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왜장를 감복시킨 박양춘 여표비각

천부인권 2010. 7. 13. 11:05

 

 

 

 천혜의 자연을 품은 땅 밀양에도 밀양사포산업단지가 한참 만들어지고 있어 밀양도 좋은 공기를 마시며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깨닫게 될 날이 머지않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공장 부지를 만드느라 먼지가 풀풀나는 길을 따라 계속 갔다.


예림서원으로 찾아가는 58번 국도를 가면 후사포리를 거치게 되는데 길가에 인접하여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 257-1번지와 후사포리 261번지에는 280년, 270년 된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가 나란히 서있어 이 마을의 내력을 한번에 알려 주는 듯하다.


 

 

 

경남문화재자료 제195호인 박양춘 여표비각 역시 58번 국도와 붙어 있는데, 담장 밖에서 사진촬영을 하다가 자물쇠를 열고 들어가고 싶어 마을 노인당을 찾아가 물으니 어르신 한분이 자신의 집에 열쇠가 있다고 기다리라고 하여 열쇠를 가져 오셨는데 열쇠가 맞지 않아 결국 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사다리를 놓고 촬영을 했다.

 

여표비(閭表碑)는 충신·효자·열녀 등의 언행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마을입구 등 길가에 표시로 세워두는 비(碑)를 말한다. 여기에 세운 여표비는 임진란 때 박양춘이라는 분이 조모와 부친의 상을 당하자 전쟁을 피해 도망가지 아니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시묘살이를 하는 모습을 보고 왜장 석전삼성(石田三成)이 그의 효심에 감복하여 다른 왜병도 이 사람을 해하지 말라는 뜻으로 “하늘이 내린 효행(出天之孝)”이라는 글을 적어 이곳에 세워둔 것이 여표비의 시초라 한다.

 

 

 

이곳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박양춘(朴陽春) 여표비각(閭表碑閣)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95호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 262-1

 

모헌(慕軒) 박양춘은 조선조 명종(1545~1567)때 효행으로 호조참의(戶曺參議)에 제수된 성재 박항(惺齋 朴恒)의 아들로 충효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소시절 부친상 장례 후 30리 길을 조석(朝夕)으로 왕래하며 밤에 시묘하고 낮에는 어머니를 봉향하는 일과를 거르지 않았다. 특히 임진왜란 중에 조모와 부친 두분상을 당하여 병화를 피하지 않고 겨우 초빈(草殯)을 끝내고 통곡하며 관곽(棺槨)을 지켜셨다. 이때 북상하던 왜장(倭將) 석전삼성(石田三成)이 하늘이 내린 효행(出天之孝)이라 크게 감복하여 침범치 못하게 마을 입구에 표식을 세웠으니 이것이 여표비(閭表碑)의 시초다.


이후 고을에서 백세(百世)의 교훈을 삼고자 정려각(旌閭閣)을 세웠고, 정조조(正祖朝) 때 삼강록(三綱錄)에 실렸으며 증 이조참의(贈 吏曹參議)에 올랐다. 그 후 정려각의 퇴락으로 1912년 향도(鄕道)의 사림들이 선생을 추모하여 지금의 여표비각을 재 건립하였다. 비록 근대에 새워진 비각이나 거북형상의 비대(碑臺)를 사용하여 그 형태나 규모가 특징적이다.

 

 

두산백과사전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1912년 손익현(孫翼鉉), 조세모(曺世模), 이후성(李厚性), 이병희(李炳熹) 등의 사림들이 그 사적을 기념하기 위해 여표비를 건립하고 비각을 세웠다. 비석의 제액은 <모헌박선생여표유허비명병서(慕軒朴先生閭表遺墟碑銘幷序)>라 하였고, 비문은 김도화(金道和)가 지었고 글씨는 안종석(安鍾奭)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