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충무공이 순국한 관음포 이충무공전몰유허와 이락사

천부인권 2011. 11. 21. 18:58

이락사 안내소와 기념품 가게

 

 관음포 이충무공전몰유허지(觀音浦 李忠武公戰歿遺墟地)인 이락사(李落祠) 안내소는 19번 국도를 따라 남해대교에서 약 4km를 가다보면 길옆 우측에 ‘사적 제232호’로 지정되었으며 주소는 남해군 고현면 차면리 111번지이다.

 

 

임진왜란의 마지막 격전지이자 이순신(李舜臣:1545~1598) 장군이 54세의 일기로 왜적의 총탄을 맞고 장렬한 최후를 마치자 판옥선에서 처음 뭍으로 옮겨진 이곳에 234년이 지난 1832년(순조 32)에 이르러 이락사(李落祠)와 이충무공전몰유허비(李忠武公戰歿遺墟碑)가 세워졌다.

 

이락사 앞 광장에서 바라본 모습

이락사와 첨망대가 있는 곳으로 가는 첫 계단이 있는 곳 우측에는 1998년 12월 16일 충무공 순국 400주년을 맞아 해군참모총장 대장 유삼남이 쓴 “전쟁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전방급신물언아사(戰方急愼勿言我死)]”라는 비갈이 세워져 있다. 관음포 전투에서 적의 총탄을 맞고 죽기 전에 남긴 유언이라고 전하는 이글은 이순신 장군이 직접 말을 했는지, 아니면 이후 글을 옮기면서 이순신 장군을 영웅화하려는 의도로 이런 내용을 첨가했는지는 모르겠다.
 

이락사 입구의 풍경

 

이락사(李落祠)로 가는 계단을 오르면 우측에 리홍주가 짓고  이갑성이 한글로 쓴 “리충무공전적비”가 보이고, 1950년에 남해군민의 헌금으로 조성한 참배길 좌우에는 뿌리부분에서부터 여러 개로 갈라진 육송이 도열을 하고 있어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이락사 현판이 달린 출입문

 

이락사는 사당이 따로 있지 않지만 이충무공전몰유허비(李忠武公戰歿遺墟碑)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민족의 역적이면서 이순신 장군을 성웅으로까지 칭송한 다까끼마사오의 친필현판인 “李落祠”라는 글귀가 걸려있다.

 

대성운해가 적힌 비각

 

문을 통과하면 이충무공전몰유허비(李忠武公戰歿遺墟碑)를 보호하는 비각이 정면에 마주하는데 비각의 현판 역시 1965년에 이순신 장군과 자신을 동일시하려했던 것으로 생각되는 다까끼마사오가 쓴 것으로 “큰 별이 바다에 떨어지다.”라는 뜻을 담은 ‘대성운해(大星隕海)’라는 글귀가 걸려있다.


 

비의 정면에 쓰여진 비문

 

 비의 정면에는 ‘유명수군도독조선국삼도통제사 증(有明水軍都督朝鮮國三道統制使 贈), 의정부영의정시충무이공순신유허비(議政府領議政諡忠武李公純臣遺墟碑)’라 쓴 1832년 순조 임금의 지시로 만들어진 비석이 있다.
당시 이름난 사람들의 비에 새겨진 첫 글자를 보면 유명(有明)라는 글자가 있는데 이 글자는 “명나라에 속한”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생존을 위해 사용한 부끄러운 글이다. 아래에는 원문과 국역을 옮겨 둔다.

 

