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양산 홍룡사 관음전

천부인권 2011. 8. 16. 18:46

2011.7.24.천성산 홍룡사 관음전

 

홍룡폭포(虹龍瀑布)에서 흘러내린 계곡에는 피서객들이 가득하여 자동차를 주차할 공간이 부족하였고, 버스를 돌릴 공간이 없어 우리 일행이 타고 간 버스 때문에 경찰이 출동을 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일반주차장이 있는 곳에서부터 계곡과 산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홍룡사 주차장이 나온다.

 

2011.7.24.천성산 홍룡사 관음전

 

보통의 절은 일주문이 나오지만 홍룡사(虹龍寺)는 가홍정(駕虹亭)이라는 정자가 일주문이면서 사천왕문(四天王門)의 구실을 한다. 물론 절에서 지은 것이 아니라 양산시가 양산8경의 하나인 홍룡폭포 일원에 대한 정비사업을 하면서 세우긴 했지만 그 위치가 홍룡사의 입구 구실을 하기 때문에 그렇게 볼 수밖에 없다.

 

“가홍정은 일제강점기에 상북 대석마을에 살던 가선대부 석은(石隱) 이재영이 죽우(竹友) 권순도와 함께 세웠다는 정자로 1970년에 헐리고 콘크리트 쉼터로 있다 이번에 2층 누각 형태로 새로 새웠다.”고 ‘전기(電氣)통’카페는 전한다.
 

2011.7.24.천성산 홍룡사 관음전

 

가홍정을 지나면 홍룡폭포와 홍룡사가 보인다. 불자라면 홍룡사를 찾겠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홍룡폭포로 향한다. 폭포는 산신각으로 가는 다리에서부터 천룡이 하늘을 향하여 꼬리를 치며 올라가는 듯 물줄기가 시원하게 쏟아진다. 홍룡폭포에 이르면 20m여 높이의 암벽에서 떨어지는 폭포에 놀라고 폭포 옆 절벽에 세운 관음전을 보면 또 다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2011.7.24.천성산 홍룡사 관음전

 

 

2011.7.24.천성산 홍룡사 관음전

1970년 조성된 관음전은 홍룡폭포 안쪽 중간부분에 위치하면서 간결한 맞배지붕  주심포 구조로 되어 있으며, 정면 3칸과 측면 2칸으로 공간에 비해 비교적 규모 있게 지어졌다. 정면에 여닫이문, 양 협간에 외여닫이문을 달았고, 측면과 후면은 모두 벽으로 했고 내부는 하나의 공간으로 조성한 一자형의 불단으로 되어있다.

천성산 중턱에 자리한 홍룡사(虹龍寺)에서도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관음전은 중생들의 괴로움을 구제하고 보살핀다는 백의관음으로 표현된 해수관음보살과 폭포 속에서 화현하신다는 낭견관음을 함께 모시고 있다. 뿐만 아니라 후불탱화 역시 관음탱과 천수천안관음탱을 조성하고 있어 관음성지로서의 격이 다르다 말할만하다.

 

2011.7.24.천성산 홍룡사 관음전 주련

 

관음전 네 기둥에는 다음의 주련이 걸려 있다.

壹葉紅蓮在海中 바다 가운데 한 잎의 붉은 연꽃처럼
碧波深處現神通 푸른 물결 깊은 곳에 신통 보이시니
昨夜寶陀觀自在 어젯밤의 보타산에 계시던 관음보살이
今日降赴道場中 오늘 이 진리의 장소 속에 강림하셨네.

 

2011.7.24.천성산 홍룡사 관음전

 

 

천성산 홍룡사는 신라 제30대 문무왕 13(673)년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당나라 태화사가 장마로 산사태가 일어날 것을 미리알고 ‘원효가 판자를 던져 대중을 구하다.(海東元曉擲版救衆)’라는 현판을 날려 그 들을 구해준 것에 감복하여 천명의 중국 승려가 원효대사를 스승으로 모시고자 하였다.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이곳 원적산 일원에 89개의 암자를 지었는데 이곳에 ‘낙수사(落水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지만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수백년 동안 절터만 남아 있다가 1910년대에 통도사 승려 법화(法華)가 중창하여 홍룡폭포의 이름을 빌어 절을 홍룡사라 지었다고 전한다. 이후 1970년대 말 우광(愚光)이 주지로 부임한 뒤 중건과 중수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며, 현존하는 건물은 대웅전, 종각, 선방, 요사채, 산신각 등이 있고, 폭포 옆에는 관음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