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경상우도엔 남명 조식이 있다.

천부인권 2010. 1. 26. 17:56

 

 

경상좌도에 퇴계 이황선생이 있다면 경상우도엔 남명 조식선생이 있어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성리학의 두 거유가 당대 최고의 학문을 만들었다. 그 남명선생의 흔적을 이제야 찾아가 본다.


남명선생의 생가지 합천 삼가 외토리 토동(兎洞)으로 가는 도로는 의령 대의에서 33번국도 밑으로 나있는 남명로를 따라 가다보면 길가에 ‘삼가단위농협 창고’가 있고 바로 뒤에 현감 선정비 네 개가 길가에 있다. 이어 양천강을 지나는 남명교가 있고 다리를 지나면 보호수가 서있다.


삼가면 외토리 1374번지에 위치한 이 느티나무는 수령이 450년, 높이가 25m이고, 둘레는 5.3m로 2002년 8월에 합천군수에 의해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이 보호수 아래에는 남명도로의 시작이라는 간판과 함께 남명선생의 시비가 있어 발길을 머물게 한다.


 

 

 

 

홀로선 나무를 읊다.

 

무리를 떠나
홀로 서있기에
스스로
비바람 막기 힘들겠지.
늙어 감에
머리는 없어 졌고
상심하여
속이 다 타 버렸네.
아침이면
농부가 와서 밥 먹고
한낮엔
야윈 말이 그늘에서 쉬네.
다 죽어가는 등걸에서
무얼 배우랴
마음대로
하늘에 떳다 가라앉았다 하네.

 

이 시를 읽다보니 남명 조식선생이 두 번에 걸친 사화에 의해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서 산림처사를 자처하며 살아가는 고단함을 보는 듯하여 마음 한쪽이 시려져온다.


약 40m 더 나아가면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91호인 고려시대 효자비인 외토리 쌍비(外兎里 雙碑)가 있다. 외토리 쌍비의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지금은 남명선생을 찾아 떠난다. 거기서 130m여 떨어진 벌판에는 ‘용암서원(龍巖書院)’과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129호로 등록된 뇌룡정(雷龍亭)의 모습이 보인다.


 

 

 

용암서원 입구에는 커다란 화강암을 다듬어 만든 “을묘(1555)년에 단성현감을 사직하며 올린 상소문”이 새겨져 있어 비장감이 느껴진다. 아래에 이 상소문을 옮겨 적었다.

 

 

 

 

 

『선무랑으로서 단성현감에 새로 제수된 조식은 진실로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주상전하께 소를 올립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선왕(중종)께서는 신이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시고 처음에 참봉에 제수하셨습니다(1538년임) 그리고 전하께서 왕위를 이으신 뒤에 주부로 제수하신 것이 두 번이었는데 지금 또 제수하여 현감으로 제수하시니 떨리고 두렵기가 언덕과 산을 짊어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감히 황종(?) 한 자쯤 되는 땅에 나아가서 하늘의 해와 같은 은혜에 사례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임금이 사람을 쓰는 것은 목수가 나무를 쓰는 것과 같습니다. 깊은 산과 커다란 못 어느 곳에 있는 것이든 재목을 버려두지 않고 그것을 가져다가 커다란 집을 짓는 일을 이룩하는 것은 훌륭한 목수가 하는 것이지 나무가 스스로 참여할 수는 없는 일인 것입니다.

