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미리 다녀온 ‘경남의 길’ 산청 유평계곡

천부인권 2011. 7. 31. 13:45

 

 

<부부 금실도 좋아진다는 신령한 회화나무와 흙돌담 길>

 

경상남도가 소개하는 ‘경남의 길’을 따라 걸어보고 그 감상에 대해 소셜 미디어를 활용하여, 페이스북, 트위터, 블로그 등에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경남정보사회연구소가 운영하고 있다. 1~2회는 ‘김천령의 바람흔적’을 운영하는 분이 안내를 맡았고, 3회 때는 ‘양산 내원사와 홍룡사 길’을 4회 차인 이번 8월에는 지리산 대원사를 지나는 ‘유평계곡 길’이 잡혀져 있어 걷는 시간을 알기 위해 따라가지 않으려는 아들을 억지로 끌고 유평계곡을 향했다.

 

단성IC를 나와 우측으로  500m가면 삼우당 문익점선생(三憂堂 文益漸先生)이 목화를 가져와 시배를 했다는 사적 제108호로 지정된 ‘목면시배유지(木棉始培遺址)’가 있으며 문익점선생과 목면을 소개하는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자동차로 10여분을 더 가면 흙돌담길이 아름다워 등록문화재 제281호로 지정이 된 남사마을 예담촌이 나온다. 이 마을 전체가 문화재요, 보이는 나무들도 오랜 역사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어 보물 같은 마을이다. 두 그루의 나무가 X자로 마주하여 ‘이곳을 지나는 부부는 금실이 좋고 백년해로 한다’고 적어둔 회화나무도 유명하다.

 

 


<흥선대원군의 호가 석파노인이다.>

 

이곳에는 산청삼매의 시조격인 원정(元正) 하즙(河楫1303~1380)선생이 심었다는 ‘원정매(元正梅)’가 있고, 문정공 하연(河演1376~1453)이 7살 때 심어 2010년에는 627년이나 되는 감나무도 있다. 이 ‘원정매’가 있는 고택에는 범상치 않는 현판이 있는데 “원정구려(元正旧盧)”라는 붉은 글로 적고 석파노인(石坡老人)이라 쓴 후 낙관을 찍었는데 알고 보니 흥선대원군의 친필현판이다. 이는 ‘원정(元正)의 오랜 집’이라는 뜻으로 생각 했다.

 

<남명매와 산천재>

 

산 고개를 넘어 시천면으로 달리다 보면 덕천강변과 잘 어울리는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년 6월 26일 ~ 1572년)선생이 61세 이후 이곳 지리산 자락인 시천면 사리(絲里)에 와서 신선이 되고자 하였던 ‘산천재(山天齋)’와 그 뒤편 산 위에는 선생이 살아생전 자신의 묘소로 잡아두었다는 남명선생의 묘가 보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산천재에 잠시 들러 산청삼매중 하나인 남명매(南冥梅)와 산천재의 모습을 담아 보았다. 남명매 앞에는 예전에 없던 싯구가 있어 옮겨본다.

 

우금(偶吟)                          우연히 읊다
주점소매하(朱點小梅下)       작은 매화 아래서 책에 붉은 점찍다가
고성독제요(高聲讀帝堯)       큰 소리로 요전을 읽는다.
창명성두근(窓明星斗近)       북두성이 낮아지니 창이 밝고
강활수운요(江闊水雲遙)       강물 넓은데 아련히 구름 떠 있네.


 

 

 

그리고 산천재(山天齋) 기둥에는 다음과 같은 주련이 걸려 있어 가난하지만 비굴하지 않는 남명선생의 사상을 느낄 수 있다.

 

춘산저처무방초 (春山底處無芳草)  봄산 어느 곳엔들 향기로운 풀 없으리오.
지애천왕근제거 (只愛天王近帝居)  천왕봉이 옥황상제와 가까이 있는 것을 사랑해서라네.
백수귀래하물식 (白手歸來何物食)  빈손으로 돌아와 무얼 먹을 건가
은하십리끽유여 (銀河十里喫有餘)  은하수 같은 맑은 물 십리에 흐르니 먹고도 남겠네.


또한 산천재 입구에는 이런 싯구가 적혀 있어 남명선생이 벼슬길에 나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알게 한다.

 

청간천석종(請看千石鐘)   청컨데, 천석들이 종을 보시게
비대구무성(非大㧄無聲)   북채 크지 않으면 쳐도 소리 없다네
쟁사두류산(爭似頭流山)   어찌하면 저 두류산처럼 될까
천명유불명(天鳴猶不鳴)   하늘이 울어도 오히려 울지 않는다.

