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송계 신계성 여표비의 내력을 보면 부끄러움을 배운다.

천부인권 2010. 7. 10. 07:42

 

 

 

송계(松溪) 신계성(申季誠)은 송죽림(松竹林)속에 몇 간의 초당(草堂)을 지어 석계정사(石溪精舍)라 하고 모여든 제자들을 행의(行義)로서 예절을 가르치고, 배움에는 반드시 소학(小學)을 먼저 가르쳐 유학(儒學)을 깨우치니 모두 다 공경하고 따랐다 한다. 이러한 그의 덕행(德行)으로 나라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아니하고 평생을 백의(白衣)로 살았으나 그의 지역에 들어온 공경대부(公卿大夫)와 선비는 모두가 다 당대의 산림제상(山林帝相)이라 하였다.
명종 17년 임술(壬戌/1562) 5월 21일 향년 64세로 세상을 떠나 밀양시 장선리(長善里)에 안장하자 당시 밀양부사 약봉(藥峰) 김극일(金克一)이 비문을 지어 여표비(閭表碑)를 세웠다.

 

요즘은 조그만 지식을 가져도 세상이 자기 손바닥에 있는 양 큰소리로 떠들고, 작은 공덕도 크게 부풀리며 허세를 부리는 사람들로 가득한데, 신계성 선생은 나라가 인정하는 학문과 덕망을 갖추고도 결코 벼슬을 하지 않고 바른 세상이 되는 길을 열어주는 산림제상으로 생을 마감했으나 그의 덕행을 아는 선비들은 사액서원에 입향하여 향사를 하였다. 그런 그의 행적을 보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문화재청에서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송계(松溪) 신계성(申季誠) 여표비(閭表碑)
경남 문화재자료 제392호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 72

 

(1) 비문의 주인공
신계성(申季誠 : 1499-1562). 자는 자함(子諴), 호는 송계(松溪), 본관은 평산이다. 송당(松堂) 박영(朴英)의 문인이며,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매우 절친하였다. 남명과 함께 경상우도의 실천적 선비정신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점필재가 태어난 고을에서 태어나고 자람으로써 자연히 사림파의 학문 자세를 지닌 독행(篤行) 군자가 되었으며, 백의(白衣)로서 사액서원인 밀양의 예림서원(禮林書院)에도 배향되었고 김해의 신산서원(新山書院)에도 향사되어 매우 이례적이다.

 

(2) 비문의 성격
여표비는 어떤 인물을 기념하고 드러내기 위하여 그가 살던 마을에 세우는 비석이라는 뜻으로, 유허비와 유사하나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종류의 비석이라 할 것이다.

 

(3) 비문의 찬자(撰者)와 서자(書者)
비문을 지은이는 약봉(藥峰) 김극일(金克一)로, 1576년 이 비문을 지을 당시 밀양부사였으며, 함께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 출입한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백형이다.

 

(4) 비석의 크기와 비각
비신은 사암이며 크기는 가로 80cm, 세로 187cm이고, 이수와 대석이 갖추어져 있다. 비각은 단층 목조맞배지붕 형식이며, 정면과 측면이 모두 1간이다.

 

(5) 비석의 조성 경위
송계 신계성의 여표비는 송계 몰후 14년 뒤인 1576년에 손영제(孫英濟)·장수정(蔣守貞)·이경옥(李慶沃) 등의 주도로 당시 밀양부사인 약봉(藥峰) 김극일의 글을 받아 처음 세웠던 것이다. 이 때 비문의 글씨를 쓴 이는 향인 박도생(朴道生)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비석이 파괴되어, 박수춘(朴壽春)의 주도로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의 지문(識文)을 받아 다시 세웠다.『내암집』에는 이 비석을 세웠다고 되어 있으나, 후손들은 이 비석을 세운일이 없다고 한다.
1634년에 밀양부사 이유달(李惟達)이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지문을 받아 중건하였다. 이 때의 글씨는 창원부사 오여벌(吳汝橃)이 썼고, 두전은 사간(司諫) 김세렴(金世濂)이 썼다.
1756년 화재로 비각이 소실되면서 비석이 크게 훼손되었다. 1765년에 8세손 신사일(申思一)이 향중의 사림(士林)과 부사(府使) 김인대(金仁大)의 협조를 얻어 새 빗돌을 마련하고 비각과 비석을 다시 중건 하였다. 지문(識文)은 예조판서 윤급(尹汲)이 찬술하고, 약봉의 여표비명 및 여헌의 중건 지문과 함께 윤급 자신이 글씨를 썼으며 두전은 지수재(知守齋) 유척기(兪拓基)가 썼다.

 

 

 

 

이 여표비의 윗부분인 가첨석의 모서리는 하늘을 날아 올라갈 것처럼 휘어져 있어 특색이 있고 반석은 사각으로 다듬은 돌을 사용하였다. 벼슬을 한 사람들의 비석을 보면 아래에 거북처럼 다듬은 비희를 만들었지만 신계성 선생은 벼슬을 하지 않아 평범한 반석을 사용했는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