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대교에서 바라본 남해충렬사 전경>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었던 이순신장군에 향사를 올리는 남해 설천면 노량리 350번지에 위치한 남해충렬사의 내삼문을 들어가면 정면에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쓴 비와 비를 보호하는 비각이 나타난다. 이 비각에는 ‘보천욕일(補天浴日)’이라 적은 현판이 있다. 현재의 현판은 민족의 역적이면서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지낸 다카키마사오(다까끼마사오)가 쓴 글이다.
‘보천욕일(補天浴日)’이란 '하늘을 수리하고 해를 목욕 시킨다'는 뜻으로 정유재란 때 명나라 어왜도총관 전군도독부 도독의 신분으로 전란에 참가한 명나라 진린(陳璘) 도독이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장군과 함께 승리를 이끌었지만 이순신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운명을 달리하자 장군의 공을 명나라 황제에게 보고한 내용에서 나온 글이다.
<우암선생이 쓴 비석과 민족의 역적 박정희가 쓴 현판>
정유재란에 원군으로 참여한 진린도독은 조선의 이순신장군과는 달리 자신들의 전쟁이 아니라 조선을 도와주는 전쟁이므로 적극적이지 않았다. 자신의 업적을 위해 왜구와 협상을 하고 왜구가 도망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등의 행위를 하자 이순신장군은 진린도독을 만나 이런 일들을 따지자 진린도독은 “내가 명나라 황제의 칼을 가지고 왔다.”며 엄포를 놓았다한다. 이에 굴하지 않고 이순신장군은 “이 전쟁은 왜구가 명나라와 전쟁을 해야겠으니 조선에 길을 빌려달라고 하여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조선의 의리에서 시작되었는데 어찌 조선만의 전쟁으로 생각합니까?”라고 말하며 진린 도독을 설득하였다.
이순신장군에게 감동을 받은 진린 도독은 일본의 야욕은 명나라와의 전쟁을 핑계로 조선과 전쟁을 하였지만 조선이 무너지면 다음은 명나라도 위험해 질 것으로 판단했는지 이후 이순신장군과 함께 왜구를 무찌르는데 힘을 다하여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끄는 주역으로 등장했다.
정유재란이 끝나자 진린(陳璘) 도독은 명나라 황제에게 “이순신은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능과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이 있다”고 보고하였고 보천욕일은 ‘어마어마한 공적’을 가리킬 때 쓰는 말로, 중국 신화에서 비롯됐다. 이에 명나라 신종(神宗)황제가 이순신장군에게 명조(明朝) 팔사품(八賜品)을 하사하니 1966년 2월 4일에 보물 제440호로 지정이 되어 현충사에 보관하고 있다.
<다까끼마사오의 친필 현판>
‘보천(補天)’은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저술한 『회남자(淮南子)』의 <남명훈(覽冥訓)>에서 나오는 글이다. “옛날에 물을 다스리는 신, 공공(共工)과 불의 신, 축융(祝融)이 싸워서 공공이 패하자 서쪽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인 불주산(不周山)을 머리로 부딪쳐 무너뜨렸다. 그래서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땅이 갈라지며 홍수와 큰 불이 났다. 이를 여와가 강에서 ‘오색 빛깔의 돌을 골라 불로 녹여서 부셔진 하늘을 보수하고(女媧煉五色石 以補蒼天)’ 홍수를 막아 재앙을 다스렸다.”고 전하는 글에서 빌려온 것이다.
‘욕일(浴日)’은 고대의 백과사전이라 전하는 ‘산해경(山海經)의 대황남경(大荒南經) 편’에서 빌려 온 글로 “태양의 신 희화(羲和)는 제준(帝俊)의 아내로 10명의 태양을 낳았다. 그들은 동쪽 바다 밖 탕곡의 큰 나무인 부상(扶桑)에 살았는데 10개의 태양은 하루씩 번갈아가며 하늘을 감시했다. 희화는 그날의 일을 맡은 아들인 태양을 늘 수레에 태워 바래다주었는데 매일 아침마다 수레에 오르기 전에 ‘태양들을 데리고 감연에서 깨끗하게 목욕했다(方日浴于甘淵)”는 것에서 욕일이라는 말을 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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