 

 

 

<대원사 계곡에서 평촌삼거리 방향의 모습>

 

20번 국도를 따라 계속 삼장면을 향해 가다보면 우측으로 나가는 길을 만나 덕산고교 방향으로 가면 59번 국도를 만나 덕천강을 따라 올라가게 된다. 얼마지 않아 나오는 평촌삼거리에서 좌측으로 길을 잡고 끝까지 가면 대원사를 지나 유평계곡 길을 가게 된다. 평촌삼거리에서 대원사 방향으로 들어서니 길 양쪽에 ‘부용꽃’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사람들을 맞이한다.

 

 

 


아욱과의 낙엽관목인 부용[芙蓉, Hibiscus mutabilis]은 무궁화와 흡사 하지만 꽃의 크기가 훨씬 커 한눈에 구별이 된다. 높이 1~3m, 꽃말은 ‘섬세한 미모’이고 7~10월에 꽃이 핀다. 부용꽃 길이 끝나는 지점좌측에서 덕천강이 흐르고 계곡이 시작된다.

 

 

 

 

8월에는 버스를 타고가기에 대원사 주차장에서부터 걷게 되겠지만 이번에는 대원사 일주문 앞에 차를 세워 두고 경상남도 기념물 제114호인 유평계곡을 걸었다. 일주문에는 “방장산대원사(方丈山大源寺)”라 적어 두어 지리산(智異山)의 다른 이름이 방장산(方丈山)임을 알게 하고, 남명 조식선생이 오언절구(五言絶句)로 남긴 시를 보면 두류산(頭流山)이라 적어 지리산의 또 다른 이름임을 알게 한다.


불교에서 방장이라함은 “사방으로 1장(丈:약 3m)이 되는 넓이, 또는 그 넓이의 방으로 선종의 선원에서 주지의 방을 뜻하나 지금은 스승의 존칭으로 사용되는 용어로 법력(法力) 또는 도력(道力)이 특출한 스님을 의미하기도 한다. 현재 한국에는 해인사의 해인총림(海印叢林), 송광사의 조계총림(曹溪叢林), 통도사의 영취총림(靈鷲叢林), 수덕사의 덕숭총림(德崇叢林)에만 방장이 있다.” 따라서 방장산은 모든 산의 스승이 되는 산이요 특출한 도력을 갖춘 산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울창한 송림을 스치는 바람소리와 산새들의 재잘거림, 그리고 짝을 찾아 목청 높여 소리치는 매미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유평계곡의 옥류가 우르렁우르렁 소리를 내며 대자연의 무한한 능력을 깨우쳐 주려는 듯 합창을 한다.
이러한 자연을 한없이 느낄 때마다 좁은 도로를 홀로 독점하려는 듯 내 곁을 지나는 자동차의 경적과 매연이 상념을 깨어버린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었으면 좋으련만 산에도 물에도 인간의 욕망이 악귀처럼 달라붙어 인간만이 유일한 존재인냥 개발이란 이름으로 온갖 해작질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의 모습이고 대한민국 MB정권이 가장 잘하는 일이다.

 

 

<봉상루와 흙돌담 모습>

 

해인사의 말사인 대원사의 옛 이름은 평원사(平原寺)로 신라 진흥왕(548년) 때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하였다 전하나 확실한 것은 아니고 1890년(고종 27년)에 구봉 혜흔선사(九峰 慧昕禪師)가 지금의 대원사(大源寺)라 개칭했다. 대원사는 여러 번의 화재로 소실과 재건을 거쳐 6.25전쟁으로 완전 소실된 것을 1959년 김법일(金法一)스님이 재건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어느 듯 당도한 비구니 스님의 참선도량인 대원사는 ‘봉상루(鳳翔樓)’와 양쪽으로 연결된 흙돌담이 경내를 보이지 않토록 완전히 분리를 한 모습이다. 경내를 들어가려면 봉상루 아래를 지나면서 서서히 드러나는 대웅전을 우러러 보도록 설계된 듯하다.

 

 

 

 

이곳 대웅전은 1962년 법일스님이 재건한 것으로 석가모니 부처를 중심으로 좌.우 협시보살인 문수.보현보살이 모셔져 있으며, 금박으로 새겨진 네 개의 주련에는 이렇게 적었다.

 

마하대법왕(摩訶大法王)   거룩하고 위대하신 왕이시어
무단역무장(無短亦無長)   짧은 것도 긴 것도 아니고
본래비조백(本來非皁白)   본래 검거나 희지도 않으며
수처현청황(隨處現靑黃)   인연에 따라 청황으로 나타나시네.

 

 

 

<대웅전으로부터 일렬로 세워진 전각들>

 

 

원통보전(圓通寶殿)은 대웅전 오른쪽 옆에 붙은 건물로 앞면 3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 형태이다. 1967년 법일 스님에 의해 중건된 아름다운 전각 정면 기둥의 주련에는 이런 글귀가 걸려있다.


