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합천 외토리 쌍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91호)

천부인권 2010. 1. 27. 08:54

 

 

강동욱기자의 경남문화 사랑방 : http://kdo.gnnews.co.kr/technote/read.cgi?board=gallery&y_number=11&nnew=2을 보면 이 쌍비의 유래를 적어 두었다.

 

「효자비의 주인공 이온은 남명선생 외조부의 고조부이다.
고려 공민왕 때 이온 부부는 효성이 지극하였으나 가난한 살림살이에 부모의 봉양이 매우 힘들었다. 하루는 부부가 부모봉양을 위해 앞뜰에서 모심기 품팔이를 하는데 별안간 동남풍이 불어 검은 구름이 온 하늘을 뒤덮더니 우레가 천지를 진동하고 공중에서 괴이한 궤짝 하나가 떨어졌다. 모심던 사람들이 놀라 궤의 주위에 모여들어 열려고 했으나 열지 못하는데 부부는 힘을 안들이고 열었다. 궤속에는 쌀이 가득 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신명이 감동하여 떨어진 것이라 여기고 부부에게 주었다.
기이하게도 3년 동안 쌀이 궤속에 가득 차 있다가, 한 번은 이웃사람에게 쌀을 조금 주었더니 그 후 쌀도 궤짝도 없어졌다고 한다.
이온 부부의 효성이 지극해 천지신명이 감응해 쌀 궤짝을 이곳에 내려주었다고 사람들은 비를 세워 효성을 기리기도 했다.
남명은 ‘영모재이공행록후지(永慕齋李公行錄後識)’라는 글에 “고 전의감정(典醫監正) 영모재 이공은 나의 외조부의 고조부이시다. 무자년 중추(1528년)에 내가 돌아가신 아버님의 묘갈명을 지으면서 유고를 열람하다가 공의 연보와 행장 초고가 완성되지 않은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길게 탄식했다…아아 공은 검소한 덕으로 임천(林泉)에 살며 작록을 영화롭게 여기지 않았다. 여러 어진 이와 함께 공부해서 간사함을 물리치고 바른 도를 붙잡고 보호했으니, 그의 뜻은 본받을 만하며 학문 또한 순수하였다. 임금이 그 정성을 돌보시어 쌀을 내려주셨다.”라고 이온에 대해 기록했다. 」


 

 

 

또한 이곳 안내표지에는 쌍비를 이렇게 적어 두었다.
합천 외토리 쌍비(陜川 外兎里 雙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91호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424-2

 

『이 비석은 비각(碑閣) 안에 두 개의 비석이 나란히 서있으므로 외토리 쌍비로 불리고 있다. 정면에서 바라볼 때 왼쪽에 서있는 비는 앞면에 ‘효자리(孝子里)’라는 글자가 새겨진 비석으로 뒷면에는 이 비석을 고려 말 벼슬을 그만 두고 낙향한 중현대부 전의감정(中顯大夫 典醫監正) 이온(李縕, 생몰연 미상)선생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생은 아버지의 상을 당하자 무덤가에 움막을 짓고 3년동안 무덤을 지켰고 50세가 되도록 묘 아래에서 부모님을 애모하였다. 고려 말 이성계(李成桂)가 병마순찰(兵馬巡察)로 영남지방을 순시할 때 선생의 효행을 듣고 왕에게 보고하자고 1383년(고려 우왕 9)에 고성군사(固城郡事) 최복인(崔卜麟)에게 명하여 비각과 함께 비석을 세웠다.
오른쪽에 세워진 비석은 풍화로 글씨가 거의 마모되어 그 내용을 알 수 없으므로 백비(白碑)라고 불린다. 그러나 왼쪽에 있는 비의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역시 효행과 관련되어 세워진 비석으로 추정된다. 원래의 비신만 있었으나, 1686년(숙종 12)에 비석의 대석(臺石)과 이수(螭首)를 만들어 세웠다. 이후 선생의 효행을 세상 사람들의 귀감으로 삼기 위해 이 비석을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원동 마을 앞으로 옮겼다가 일제시대 도로공사를 하면서 다시 원래 비가 있던 이곳으로 옮겼다.
왼쪽 비석의 명문에 1383년에 세워진 것이라는 명확한 기록이 있으므로 흔하지 않은 고려시대의 효자비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이런 효행비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지 생각해보면 나 자신부터 부모의 은혜를 모르는 불효자란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내 자식은 효도를 할 것이라 막연한 감정으로 믿고 있으니 참으로 이기적인 생각만으로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