전하께서 사람을 쓰시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시는 책임 때문입니다. 제가 걱정이 되어 견딜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니 감히 그 큰 은혜를 저 혼자 누릴 수는 없습니다만 머뭇거리며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뜻을 끝내 측석(어진 신하의 자리)아래 감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은 벼슬에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뜻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지금 저의 나이는 예순에 가깝고 학문은 어두우며 문장은 과거시험에 끝자리에도 뽑힐 수 없고 행실은 물 뿌리고 비질하는 일을 제대로 해 내기에도 모자랍니다. 과거시험을 보기 10여 년 동안에 세 번이나 떨어진 뒤 물러났으니 애초부터 과거공부를 일삼지 않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과거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런 사람은 성질이 급하고 마음 좁은 평범한 백성에 지나지 않을 뿐이니 큰일을 할 만한 온전한 인재는 아닙니다. 하물며 그 사람 됨됨이가 선한가 선하지 않은가는 과거를 보려고 하느냐 과거를 보려고 하지 않느냐 하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잘 것 없는 신이 이름을 도둑질하여 집사(추천관원)에게 제가 훌륭한 인물이라고 잘못 판단하게 했고 집사는 이름만 듣고서 전하에게 제가 훌륭한 인물이라고 잘못 판단하도록 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과연 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도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문장에 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문장에 능한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도를 지닌 사람은 아니며 도를 지닌 사람은 반드시 신처럼 이렇지는 않습니다. 신에 대해 다만 전하께서 아시지 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재상도 또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알 지 못하면서 등용하여 훗날 국가의 수치가 된다면 어찌 죄가 보잘 것 없는 신에게만 있겠습니까. 헛된 이름을 바쳐 몸을 파느니 알찬 곡식을 바쳐 벼슬을 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신이 차라리 신의 한 몸을 저버릴지언정 차마 전하는 버릴  수 없습니다. 이것이 나아가기 어려운 첫 번 째 까닭입니다. 또 전하의 국사가 그릇된 지 이미 오랩니다. 나라의 기틀은 이미 무너졌고, 하늘의 뜻도 이미 전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비유하건데 큰 나무가 백 년 동안이나 그 속을 벌레에게 파 먹혀 진이 빠지고 말라 죽었는데도 그저 바라보기만 하여 폭풍우가 닥치면 견디어 내지 못할 위험한 상태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실정에 있는지가 오랩니다. 조정에 있는 사람 가운데 충성된 뜻있는 신하와 일찍 일어나 밤늦도록 공부하는 선비가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 형세가 극도에 달하여 지탱할 수 없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손쓸 곳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낮은 벼슬아치들은 아래에서 히히덕거리며 주색이나 즐기고 대관(大官)은 위에서 거들먹거리면서 오직 뇌물을 긁어모으는 데 혈안입니다. 고기배가 썩어 들어가는 것 같은 데도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오라 내신(內臣)들은 파당(派黨)을 세워 궁중의 왕권을 농락하고 외산(外臣)들은 향리에서 백성들을 착취하여 이리떼처럼 날뛰면서 가죽이 다 닳아 없어지면 털이 붙어 있을 곳이 없는 이치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신은 깊이 생각해 보면 탄식만 길게 나올 뿐, 낮이면 하늘을 우러르기 수차례였고 눈물과 한숨을 누를 길 없어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한지가 오랩니다. 나라가 이지경이고 보면, 자전(慈殿, 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밖의 소식이 막힌 깊은 궁궐안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殿下, 명종)는 나이 어린 선왕(先王)의 한 외로운 자식일 뿐입니다.

저 많은 天災와 , 천가래 만 가래로 흩어진 민심을 무엇으로 막고, 어떻게 수습할 수 있겠습니까? 냇물이 마르고(국어) 곡식이 비처럼 내리니(회남자) 그 조짐이 무엇이겠습니까. 노랫가락이 구슬프고(예기) 입는 옷이 흰색이니 나라가 어지러울 형상이 이미 나타났습니다. 이런 때를 당해서 비록 재주가 公과 公을 겸하여 三公의 위치에 있다 해도 손을 쓰기 어려운 형편이온데, 하물며 微臣과 같이 아무 힘도 없는 자야 더 말해 무엇하리이까? 위로는 나라의 위태로움을 조금이나마 부지할 수 없을 것이며, 아래로 터럭만큼도 백성들을 구제할 수 없을 것이니, 전하의 신하되기 또한 어렵지 않습니까. 추호라도 헛된 이름을 팔아 전하의 벼슬을 도적해서 그 녹만 먹고 하는 일 없이 지내는 그런 신하가 되는 것을 신은 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나아가기 어려운 두 번째 까닭입니다.

