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천골짝을 지난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산이지만 광산사는 아주 먼 산골로 인식되어 감히 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40호인 ‘광산사 목조보살좌상’ 없다면 영원히 가보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광산사 가는 길은 급변하는 옛 시골을 연상케 한다. 차를 몰아가던 중 신목마을에 접어드는데, 광려천 절벽위에 범상치 않은 소나무 두 그루가 단번에 시선을 끈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갈까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남의 과수원을 지나 서릿발이 솟아있는 흙을 밟으며 소나무에 접근을 했다.
소나무 앞에는 돌을 모아 만든 조산이 있어 옛날에는 당산목 이었음을 알게 한다. 소나무의 크기나, 높이 굵기를 보건데 350~400년은 됨직해 보였다. 가지가 휘어져 있는 곳은 광려천이 흐르고 광려천 바닥과는 3m정도의 높이가 있는 절벽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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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풍당당한 소나무가 광려천의 정기를 빨아드려 광려산을 받쳐 들고 있는 듯한 기상은 신목마을의 자랑이 되기에 충분해 보인다. 이렇게 멋진 소나무를 보호수로 지정하지 않고 내버려 둔 마산시는 문화자산 하나를 방치 한 듯하여 몹시 실망스럽다.
조금 더 오르다 보니 길 우측 산기슭 양지바른 장소에 이름 없는 부도가 자리를 하고 있어 가보니 하나의 부도가 더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놀고 있던 염소가 갑자기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 못마땅한지 맴맴 거린다.
광려산 광산사 일주문 옆에는 ‘광려산 숯굴 산신제단’이라는 작은 비석이 있어 옛날에는 이곳에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들이 많이 살았고 이곳 일대는 숯의 원료인 참나무가 많이 서식했음을 짐작케 한다.
요 근래에 돌만 있으면 돌탑을 쌓아두는 곳이 많이 있어 꼭 이래야만 하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사진으로 담고자 할 때는 좋은 배경이 된다. 근래에 만들어 둔 모습이 역력한 일주문을 뒤로하고 광산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천왕문 계단을 올라서니 광산사의 중심이 되는 극락전이 마당 너머에 마주한다. 그 좌측은 독성각이 우측은 산신각이 자리를 잡고 있다.
광산사 목조보살좌상에 대해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마산 광산사 목조보살좌상(馬山 匡山寺 木造菩薩坐像)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40호
마산시 내서읍 신감리 474
광산사는 장지연(張志淵)이 지은 중수상양문(重修上樑文)에 따르면 원효 대사가 주석했던 신라고찰로 전해진다. 고려, 조선을 거쳐 근대에 까지 이어왔으나 6·25 한국전쟁의 재화로 폐허지경이었던 것을 근자에 와서 극락전 등이 복원되어 그 면모를 갖추고 있다.
극락전에 봉안되고 있는 삼존불상 중 아미타 본존과 좌협시 관음보살상은 현대의 신작이며, 우협시 대세지 보살상이 문화재로 지정된 작품이다.
등으로부터 완만하게 굽어 고개를 약간 앞으로 숙인 채 구도자를 향해 굽어보는 시선, 신체 각 부위의 알맞은 비례와 안정감 있는 자세, 엄지와 중지를 맞대어 겸한 중품하생의 수인, 네모지면서도 동그스름한 얼굴과 자연스러운 의습 처리 등은 조선후기 보살상의 특징을 그대로 따르고 있어 불상을 제작한 불모의 역량을 엿보게 한다.
이 불상은 전체 높이 136.8cm 규모로서 17세기 후반 조성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영·호남 지역의 조선후기 불교 조각사 연구에 중요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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