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충무공의 바다에서 남해척화비와 충렬사를 만났다.

천부인권 2011. 11. 18. 19:33

 

 

 

<남해대교>

 

19번 국도는 남해 미조에서 원주까지 가는 도로이다. 남해대교도 19번 국도에 포함된 곳으로 삼천포 창선대교가 생기기 전까지는 육지와 연결 된 유일한 길이기도 했다. 한때는 한려 수도를 가로지르는 우리나라 최초의 현수교로 길이 660m, 폭 9.5m, 높이 52m의 규모로 1973년 6월에 개통된 남해대교는 학생들에게는 수학여행지로 일반인들에게는 해치를 가는 장소로 유명했던 곳이다.


 

 

 

 <노량리 풍경>

 

19번 국도를 따라 남해군에 들어가면 첫 번째 만나는 역사적 유적지가 설천면 노량리에 있는 이순신 장군을 모신 충렬사이다. 충렬사 앞 바다에 떠있는 거북선은 완벽한 복원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관광지로서의 볼꺼리와 체험꺼리를 제공하고 있다. 

 

 

 

 

<자암선생과 이태상 기념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가묘가 있는 충렬사를 향해 올라가면 입구에 ‘자암김선생적려유허추모비(自菴金先生謫廬遺墟追慕碑)’라 적은 비석과 가선대부삼군통제사이공태상지비(嘉善大夫三軍統制使李公泰祥之碑)라 적은 충무공 이순신장군 5대손 제121대 삼군통제사 이태상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남해척화비>

 

그 우측 미륵암 아래에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66호인 남해척화비(南海斥和裨)가 세워져있어 당시 세계의 열강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조선의 몸부림을 느낄 수 있다.
병인양요(丙寅洋擾:1866)와 신미양요(辛未洋擾:1871)를 승리로 이끈 대원군이 서양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백성에게 경고하기 위해 한양 및 전국 각지에 세우자 이 지역의 관청에서도 척화비를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지붕돌을 올려놓은 것은 다른 척화비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모습이다. 대원군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납치된 후 열강들과의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대부분의 비가 철거되었지만 이 비처럼 몇기가 남아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남해척화지 정면>

 

남해척화비(南海斥和裨)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66호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410

 

1866년[고종3] 일어난 병인양요(丙寅洋擾)에서 프랑스군을, 1871년[고종8] 신미양요(辛未洋擾)에서 미군을 물리친 정부가 외국과의 화친을 경고하기 위하여 1871년 4월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 중의 하나이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곧 화친하게 되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일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내용이 전면에 큰 글씨로 ”만년에 걸친 자손들에게 경계하노니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戒吾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라는 내용이 좌측에 작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높이 220cm, 폭 49cm, 두께 16cm이다. 노량 선착장에 처음 설치되었다가 일제강점기에 무관심 속에 묻혀 있었는데 설천중학교 입구로 옮겨 세웠다가 1998년 8월 5일 옛 자리인 현 위치에 다시 세웠다.

 

 

 

<남해충렬사 외삼문 모습>
 
남해 충렬사는 사적 제233호로 지정된 곳으로 외삼문입구 우측에는 일중 김충현이 “노량바다는 리충무공 전사하신 데라 여긔에 충렬사를 세우니라”고 한글로 쓴 중건비가 세워져 있다.


 

 

 

 <남해충렬사 내삼문 모습>

 

외삼문을 지나면 우측 높다란 계단 위에 문마다 태극마크가 그려진 내삼문이 자리하고 있다. 이 남해충렬사는 1632년에 이곳 선비들이 조그만 사당을 만든 것이 시초가 되었고, 1659년에 통제사 정익(鄭益)이 다시 지었고 1662년에 나라에서 충렬사(忠烈祠)란 이름을 내렸으며, 충렬사 옆에 마련된 호충암(護忠庵)에서 승장 1명과 승려 10명이 교대로 지키며 봄,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충무공 비와 보천욕일의 현판이 있는 비각>
 
