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성인을 찾아 떠나는 양산 천성산 내원사

천부인권 2011. 7. 22. 18:03

 

 

성인을 찾아 떠나는 양산 천성산 내원사

 

양산IC를 지나 35번 국도를 따라 통도사방향으로 가다보면 ‘경상남도 기념물 제81호’로 지정된 천성산 내원사(千聖山 內院寺)로 인도하는 안내판이 보인다. 안내판이 안내하는 대로 가다보면 경부고속도로 위로 놓인 다리를 지난다. 이 다리를 지나면 도로 우측에는 1천명의 성인이 탄생했다는 천성산에서 흘러오는 계곡이 이어진다.
아름다운 계곡과 산세를 간직한 천성산은 673년(신라 문무왕13)에 설총(薛聰)의 아버지 원효대사(元曉大師:617~686)와 관련한 전설이 전해 오는데 불광산(佛光山, 660m) 장안사(長安寺) 척판암(擲板庵)에서 참선(參禪)에 든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중국을 바라보니 당나라 태화사(太和寺)라는 절이 장마로 인해 산사태(山沙汰)가 일어나 기도를 하고 있는 1천여 명의 대중이 흙더미에 묻힐 순간이었다. 이에 원효대사가 판자에 글을 써서 던지니 이 판자가 태화사의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어 이것을 신기하게 생각한 대중들이 법당에서 나오자 뒷산이 무너져 법당을 덮쳤다.
수도(修道)하던 승려(僧侶)들이 판자를 보니 ‘원효가 판자를 던져 대중을 구하다.(海東元曉擲版救衆)’라 적혀 있어 이곳 승려(僧侶)들이 모두 해동(海東)의 원효를 찾아와 제자가 되기 원했다. 이에 원효가 그들이 머물며 수도(修道)할 수 있는 곳을 찾아서 내원사 부근에 이르자 산신이 마중을 나와서 안내를 하였는데 지금의 산신각(山神閣) 자리에 이르자 산신은 사라졌다 한다.
이에 원효대사는 산신이 사라진 이곳에 산신각을 짓고 이 일대에 89암자를 지어 1천명의 제자들을 머물게 하며 공부(工夫)를 시켰으며, 천성산 정상에 큰 북을 달아놓고 북을 쳐 제자들을 불러 모아 설법을 열고 화엄경(華嚴經)을 강론하였다 한다.  이때 화엄경을 가르친 자리를 ‘화엄벌’이라 하고, 북을 친 곳을 ‘집북봉’이라고 한다. 원효대사의 설법과 화엄경을 듣기 위해 산을 오르던 중생들이 칡넝쿨에 걸려 넘어지는 일이 잦자 산신을 불러 칡넝쿨을 없애달라고 하여 지금까지 천성산에는 칡이 없다고 전한다.
그리고 원래 이곳 산 이름은 원적산(元寂山)이었지만 1천의 원효대사 제자들이 모두 성인이 되었다고 하여 천성산(千聖山)이라는 좋은 이름을 얻어 오늘에 전한다. 천성산 일대에는 내원사(內院寺)를 비롯해 원효가 세웠다는 안적암, 노전암 등 여러 암자들이 세워져 있다.


 

 

 

천성산 생태계 파괴를 막기 위해 온몸을 던진 지율스님의 일화로 유명한 천성산 내원사 일주문을 지나면 주차장이 있는데 이곳에 내원사 익성암(內院寺 益聖庵)이 자리하고 있다. 내원사뿐만 아니라 천성산 일대의 암자들은 비구니스님(女僧)이 공부하고 기도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차량을 주차한 후 양산 내원사 익성암(益聖庵)으로 발길을 옮기는데 입구에 이런 글귀가 있다.

 

 

 

꽃은 늘 웃고 있어도 시끄럽지 아니하고,
새는 늘 울어도 눈물을 보이지 아니하고,
대 그림자 뜰을 쓸어도 먼지가 일지 아니하고,
달빛이 물을 뚫어도 흔적이 없네.
불기 2546년 산승 씀

 

 

익성암(益聖庵)을 내려와 내원사로 향하는 첫 다리인 심성교(尋聖橋)를 지나면서 성인을 찾는다는 경건한 마음으로 심성교를 지나자 좌측에 산신각이 자리를 하고 맞은편 에는 수령 700년, 수고 25m, 나무둘레 3.1m나 되는 보호수인 적송이 우람한 모습으로 굽어보고 있다.

 

 

 

 

내원사로 오르는 도로는 지금은 아스콘으로 완전히 포장이 되어 있어 자가용으로는 내원사 입구에 까지 갈 수 있다. 그러나 걸어가면서 듣는 계곡의 물 흐르는 소리는 오케스트라 음율 못지않은 자연이 들려주는 화려한 소리는 정신을 맑게 하고 힘을 솟아나게 한다.

 

 

<진산교의 모습>

 

 

<금강교를 지나면 금강암이 나온다>

 

 

<금강암과 바위 절벽이 만나는 곳>

 

내원사로 가는 길은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걷게 되는데 심성교(尋聖橋), 진산교(鎭山橋), 금강교(金剛橋)를 지나 절반쯤 오르다보면 길 좌측에 거대한 암벽이 시작하는 곳에 금강암(금강대)으로 오르는 작은 오솔길이 나있다.

 

 

<금강암으로 오르는 비탈진 오솔길과 내원사 계곡>

 

 

<금강암의 모습>

 

내원사에서 내려오던 길에 들렀던 금강암은 비구니 선주스님이 감원으로 계신다. 남자인 내가 이런 비구니스님이 계신 암자를 갈 때 비구스님이 계신 곳보다 오히려 조심스럽고 사진 한 장 찍는 것도 소심해진다.


