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구계서원은 사천시의 또 다른 자존심

천부인권 2010. 8. 15. 18:05

 

 

 

사천에서 진주시 금곡면으로 향하는 시· 군도 1002호선을 따라 4㎞쯤 가면 구암리 만죽산(萬竹山) 기슭에 자리한 구계서원을 만날 수 있다. 맞은편은 공단을 만드느라 온통 산을 파헤쳐 놓아 앞으로는 호젓한 구계서원이 공장 냄새가 진동할 것으로 보인다.
구계서원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 풍영루(風詠樓) 벽면을 보면 “구계서원 방문객께서 안내 또는 해설을 원하시면 아래로 연락바랍니다. 약 15분 정도 소용됨. 사천시청 055)831-2727, 해설사 010-6396-7659”라 적은 쪽지가 있으니 해설을 듣고자 하는 분들은 연락을 미리하고 가면 좋은 공부를 하게 될 것이다.

풍영루는 정면 7칸, 측면 2칸, 2층 고진각지붕으로 이루어졌으며 경내로 들어가면 다시 계단이 나온다. 경사진 산에 집을 짓다보니 이렇게 만들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였다. 계단을 오르면 유생들의 글방 및 회의장이던 서재((西齋) : 講堂, 不欺堂)는 정면 5칸, 측면 2칸,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졌고, 동재(東齋 : 居敬, 明義齋)는 정면 4칸, 측면 1.5칸, 팔작지붕으로 서로 마주보도록 배치되어 있으며, 서재의 현판이 구계서원이다.

 

 

 

 

다시 계단을 올라서 내삼문인 중기문(重起門)을 들어서면 높은 장대석 위에 위패를 모신 묘우(廟宇)가 안치되었다. 묘우는 정면 3칸, 측면 1.5칸, 맞배지붕으로 되어있으며 아래 좌측에는 미수(眉馬) 선생이 비명을 찬서(撰書)한 구산사비(龜山祠碑)와 우측에는 성옹(醒翁)선생 및 함의재 최관(涵義齋 崔瓘)의 기적비를 세워 놓았다.[출처 : 사천시사]

 

 

 

 

구계서원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구계서원(龜溪書院)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0호
사천시 사천읍 구암리 산43번지, 수량 : 5동(48평)

 

서원은 구암 이정(龜巖 李楨)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1611년(광해군 3)에 구산사(龜山祠)를 창건한데서 비롯한다. 이정(李楨 1512~1571)은 사천시 구암리에서 출생하였으며 1536년(중종 31) 문과에 급제한 후 내외의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1568년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고향에 구암정사(龜巖精舍)를 지어 후진을 양성하였다.
1676년(숙종 2) 4월 사천사림의 상소에 의하여 구계(龜溪)라는 액호(額號)가 내려져 사액(賜額)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723년 광해군 때 폐모(廢母)논의에 반대하다가 사천 등지로 유배된 적이 있는 김덕함(金德諴)을 함께 모셨다. 그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헐렸으나 1931년 다시 지었으며 1974년부터 1988년에 이르는 동안 여러 차례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경내에는 정면 4칸의 강당, 정면 3칸의 묘우(廟宇), 동.서재(東.西齋) 등의 건물이 있다.

 

 

 

향교(鄕校)가 고려시대부터 조선에 계승된 지방의 공공교육기관이라 한다면, 서원은 조선 중기에 보급된 사학기관으로서 명현(名賢)의 위패를 모시어 제사하고 청소년을 모아 인재를 기르던 기관이라 하겠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유교 중심정책을 써서 고려의 사원(寺院)을 대신하여 서재(書齋)· 서당(書堂)· 정사(精舍)· 선현사(先賢祠) 등을 장려하였다. 세종은 특히 이를 장려하여 상을 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때의 서원은 재와 사의 두 기능을 겸한 것이 못되었으니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周世鵬 : 곤양군수 역임)이 순흥(順興)에서 고려의 학자 안향(安珦 : 安裕)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이듬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 한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서원이었다.[출처 : 사천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