내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통제사증시충무이공묘비(統制使贈諡忠武李公廟碑)’와 이를 보호하는 보천욕일(補天浴日)이라는 현판을 단 비각이 맞이한다. 이 비의 비문은 1660년 우암 송시열이 찬하고 동춘당 송준길이 글씨를 썼으며, 1663년 통제사 박경지가 세웠다고 전하며, 비문의 내용 중 일부는 “무술년(1598) 11월 19일에 공은 진린(陳璘)과 더불어 노량에서 왜적을 맞았다. 적을 모조리 꺾어 부셔놓고 공은 뜻하지 않게 적탄(敵彈)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한편 진린이 적에게 포위(包圍)되어 위태로웠는데 공의 조카 완(莞)은 본래 담력이 있는지라 곡성(哭聲)을 내지 않고 공처럼 독전(督戰)하여 간신히 진린을 적의 포위에서 구해냈다. 이러는 사이에 행장(行長)은 간신히 도망쳤다. 공의 죽음이 알려지자 우리나라는 물론 명나라의 두 진영(陣營)에서 터져 나오는 곡성이 우레 소리처럼 바다를 뒤덮었고, 이 곡성은 남해에서 아산(牙山)에 이르는 천리운구(千里運柩) 길에도 끊일 줄 몰랐다.”는 내용이라고 한다. 보천욕일의 의미는 “남해 충렬사에 적힌 ‘보천욕일' ”를 참고하면 된다.

 

統制使贈諡忠武李公廟碑

有明朝鮮國 三道水軍統制使 贈諡 忠武李公 廟碑
崇祿大夫議政府右贊成兼成均館祭酒 宋時烈 撰
正憲大夫議政府左參贊兼成均館 祭酒 宋浚吉 書
南海之露梁 有廟三間中設位牌 以祀故忠武李公者也 神宗皇帝萬曆紀元 倭酋秀吉弑 其君擧國來寇 公先在北邊屢立寄功 而人不甚知辛卯二月 擢授全羅左水使公至 則日修戰具撫循士卒遂與賊戰敗之於玉浦敗之於露梁及唐浦敗之於蛇梁斬其貴將又敗之於唐項浦撞破其四十餘船皆以少擊衆上下書褒之陞其資級至永登浦敗之至見乃梁誘賊敗之腥血漲海又戰於安骨浦燒其船四十餘遂進戰於釜山又破其船百餘艘遂置陣閑山島積粟整師以爲迎駕龍灣之計朝廷爲置三道統制使以處之賊畏甚行間以愚我諸將元均又嫉搆之朝廷兩信之公遂被追拷有大臣言上亦念公功只削職從軍以責效時母夫人卒公便道奔哭卽行曰吾一心忠孝到此俱喪矣軍民擁馬號泣遠近嗟惋元均代爲統制使爲賊所誘軍敗走死而閑山遂陷賊遂由西海進陷南原朝廷遂以公復爲統制公以十騎馳入順天府稍收亡卒遂戰於於蘭島碧波亭皆大破至捷至上欲陞公崇品有言公爵秩己高遂止賞將士天將揚公鎬亦送銀段以慰賞而奏聞天朝公之名遂得聞天下時公猶食素寢苫上特使諭旨且送草木之滋公涕泣勉從上念公舟師單弱欲令前却以觀勢公馳啓曰臣一去港則賊必登岸長驅矣時天將陣璘劉綎水陸來會公接應有方俱得歡心公進據古今島募民耕作以便公私南民繈屬歸之賊將行長函謀撤歸求道甚恭兩天將中其賄誘欲許之公諷刺甚至行長又遣使于公遺以銃劒公以讐賊不可通使嚴辭却之將士勇氣百倍行長計窮遂引泗川屯賊以自援一夕大星殞海中軍中畏之戊戌十一月十九日公與陣公迎戰于露梁賊大挫衄 公忽中丸而絶陣公被圍急公從子莞有膽略不發哭督戰自如遂解陣公圍而行長僅得遁去旣發喪我師與天將兩陣皆號哭聲殷海中自南海至牙山迎柩哭典千里不絶亦有喪之三年者僧徒處處設齋皆曰活我命復我讐者公也 公內有篤行貞介自守意有不可雖達官要人必據義媿屈之發謀制事擧無遺策奮勇決機前無堅敵軍政簡而有法不妄殺一人而三軍一志莫敢違令至其擧大義斥倭使使中賂者顔騂主和者顙泚則張忠獻岳武穆蔑以加矣以故當積衰諱兵之餘遇天下莫强之敵大小數十戰俱以全取勝蔽遮東南以基中興之衛烈至蒙皇上寵命錫以印符則一國之人雖家尸而戶侑不爲過矣況此露梁者旌纛之所臨喑噁之所被其精爽之可畏者固將億萬年不泯蹴山噴海風怒雲屯常有跳馬島擣江戶之氣則嚴奉之擧尤在所先也 舊有廟觕隘下不足以妥公之靈故統制使鄭榏圃隱先生之耳孫感公忠義卽改而新之又伐大石以爲牲擊而因閔學士鼎重俾余書其事文旣粗成判書洪公命夏以事聞孝宗大王亟微草木特賜乙覽亦豈拊髀頗牧之意歟只今仙馭上賓陵栢森公之毅魄重亦飮泣於九原矣因幷記此以備始末府仰疇昔爲之抆血也公諱舜臣字汝諧德水人時崇楨辛丑十一月日也今上癸卯賜祠額曰忠烈至是而崇報無憾矣碑役前後相之者統制使朴公敬祉金公是聲也是年七月日追刻