또 제가 요즈음 보건대  변방에 일이 있어 여러 대신들이 밥도 제 때에 먹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신이 이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일찍이 20년 전부터 이 일이 생겼던 것을 전하의 靈明하심에 힘입어 이제야 발각된 것이요, 하루아침에 된 것은 아닙니다. 평소 조정에서는 재물로 사람을 임용하니 재물만 모이고  민심이 흩어져 결국 쓸만한 장수도 없게 되고 성안의 병사 한 사람 남아있지 않기에 이르렀으니 적이 무인지경으로 쳐들어 온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입니다. 이번에도 대마도 왜노가 향도와 남몰래 짜고 만고에 끝없는 치욕스러운 짓을 하였건만 왕의 신령한 위엄이 떨치지 못하여 마치 절하듯 하였습니다. 이는 옛 신하를 대우하는 의리가 혹 주나라 예법보다 엄하면서 원수를 총애하는 은덕이 도리어 망한 송나라보다 더한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세종께서 남쪽 오랑캐를 정벌하시고 성종께서 북벌하신 일을 보아도 어디에도 오늘날과 같은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것은 하찮은 피부병에 지나지 않고, 마음과 속의 병은 이 보다 더 심각합니다. 가슴과 배의 통증이란 걸리고 막히어 위 아래가 통하지 않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곧 공경대부가 목이 마르고 입술이 타들어가도록 열심히 일하지만 수레는 달리고 사람은 달아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근위병을 불러 모으고 나라 일을 정돈하는 것은 자질구레한 정치나 형벌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전하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방촌(마음)의 사이에서 말이 땀을 흘리는 것처럼 노력하여 만 마리의 소가 밭을 갈아야하는 너른 땅에서 공을 거두는 그 기틀은 자기 자신에게 있을 뿐입니다. 유독 전하께서 종사하시는 일이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학문을 좋아하십니까? 성색(聲色)을 좋아하십니까? 궁마(弓馬)를 좋아하십니까? 군주(君子)를 좋아하십니까? 소인(小人)을 좋아하십니까? 그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국가의 존망이 달려 있습니다.

진실로 전하께서 활연히 깨달으시어 분연히 학문에 진력하시어 명덕(明德)신민(新民)의 도를 얻으신다면 거기에 만선(萬善)이 갖추어져 있어 백가지 응책이 연이어 나올 것이니 그것으로 조치를 취하신다면 나라를 바르게 다스리고 백성을 평화롭게 위기를 평안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약해서 간직하시기만해도 마음이 비지 않음이 없으며 저울질이 고르지 않음이 없으며 사특한 생각이 나오지 아니할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진정이란 것도 다만 마음을 간직하는 데에 달려있을 뿐이니 위로 하늘의 이치에 통하게 되는 데 있어서는 유교와 불교가 한 가지입니다. 다만 사람의 일을 시행함에 있어서는 다리가 없이 땅을 밟고 있는 형국이므로 우리 유가에서는 본받지 아니할 뿐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불교를 좋아하시니 그것을 학문하는 데로 옮기신다면 이것이 바로 우리 유가의 일입니다. 이는 어렸을 때 집을 잃었던 아이가 자기집을 찾아 부모 친척 형제 친구를 만나보는 일과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정치를 하는 것은 사람에 달려 있고 사람을 쓰는 것은 몸으로써 하고, 몸을 수양하는 것은 도로써 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만약 사람을 쓰는데 몸으로써 하신다면 유악안에 있는 사람은 사직을 보위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니 아무 일도 모르는 보잘 것 없는 저 같은 자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만약 사람을 눈으로만 뽑으신다면 잠잘 때 이외에는 모두 속이고 저버리는 무리일 것이니 이 경우에도 앞뒤가 막힌 보잘 것 없는 저 같은 자가 무슨 소용이 이겠습니까. 다른 날 전하께서 왕천하의 지경에 이르도록 덕화를 베푸신다면 저는 마구간의 말석에서나마 채찍을 잡고 그 마음과 힘을 다해서 신하의 직분을 다할 것이니 어찌 임금을 섬길 날이 없겠습니까.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마음을 바로하는 것으로써 백성을 새롭게 하는 요점으로 삼으시고 몸을 수양하는 것으로서 사람을 쓰는 근본으로 삼으셔서 완도의 법을 세우십시오. 왕도의 법이 왕도의 법답지 않으면 나라가 나라답게 되지 못합니다. 밝게 살피시길 엎드려 비옵니다. 신은 떨리고 두려운 마음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전하께 아룁니다.』


 

 

 

남명선생은 30세 무렵에는 김해의 산해정에서, 48세부터 60세까지 이곳 뇌룡정에서, 61세 부터는 산청의 산천재에서 학문과 제자들의 교육에만 힘을 썼던 분이다.