일엽홍련재해동(一葉紅蓮在海東)  한 떨기 붉은 연꽃 동해에 솟으니      
벽파심처현신통(碧波深處現神通)  푸른 물결 깊은 곳에 신통력을 나타내시네.      
작야보타관자재(昨夜寶陀觀自在)  어제는 보타산에 계시던 관음보살님이        
금일강부도량중(今日降赴道場中)  오늘은 이 도량 안에 임하시었네.


 

 

 

탑이 있는 곳은 비구니스님들이 참선을 하는 공간이라 외부인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는 있지만 사진을 하는 사람인지라 그 기회가 올 것으로 믿으면 산다. 2010년 8월에 방문했을 때는 탑으로 가는 문이 잠겨있어 접근을 할 수 없었다. 이번에도 기회가 없으면 어떻게 할까하고 고민을 하면서 종무소에서 만난 스님에게 허락을 구하니 잠시 촬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곳 대원사엔 지리산 삼대탑 중 동탑에 해당하는 보물 제1112호인 ‘대원사 다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중탑인 법계사 탑과 서탑인 화엄사 삼층석탑과 함께 3탑이 1년에 두 번씩 서광을 뿜어 지리산 영공에 오색찬란한 영험한 빛을 만들고 있다는 신비한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나라에 경사가 생기면 탑에서 서광을 비추며 향기가 경내에 가득하고, 근처 연못에 비취는 탑 그림자에서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다층석탑 속의 진신사리가 보인다는 전설도 전해지고 있어 탑을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경건하게 한다.


 

 

646년 자장율사(慈裝律師)가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높이 6.6m의 붉은 돌로 조성한 석탑은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신비로운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석탑으로는 보기 드물게 기단의 네 모서리에 우주를 대신한 문관 모습의 기둥을 첨가한 것은 조선시대에 다시 탑을 세우면서 끼워 넣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탑 앞 배례석(拜禮石)에는 정조8년(1784)에 다시 세웠다는 '석가불사리탑건륭갑진중건(釋迦佛舍利塔乾隆甲辰重建)'이 적혀 있으며, 1989년 해체 복원 때 사리를 담은 장엄구편과 58과의 부처님 사리가 나왔다.


 


 

대원사 경내를 나와 유평마을을 향해 걸으면 우측은 계곡이고, 좌측은 지리산의 온갖 식물들을 볼 수 있는 숲속길이다. 조금 더 올라가면 용이 100년간 살았다는 용소(龍沼)가 나온다. 바위가 물결에 뚫려서 굴처럼 된 곳으로 깊이는 5m 정도이며, 항아리모양의 절경은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용소가 보이는 곳에서 사진 찍기를 싫어하는 아들이 한눈파는 사이 한 컷을 남겨본다. 세월이 흐른 후 이런 자신의 모습이 추억이 되고 부모와 함께한 기억으로 남아 있기를 바라는 아비의 마음을 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마는 세상사 내 마음과는 달리 감을 어찌하겠는가!

 

 

<아름다운 자연의 유평계곡>

 

 

유평계곡의 아름다움을 즐기면서 걷다보니 이마에 땀이 흘러 잠시 계곡에 얼굴도 씻고 발을 담가 쉬어도 본다.

 

 

 

 

삼거리마을을 지나다 보니 점심때도 지나고 시간도 흘러 되돌아오니 유평마을 입구에 제비나비가 떼를 지어 물을 먹는 귀한 모습도 보았다.

 

 


 

유평마을 음식점에서 지리산 흑돼지 고기를 특산품으로 판다하여 늦은 점심에 입맛도 없다고 앙앙거리는 아들과 1인분에 11.000원하는 고기를 3인분 먹으니 아들이 “첫 고기를 먹고는 입맛이 돌아왔다”며 맛있게 먹는다. ‘자식 입에 음식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흐뭇하지 않는 부모 없다’고 하는데 내가 꼭 그 짝이다.


 


대원사 입구에 도착하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여 아들은 뛰어서 차 있는 곳으로 가라하고 빠른 걸음으로 걷는데 일주문에 도착하니 굵은 소나기 되어 떨어진다. 지나는 등산객들도 재빨리 빗물에 대비를 한다. 차에 타니 제법 축축하여 수건으로 한참 몸을 닦고 출발을 하였다.
8월의 대원사계곡 길은 오늘 느낀 이런 이야기를 함께 걷는 사람들과 공유할 것이라 생각하니 그날이 빨리 왔으면 하고 기다려진다.


 대원사(大源寺)가는 길(유평계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