통제사증시충무이공묘비

유명조선국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증시贈諡 충무忠武 이공李公 묘비廟碑
숭록대부의정부우찬성겸성균관 제주祭酒 송시렬宋時烈 찬하고
정헌대부의정부좌참찬겸성균관 제주祭酒 송준길宋浚吉 쓰다.

남해(南海)의 노량(露梁)에 세 칸 남짓한 사당(祠堂)이 있는데, 이 충무공(李忠武公)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봄과 가을로 제향(祭香)을 올리고 있다. 선종 황제(神宗皇帝) 만력(萬曆) 기원년(紀元年)에 왜국(倭國)의 괴수(魁首) 풍신수길(豐臣秀吉)이 그 주인인 관백(關白)을 죽이고 나서 거국적(擧國的)으로 우리나라를 침공해 왔다. 공은 그 이전에 북쪽 변경에서 여러 차례 큰 전공(戰功)을 세웠으나 세상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신묘년 2월에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로 발탁되자 공은 즉시 무기를 손질시키는 한편 군졸들을 재정비하였다. 이윽고 왜적(倭賊)과의 싸움이 벌어지자 공은 옥포(玉浦), 노량(露梁), 당포(唐浦), 사량(蛇梁) 등지에서 왜적을 대파하고 적장을 목 베었다. 또 당항포(唐項浦)에서도 적선(賊船) 40여 척을 격파하였는데 이는 모두 극소수의 수군(水軍)으로 대적을 분쇄한 것이었다. 그래서 임금께서는 그 공훈(功勳)을 높이 치하(致賀)하는 조서(詔書)를 내리고 동시에 그의 자급(資級)도 올려 주었다. 영등포(永登浦)에서 이르러 왜적을 대파하였고, 또 견내량(見乃梁)에 이르러서는 적을 유인하여 격파하니, 바다가 적의 피로 물들었다. 이어 안골포(安骨浦)에서도 왜선 40여 척을 불살랐으며, 다시 부산(釜山)으로 나아가 적선 1백여 척을 격파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좌수영(左水營)의 본영(本營)을 한산도(閑山島)로 옮기고 군량(軍糧)을 비축해가면서 군사들을 재편성하여 다음의 웅장한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조정으로부터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제수받기에 이르자 적은 더욱 전전긍긍하였다. 그런데 이 일을 질시(嫉視)하여 충무공과 그 휘하(麾下)의 장병들이 어리석다고 들고 나선 원균(元均)의 집요하고 간사한 모함이 있었다. 조정의 공론(公論)이 처음에는 양분(兩分)되었다가 어이없게도 원균에게로 기울어져 공은 체포되어 고문(拷問)을 받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직언(直言)하는 대신(大臣)이 있고 또 임금께서도 그의 무공(武功)을 감안하여 그 책임을 물어 벼슬만 삭탈(削奪)하였다. 바로 그 즈음 모친이 별세하였다. 부고(訃告)를 받고 바삐 친가(親家)로 내려가면서 ‘내 오직 충(忠)과 효(孝)를 위하여 이 한 몸 바쳐 왔거늘 어찌하여 이토록 불효막심(不孝莫甚)하게 상(喪)을 당한단 말인가.’라 하며 통곡하니, 같이 가던 군민(君民)들은 말고삐를 붙잡고 울었고 원근(遠近)의 모든 사람들이 매우 한스럽게 생각하여 슬퍼하였다. 한편 통제사로 행세하던 원균이 적군의 계략에 걸려 군사를 전멸(全滅)시키고 자신도 비참하게 피살(被殺)되었다. 그래서 한산도는 적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었고, 적은 서해(西海)를 덮쳐 하루아침에 남원(南原)까지 진격(進擊)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공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를 제수하였는데, 공은 10여 명의 기병(騎兵)을 데리고 순천부(順天府)로 달려가서 흩어져 있던 군사들을 다시 모았다. 그래서 드디어 난도(蘭島) 벽화정(碧波亭) 싸움에서 대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하게 되었다. 임금께서는 제일 좋은 하사품(下賜品)을 내리고 동시에 공의 벼슬을 더 높여주려 하였다. 