아이가 죽는다는 말에 선사에게 아이를 주고 말았다. 선사를 따라간 아이는 절에서 공부와 무예를 닦았다. 이 아이는 비범하여 보통의 아이들과는 달랐으며 사람이 보는 앞에서는 항상 왼쪽 주먹을 꼭 쥐고 있는 버릇이 있었다. 이 버릇은 놀 적에도 그러하고 잠잘 때에도 왼쪽 주먹은 펴지 않았다.


어느 날 밤 선사는 아이가 잠든 틈을 타서 왼쪽 주먹을 펴보고 그만 깜짝 놀라 물러앉았다.
아이의 손금에 三자와 1자가 뚜렷한 王자의 손금이 선명 한게 아닌가? 그런데 선사가 미쳐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아이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절간이 떠나갈듯 일갈을 하였다. "에잇! 요사스러운 중놈아!" 그와 동시에 아이의 손이 선사의 따귀를 한대 쳐버렸다. 이어서 아이는 "내 여태 감추고 있던 비밀을 어느새 네놈이 눈치를 챘구나, 그렇다면 내가 이곳을 떠날 수밖에 없다."  그 말을 남기고 절간을 나간 아이의 행방은 묘연 했으며, 뒷날 이아이가 중국으로 건너가 천자가 되었다하고 그런 연유로 천자봉(天子峰)이 생겼다고 전한다.』


 

 

밀양 아동산(衙東山) 기슭에 자리한 무봉사(舞鳳寺)와 천자봉의 전설은 법조선사(法照禪師)라는 구체적인 인물이 등장하는 특이한 이야기이다. 이 전설을 따라 무봉사를 방문해보니 밀양 영남루 위쪽에 있어 ‘영남루’를 찾으면서 한번정도 둘러보는 곳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리고 무봉사에는 국성접(國成蝶)이라 부르는 태극나비 이야기가 있어 더욱 신빙성을 갖게 한다.
http://cafe.daum.net/jeonchon42/IzVl/4 ⇒국성접을 설명한 곳


 

 

 

 

 

밀양 무봉사 석조여래좌상(舞鳳寺 石造如來坐像)의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무봉사 석조여래좌상(舞鳳寺 石造如來坐像)
보물 제493호
밀양시 내일동 37

 

 

『혜공왕 9년(773년)에 법조선사(法照禪師)가 영남사의 암자로 창건했다는 무봉사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97cm의 앉은 불상이다. 원래 불상 뒤의 광배와 앉은 대좌가 없는 채로 영남사 터에 있었던 것을 근처에서 출토된 광배와 대좌를 맞추어 여기에 모셨다.
네모남 얼굴에 가는 눈과 입, 넓적한 코, 짧은 목 등이 다소 평면적으로 표현되었으나 전체적으로 단정한 인상이다. 둥글고 부드러운 어깨에 알맞은 가슴, 목에는 세 줄의 삼도가 뚜렷하고 양 어깨에 걸친 법의는 두텁게 표현되었다.


부처의 빛을 나타내는 광배는 두 줄의 볼록한 선으로 머리의 빛과 몸의 빛으로 구분되었고 안에 넝쿨과 연꽃을 밖에 불꽃을 아름답게 새겼다. 다시 정면에는 다섯의 작은 부처를 새겼고, 뒷면에는 드물게 약사여래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광배 뒷면에 불상이 새겨진 것은 경주 남산의 미륵곡석불좌상에서 보이는 정도로 드문 예이다.


한 개로 된 사각형의 대좌에는 두꺼운 연꽃무늬가 단순 명료하게 새겨졌다.
부처는 단정하고 양감 있게 표현되었으면서도, 법의의 주름이 간략해지고, 광배의 꾸밈이 화려하고 복잡해진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