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대를 이은 효자 부자상호비 이야기

천부인권 2013. 3. 1. 09:25

 

 

 

<현재 명지노인당 앞에 있는 옛 비>

 

조선(朝鮮) 순종(純宗) 때 창원시 지귀동(知歸洞)에서 태어나 자란 김우진(金禹振, 1795~1835)과 그의 아들 김창용(金昌瑢, 1822~1845)의 남다른 대를 이은 효자 이야기가 부자상호비(父子相互碑)와 함께 봉림동에 전해 오고 있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 실려 있는 사진>


유당(攸堂) 김종하(金鍾河)선생이 쓴 「창원군지」 73P, 효자편에는 두 부자(父子)를 “효행이 특이하여 사림(士林)이 정상(呈狀)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두 부자의 효행을 알고 있는 김사백(金思百)· 안기석(安琦錫)· 김호원(金鎬源)· 김병린(金柄麟) 등이 고종 임인년(壬寅年 1902년)에 장계(狀啓)를 올려 포상과 정려를 건의하여 그 내용을 비석에 새겼다. 금석문의 정면에는 ‘김해김씨부자포효비(金海金氏父子褒孝碑)’라 새기고 뒤쪽에는 부자의 효행을 기리는 내용을 담았다. 이 비에는 1958년(戊戌年) 3월 노근용(盧根容)이 글을 짓고, 글씨는 김종하(金鍾河)가 썼다고 적혀 있다.

현재 ‘김해김씨부자포효비(金海金氏父子褒孝碑)’는 두 곳에 세워져 있는데 처음 1958년(戊戌年) 3월에 비가 세워진 곳은 지귀동 독산(知歸洞 獨山)이었으나 창원의 개발로 인해 마을과 독산이 사라지자 창원시 의창구 명서로123번길 9(명서1동 174-9번지), 명지노인당 앞에 임시로 옮겨 둔 것이 자리를 잡아 지금까지 옛 비가 그곳에 세워져 있다.

 

 

 

<현재 봉곡동 '효자공원'에 세워져 있는 모습>


 

그리고 ‘김해김씨부자포효비(金海金氏父子褒孝碑)’와 함께 있던 1979년에 세운 ‘김차곤공(金次坤公)을 기리는 비’의 옛 비석은 땅에 묻고, 두 비를 새로 제작하여 2010년 5월 30일에 옛 지귀동 터인 태복산 끝자락 구산봉우리 밑인 봉곡동 ‘효자공원’으로 옮겨 세웠다.
‘지귀·신촌 옛터’ 비갈과 새롭게 만든 ‘김해김씨부자포효비(金海金氏父子褒孝碑)’, ‘김차곤공(金次坤公)을 기리는 비’가 세워져 있는 지귀로73번길과 서곡로가 감싼 삼각형의 공원은 특별한 이름이 없어 ‘효자공원’이라 명명한다.

 

 

 

<'효자공원'에 세워져 있는 부자상호비와 김차곤공 기리는 비>

 

 

김우진과 그의 아들 김창용의 대를 이은 효자의 이야기 내용은 ‘김해김씨부자포효비(金海金氏父子褒孝碑)’에 남아 있으나 ‘창원의 얼을 찾아서’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여기에 옮겨 적는다.

 

 

대를 이은 효자.hwp

 