그러나 이미 높은 벼슬에 있었기 때문에 대신 휘하의 장병들에게 포상(?賞)하였다. 명나라 장수(將帥) 양공 호(楊鎬)는 은색 비단을 보내면서 공을 격찬하였다. 이렇게 하여 공의 공훈은 명나라 조정에까지 알려졌으며, 그 용맹은 천하에 떨쳐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즈음 공의 식사나 침소(寢所)는 너무나 간소하고 조촐하였다. 임금께서 특사(特使)를 시켜 보약(補藥)을 하사하시니, 공은 감읍(感泣)하여 눈물로 더욱 충성할 것을 다짐하였다. 임금께서는 공을 염려한 나머지 수군의 세력이 너무 약하므로 보강이 될 때까지 수군을 없애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였다. 그러자 공이 달려와 아뢰기를, “만약 신(臣)이 한번 바다를 떠나게 되면 왜적이 반드시 육지로 올라와 일시에 이 땅을 휩쓸 것입니다.”라고 하며 반대하였다. 이때에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과 유정(劉綎)이 바다와 육지로 와서 모였는데, 공은 기꺼이 그들을 응대하여 모두에게 환심(歡心)을 얻었다. 공은 통제사의 본영을 고금도(古今島)로 옮기고 백성들을 모아 농사를 짓게 하였는데, 공(公)과 사(私)를 공정하게 하였기 때문에 남쪽 백성들이 물밀 듯이 모여 들었다. 왜장(倭將) 행장(行長)은 빨리 탈출할 길을 열기 위하여 명나라 두 장수들에게 뇌물공세를 하였으니, 이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공은 엄격하고 담백하였다. 행장은 밀사(密使)를 시켜 총포나 칼을 뇌물로 진상(進上)해왔는데, 공은 두 번 다시 오지 못하도록 엄하게 꾸짖어 이를 물리쳤으므로 진중(陣中) 군병들은 더욱 용기백배(勇氣百倍)하였다. 행장은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사천(泗川)에 주둔해 있던 적들에게 자신을 구원하도록 하였다. 하루는 저녁에 큰 유성(流星)이 바다에 떨어졌는데, 군사들은 이를 몹시 두렵게 생각하였다. 무술년 11월 19일에 공은 진린과 더불어 노량에서 왜적을 맞았다. 적을 모조리 꺾어 부셔놓고 공은 뜻하지 않게 적탄(敵彈)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한편 진린이 적에게 포위(包圍)되어 위태로웠는데, 공의 조카 완(莞)은 본래 담력이 있는지라 곡성(哭聲)을 내지 않고 공처럼 독전(督戰)하여 간신히 진린을 적의 포위에서 구해냈다. 이러는 사이에 행장은 간신히 도망쳤다. 공의 죽음이 알려지자 우리나라는 물론 명나라의 두 진영(陣營)에서 터져 나오는 곡성이 우레 소리처럼 바다를 뒤덮었고, 이 곡성은 남해에서 아산(牙山)에 이르는 천리 운구(運柩) 길에도 끊일 줄 몰랐다. 또 스스로 삼년상(三年喪)을 모시는 사람도 많았고, 승도(僧徒)들은 곳곳에 제단(祭壇)을 모셔놓고 불공(佛供)을 드렸다. 백성들은 한결같이 “우리 목숨을 살려 주셨던 장군께서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셨단 말이요.”라 하며 울먹였다. 공은 그 품성이 돈독하고 스스로 정절을 지켰다. 뜻에 옳지 않은 바가 있으면 비록 높은 벼슬아치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의(義)를 들어서 그 사람을 부끄럽게 하여 굴복시켰다.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조금의 잘못이나 부끄러움이 없었다. 또 한 번 용단(勇斷)을 내리면 어떤 강한 적이라도 이내 순종하게 하였다. 군정(軍政)을 펼 때에는 지극히 간결하면서도 법도가 있어서 무고한 백성을 한 사람이라도 희생시키는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삼군(三軍)이 한마음 한 뜻이 되어 법을 위반하는 일이 없었다. 대의(大義)를 이루려는 이 마당에 왜적의 밀사를 가까이 하여 뇌물을 받은 자는 그 부끄러움을 알게 하였고, 왜군과 휴전(休戰), 화친(和親)을 주장하는 자들로 하여금 이마에 땀이 나게 하였다. 