금강암에서 마주보는 맞은편 산 풍경과 계곡의 모습은 여기가 무릉도원이요 신선이 머물다가는 신선대는 아닐까하고 생각하게 한다. 스님께서 양화를 기르고 계시기에 어떻게 먹는지 물어보니 양화의 독특한 향기를 이용하여 가지와 함께 요리를 하면 묘한 매력이 있는 음식이 된다는 설명을 해주셨다.

 

 

 

<옥류교의 모습>

 

옥류교(玉流橋)를 지나면 꽤 너른 주차장이 자리하고 음식점도 있고, 화장실도 잘 정비되어 있어 잠시 쉬었다 갈 수 있는 곳이다. 주차장을 빠져 나가는 곳 여기저기 커다란 돌에 좋은 글귀들을 적은 비갈들이 세워져 있어 내원사로 가는 길에 세속에 묻은 때를 마음속에서라도 잠시 버리고 갈 수 있는 곳이다.

 

 

<티끌까지도 씻고 가라는 세진교(洗塵橋)>

 

 

 

주차장을 벋어나면 세진교(洗塵橋)를 지난다. 마음의 티끌까지 씻고 내원사로 가는 길엔 몸통에 굵은 상처를 입은 낙락장송들을 만나게 되는데 일제가 마지막 발악으로 송진까지 찬탈해간 이 소나무들을 마주하면 나라를 잃고 민족까지 사라지게 한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과 직면하게 된다.

 

 

<화산당 수옥화상(華山堂 守玉和尙) 부도비와 부도탑>

 

 

 

이곳을 지나자마자 화산당 수옥화상(華山堂 守玉和尙) 부도비와 부도탑을 만나게 되며 얼마지 않아 내원사 경내로 들어가는 모든 것이 당신의 뜻한 생각 그대로 되라는 여의교(如意橋)를 지나게 된다. 


 

 

 

내원사의 큰법당은 선나원(禪那院)으로 항마촉지인을 한 석가모니불을 모신 곳인데 대웅전이라 하지 않은 것은 내원사도 중심 사찰이 아니라 암자였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선나원의 기둥에는 14연의 주련이 있는데 그 주련의 뜻을 찾아보니 ‘雲波(wave88)의 블로그’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남산석호토한하(南山石虎吐寒霞)
북해니우용벽파(北海泥牛湧碧波)
최후별조수선응(最後別調誰善應)
설산심처와두타(雪山深處臥頭陀)


남산의 돌 호랑이는 찬 노을을 토하고
북해의 진흙 소는 푸른 물결을 내 뿜는데,
마지막 또 다른 곡조에는 누가 맞장구를 칠까?
설산 깊은 곳에 투타를 닦는 스님이 누워있네.
 

 

 

 

유사주선무사신(有事周旋無事伸)
고래상왈본래인(古來相曰本來人)
휴언랍후유한재(休言臘後猶寒在)
천도매변별시춘(天到梅邊別是春)


일 있으면 움직이고 일 없으면 기지개를 켜는데
예로부터 상을 일러 본래인이라고 하네.
섣달그믐 후에도 되레 추운 것은 말하지 않으련다.
때가 되면 매화꽃 주변을 따로 봄이라고 하지 않는가.

 


 

금강일갈추정급(金剛一喝抽釘急)
백일청천전영망(白日靑天電影忙)
무가전두관외로(無暇轉頭關外路)
안타추색과형양(雁拖秋色過衡陽)


금강의 일갈에 단박에 못을 뽑으니
해 밝은 푸른 하늘에 번갯불이 번쩍이네.
빗장 밖 길로 고개 돌릴 틈도 없는데,
가을 빛 재촉하는 기르기는 형양을 넘는구나.
(衡陽:중국 호남성 남동부의 지명으로 남악회양선사를 말한다.)

 

일엽정오추신조(一葉井梧秋信早)
남파유자초청청(南坡猶自草靑靑)


우물가 오동 한 잎은 벌써 가을을 알리는데
남쪽 둑의 풀빛은 오히려 더 푸르르네.

 

<내원사 금고와 가마솥>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58호로 지정된 내원사 금고(內院寺 金鼓)는 법고(法鼓), 범종(梵鐘), 운판(雲版), 목어(木魚) 등과 함께 소리를 내는 것으로 징 모양을 하고 있으며, 반자라고도 부르는 불구의 한 종류이다.
양쪽 모두를 사용할 수 있는 쇠북이라는 뜻에서 금고라 부르고, 한쪽 면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반자라 하였는데 후대에는 이를 구분하지 않고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내원사의 것은 한쪽만 두드려서 사용하는 것으로 가운데 부분에 이중선을 돌려 안과 밖을 구분하였다. 바깥쪽 원 4곳에 구름과 꽃무늬를 옆면의 위쪽에는 동그란 구멍을 가진 돌출된 귀를 달았고, 아래에는 고려 선종 8년(1091년)에 금인사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알려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 금고는 만들어진 시기가 분명하고 상태도 양호한 편으로 고려 전기의 금속공예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지만 진품은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여기에 있는 것은 모사품이다.

 


내원사 금고(內院寺 金鼓) 아래에는 연대를 추정할 수 없는 가마솥이 놓여 있는데 이곳 에는 ‘동국제일선원이라는 명칭에 걸 맞는 눈 푸른 납자(衲子)들이 수도정진(修道精進)하였음을 알려주는 솥’이라 적어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