김우진(金禹振)과 그의 아들 김창용(金昌瑢)은 우리 고장 창원이 자랑하는 효자로 우리들 가슴에 새겨져 있다.
김우진은 조선 순중 때 사람으로 지귀마을에서 태어났다. 우진은 어릴 때부터 행실이 바르고 효성 또한 지극하여 주위의 창송이 자자했다.
어느날, 이웃 마을에서 환갑잔치가 있어 품을 팔러갔던 우진은 품삯 대신 고기를 얻어 어머니께 드리기 위해 급히 달려오다 잘못하여 고기를 싼 보통이를 흙탕물에 빠뜨리고 말았다.
그 결과 고기는 먹을 수 없게 되었고, 우진은 이런일이 자신의 효성이 부족한 탓이라 여겨 이후부터는 고기를 입에 대지 않겠다고 맹세하게 되었고, 평생 동안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어머니께서 돌아가시자 우진은 양지 바른 곳에 장사지내고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우진은 아침저녁으로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진지상을 올림은 물론 묘소 돌보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느덧 봄이 가고 여름이 왔다.
저녁상을 물린 우진은 쌀과 향을 준비하기 위해 마을로 내려오게 되었는데, 잔뜩 찌푸려 있던 하늘은 마침내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운진은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으나 빗줄기는 점점 굵어졌고 사방은 칠흙같이 어두어졌다.
우진은 걱정이 앞섰다. 혹시나 폭우로 어머니 산소가 씻겨내려 가지 않을까 두려운 나머지 부리나케 움막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렇지만 캄캄한 어둠 속에서 길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였다. 우진은 마음이 급한 나머지 발걸음을 재촉하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등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이렇게 숲속을 헤매다 지칠대로 지쳐있는 우진 앞에 갑자기 불빛 하나가 나타나는 게 아닌가!
우진은 불빛을 따라 한걸음 한걸음 산소로 향했다. 마침내 어머니 산소에 다다른 우진은 어머니 산소에 엎드렸다. 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으나 산소는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누구신지 모르나 정말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우진이 고개를 들었으나 불빛은 이미 간 곳이 없었다.
뒷날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마을 사람들은 우진의 효성에 감동한 산신령이 귀신불을 보내 길을 밝ㅎ주었다고 칭송해 마지않았다.
한편 우진에게는 창용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창용 또한 그의 아버지 못지않게 효성이 지극하여 주위 사람들은 ‘대를 이은 효자’가 났다고 칭송하여 마을의 자랑으로 여겼다.
어느해 겨울, 우진의 목에 조그만 종기 하나가 생겨나더니 마침내 큰 혹으로 변했고, 결국에는 퉁퉁 부어 물 한 모금조차 마실 수 없게 되었다.
창용은 의원을 모셔와 진찰한 결과 오직 뱀의 알을 구해 상처에 붙이는 것 외는 특효약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추운 겨울에 어디 가서 뱀 알을 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창용은 낙심하지 않고 아버지의 병구완에 전력을 했으나 병세는 점점 더해만 갔다.
창용은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어 뱀알을 구하기 위해 산속을 헤매기 시작했다. 이렇게 몇일을 지내다보니 손과 발은 동상에 걸렸고 온 몸은 지칠대로 지친 나머지 만신창이가 되었다.
창용은 지친 몸을 나무 등걸에 기대어 휴식을 취했다. 그러다 창용은 그만 깜빡 잠이들고 말았다. 잠결에 고통을 참지 못해 신음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까치 울음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오는 게 아닌가?
그 순간 창용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창용이 눈을 뜨자 몇걸음 앞에 까치가 앉아 발로 눈을 헤집으며 울고 있었다.
이상하게 여긴 창용은 벌떡 일어나 까치가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까치는 창용이 다가가자 두어 번 눈을 더 파헤치더니 자리를 비껴 앉았다.
창용은 조심스럽게 눈을 치우고 한참 동안 파내려가자 그곳에는 겨울잠을 자고 있던 뱀의 무리가 있었고 뱀의 알도 찾을 수 있었다.
창용이 뱀 알을 구워 가루를 내어 아버지의 목에 붙였더니 혹이 없어지고 병도 씻은 듯이 나았다.
얼마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창용은 양지바른 곳에 산소를 마련하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며 못다한 효도를 다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묘가 너무 외딴 곳에 있어 항상 마음에 걸렸던 창용은 마침내 묘를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묘를 옮기는 날 인부를 재촉하였으나 일은 쉽게 끝나지 않았고 어느 새 주위에는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 상태로는 도저히 일을 더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중단하고 다음 날 다시 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창용과 인부들은 어찌할 줄 몰라 안타까워 할 따름이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환한 불빛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 모두들 깜짝 놀라 주위를 살폈으나 불을 밝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혼비백산하여 우왕좌왕 했지만 불빛은 떠나지 않고 도리어 이장하던 곳을 더욱 환히 밝힐 뿐이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그 불빛이 창용의 효성에 감동한 귀신불임을 알게 되었고 서둘러 하던 일을 계속해 나갔다. 귀신불은 작업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비췄고, 일을 끝마치자 묘지를 한 바퀴 돈 다음 휑하니 사라졌다.
창용과 인부들은 큰 절을 올렸다. ‘왕대 밑에 왕대 난다.’고 했던가? 효자 아버지에 효자 아들. 이들 부자의 효성에 감동한 귀신불은 두 번이나 나타나 어려움을 이길 수 있게 해주었다.
그 후 우리 고장 사람들은 이들 부자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부자 상호비’라는 효자비를 세워 자랑으로 삼았고, 그들의 효성은 지금까지 우리들 가슴으로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출처 : 창원의 얼을 찾아서]

대를 이은 효자.hwp
0.02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