곧 공은 장충헌(張忠獻 장능), 악무목(岳武穆 악비)보다 월등하게 훌륭했으므로 허약한 군졸들을 통솔하여 천하에 제일 강하다는 적과 크고 작게 수십 번을 싸워 이겨낸 공이 있었던 것이다. 동남쪽을 굳게 막아 이 나라 중흥(中興)의 위업(偉業)을 성취하였으며, 거기에 임금의 총애까지 입고 인부(印符)까지 하사받았으니, 이 나라 백성으로서 가가호호(家家戶戶)에 신주(神主)처럼 모신다 한들 과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이 노량은 공의 대장군기(大將軍旗)가 휘날린 곳이며, 소리 높여 군졸을 지휘하던 곳이다. 비록 유명(幽明)을 달리하여 말은 없으나 공의 그 충성스러운 정혼(精魂)이 숨쉬고 있는 곳이다. 그 위대한 명성은 억만 년이 지난다하여도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산을 박차고 바닷물을 내뿜듯이 성난 바람이 구름을 휘몰아 항상 우리의 강호(江戶)를 노략하던 대마도(對馬島)의 왜적들을 짓밟은 패기에 넘치니, 바로 공의 넋을 엄숙하게 받들어 가장 먼저 모신 곳이 이 곳이다. 옛 사당은 너무나 좁고 낮아서 공의 영위(靈位)를 모시기에 부족하였다. 그러므로 포은 선생(圃隱先生)의 이손(耳孫)인 고(故) 통제사 정익(鄭?)이 공의 충의(忠義)를 선양(宣揚)하고자 사당을 새로 고치고 큰 돌을 다듬어서 비석을 세우기로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학사(學士) 민정중(閔鼎重)으로 하여금 나에게 부탁으로 공의 공적(功績)을 글로 짓게 하였다. 글의 초록(草綠)이 대충 이루어지자 판서 홍명하(洪命夏)에게 알려 효종 대왕(孝宗大王)께 아뢰었다. 드디어 대왕께서도 이 초본(草本)을 을람(乙覽)하시게 되었으니, 그 기쁨을 어디에 비기겠는가. 지금 천상(天上)에 계시며 능백(陵柏)처럼 푸르른 공의 영혼도 반드시 구원(九原)에서 감읍하고 있을 것이다. 여기에 전말(顚末)을 병기(幷記)해 두는 것은 오직 옛날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엎드려 우러러 보건대 우리를 편달(鞭撻)하고 매질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공의 휘(諱)는 순신(舜臣)이요, 자(字)는 여해(汝諧)이며, 본관(本貫)은 덕수(德水)이다. 숭정(崇禎) 신축년 10월에 금상(今上 순조) 계묘년에 사액(祠額)을 내리셨는데 충열(忠烈)이라는 어필(御筆)이었다. 광영(光榮)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또한 무슨 여한(餘恨)이 있겠는가. 입석(立石)을 전후(前後)로 도운 사람은 통제사 박경지(朴敬祉)와 김시성(金是聲)이다. 그해(현종 4, 1663년) 7월에 추각(追刻)하다.

 

 

 

 <남해 충렬사 전경>

 

그 뒤편에 충무공의 위패를 모신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을 한 충렬사가 자리하고 있다. 충렬사의 내부는 위패를 중심으로 위쪽은 관복을 입은 충무공을, 우측에는 갑옷을 입은 모습을, 좌측에는 거북선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남해충렬사 내부모습>

 

 

 

<이순신장군의 가묘와 다까끼마사오의 식수>
 
충렬사의 낮은 담장 뒤편에는 1598년 11월 19일 이락사가 있는 관음포 전투에서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적탄을 맞아 순국하자 관음포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가묘(假墓)로 안치했다가 고금도를 거쳐 아산 현충사로 운구하였다. 가묘(假墓) 옆에 우뚝 솟은 나무는 1965년 4월 12일에 민족의 역적 다까끼마사오가 주위 풍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히말라야시다(개잎갈나무 [Hymalaya cedar])를 심어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