뇌룡(雷龍)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는 뜻으로 덕(德)을 갖춘 사람이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묵묵히 있어도 그 덕의 교화가 사람들을 감동시킨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뇌룡정 주련에는 시거이용현 연묵이뢰성(尸居而龍見 淵黙而雷聲)라 적어 두어 안내판의 설명을 읽어보면 그 뜻을 알 수 있다.

 

 

 

이곳 입구의 간판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뇌룡정(雷龍亭)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29호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46

 

『이 정자는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이 계부당(鷄伏堂)과 함께 지어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이다. 남명선생의 본관은 창녕으로 경상도 삼가현(三嘉縣) 토동(兎洞)에 태어났으며 퇴계 이황과 더불어 영남 유학계를 양분했던 거유(巨儒)였다.
선생이 외토리(外兎里)로 옮겨 온 것은 48세 무렵으로 당시 세웠던 정자는 없어 졌으며, 지금의 것은 1900년대 초 무렵 허유(許愈)에 의해 다시 중건된 것이다.
뇌룡이라는 말은 장자(莊子)의 “시거이용현 연묵이뢰성(尸居而龍見 淵黙而雷聲 : 죽은 것처럼 가만히 있다가 때가되면 용처럼 나타나고, 깊은 연못처럼 묵묵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우뢰처럼 소리친다.)”에서 따온 것이다.
본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정면에는 원기둥을 세우고, 대청 좌우편에 방 셋을 두었다.』


 

 

 

 


 尸居而龍見  주검처럼 있어도 용처럼 드러나고
淵黙而雷聲  연못처럼 침묵을 지켜도 우레처럼 울린다.


양천강 방향으로 작은 쪽문이 있어 나가보니 대나무가 양천강변을 따라 심어져있다. 호젓한 뇌룡정을 뒤로하고 생가지로  발길을 돌린다.


 

 

 

80m아래 마을회관 앞에 차를 세워두고 마을 안으로 걸어가다 우측 골목길로 접어들면 남명선생이 태어났다는 생가지 터를 만난다. 이곳에서 만난 전명순(76세) 어르신에 따르면 이곳 지명은 외토리(外兎里) 내의 토동(兎洞)이고, 생가지에는 집이 두채가 있어 사람이 살고 있었지만 집을 헐어내고 뒤편의 대나무들도 모두 잘라내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하신다.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남명 조식선생 생가지(南冥 曺植先生 生家址)
경상남도 기념물 제148호
합천군 산가면 외토리488


『이곳은 원래 인천이씨 종가로 조선 중기 때의 대학자 남명 조식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선생은 신유년인 1501년(연산군 7) 6월 26일에 이곳 외가에서 태어났다. 원래 선생의 본가는 삼가현의 판현(板峴)에 있었다. 풍수에 따르면 선생의 외가는 명당자리로 닭의 해에 태어나는 아기는 자라서 현인이 된다고 하였다.
그런 예언 때문인지 선생이 태어나던 날 우물에서 무지개 빛이 뻗쳐 온 방을 가득 채웠다고 한다.
조선 중기 경상좌도를 대표했던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함께 영남 유림의 양대 거목이었던 선생은 특히 ‘경(敬)과 의(義)’를 존중하고, 배운 것을 실천하는 선비정신을 강조하였다. 선생이 타계한지 20년 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정인홍(), 곽재우()를 비롯한 선생의 제자들이 의병장이 되어 전쟁에 참여했던 것도 이러한 선생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기 사례라 하겠다.
향후 이곳은 민가를 헐어내고 발굴을 한 후 생가 터를 복원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