【原文】
有明水軍都督朝鮮國三道統制使 贈議政府領議政諡忠武李公舜臣遺墟碑 
直南海縣東二十里溟漲之所環蒙衝之所出入名其地曰觀音浦者故三道統制使贈議政府領議政忠武李公殉國之所也公以舟師大破倭寇於海中海上無倭警者今二百三十有餘季而公則爲飛丸所中以歿嗚呼壬辰之難我東之陽九也時則有忠藎勇知之士若而人左右我宣廟以克襄中興烈旣威銘彛鐘被竹素火卓乎其有燿矣至勳塞天地聲震華夷燀爀磊落軒宇宙而揭日星者薦紳婦孺不謀一辭以忠武公爲稱首蓋公以偏陬積弱之旅當百萬賈勇之敵蔽遮一方屹然爲于城如張睢陽橫波絶流出奇制勝使兇渠摧敗煨燼而無遺如周公瑾用少擊衆前無勍敵威聲所讋遠邇望風如岳武穆再造區宇斡危奠泰以一身以宗國輕重如敦汾陽李西平若其開誠布公鞠躬盡瘁德威交彰甿卒咸懷而卒之以志決身殲則惟諸葛忠武候是已武候之歿以疾病而公之歿也以戰然武候之歿漢室遂危公則雖歿矣而遺烈之所覃被式至今社稷是賴公於是亦可以無憾矣公之功之忠寵于綸言昭于琬琰紀在太常載在盟府煥燁乎學士大夫之歌誦敍述固無容復贅也惟公績寔多在海上其肇暢武功由湖南水閫則有左水營大捷碑式遏兇鋒永靖湖畿在碧波之戰則有嗚梁大捷碑樹牙建閫坐收淸晏在三道統制營則有固城忠烈祠碑至順天之忠愍祠南海之忠烈祠古令島之誕報廟咸有顯刻以詔無極獨玆爲立慬成仁之所而顧無文以徵其實我聖上三十二年壬辰宣廟圖恢之四周甲也惟聖上撫歲興懷咸秩忠勞功宗之祀首及于公于時公之八世孫恒權實踐公舊治統制三道水軍承王命侑公于是地設壇以降靈退諏于衆伐大石以表其地而章之以銘辭人於是謂統制克世矣其銘日維南戴日巨渤茫洋恬風無浪蛟鰐深藏閭井如櫛婦子熙熙犁牛箔蠶不識鼓旗亡誰之賜懷我忠武桓桓忠武實奠東土穹龜健鶻大奮厥庸嗚梁洗甲玉浦休鋒盈盈萬艘彼嗚渚鑾輿徐返鐘石在虡公勳萬世公則先逝洪波渺瀰萬眥同涕公靈不味上有星斗驅祲産祉永綏黎首截被海浦公仁攸成維烈載永維石之貞 
資憲大夫禮曺判書兼知經筵事弘文舘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舘事奎章閣提學洪奭周撰 資憲大夫刑曺判書兼知經筵春秋館事藝文舘提學李翊會書 
崇禎紀元後四壬辰 月 日立 

【국역】
유명수군도독조선국삼도통제사 증의정부영의정시충무이공순신유허비 
바로 남해현 동쪽(북쪽의 오기인 듯) 20리쯤에 바다 물결이 넘실거리는 군용선이 드나드는바 그곳을 일컬어 관음포라 하니 옛 삼도통제사 증 의정부 영의정 충무 이공이 순국하신 곳이다. 
공이 수군을 지휘하여 바다에서 왜구를 대파함으로써 해상에서는 왜구를 경계할 필요가 없어졌다. 지금으로부터 230 여 년 전 공은 적의 비환(飛丸)에 맞아 순국했던 것이다. 아! 슬프다. 임진란은 실로 우리 동국의 양구(陽九. 재앙)라 말할 정도로 큰 재액이었다. 그러나 이때에 충성스럽고 용기 있는 공과 같은 이가 좌우에 있어 선조 임금님을 도와 사직(社稷)을 지키고 국가의 중흥을 이루었다. 
그때 이미 이종(彝鍾. 옛날 공신의 이름을 새겨 보관하여 오래 전한 일종의 제기)에도 새겨지고 사록(史錄)에도 등재되어 환하게 빛나도다. 그 빛이 있음이여! 지대한 공훈은 천지가 넓다한들 어찌 이를 모두 채우겠는가? 그 충성스런 명성은 명나라 이웃 오랑캐나라에 까지 떨쳐 마치 우주를 비치는 일월성진(日月星辰)처럼 적적하였다. 이와 같이 신사(紳士) 및 부녀자 심지어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서로 한 번도 의논하지 않고 충무공을 으뜸으로 숭앙하는 것은 대개 공이 노약하고 쓸모없는 군사로 백만의 용기 있는 적군을 격퇴하고 일방(바다)을 막아서 홀연히 국가의 간성(干城)이 됨은 장수양(張睢陽 : 장순의 별칭. 당나라 사람. 수양성에서 안록산을 막음)과 같고 거센 물결을 막고 종횡무진 신출귀몰(神出鬼沒)한 전술을 써서 적을 섬멸하여 후환을 남기지 않는 것은 주공 근(瑾 : 삼국시대 오나라 명장)과 같고 소수의 군사로써 중적(衆敵)을 상대하여 승리를 거둠에 앞에는 강한 적군이 없고 위엄 있는 명성은 원근에서 추모하였으니 악무목(岳武穆 : 남송의 충신. 호, 忠武)과 같고 천하를 재조 위태(危殆)한 것을 돌려 태연하게 하고 한 몸으로써 종국의 경중을 책임짐은 곽분양(郭汾陽 : 당의 명장), 이서평(李西平 : 당의 명장)과 같고 정성을 다하고 공정을 앞세워 마음과 힘을 바쳐 나라에 헌신하니 덕과 위엄이 같이 나타나 어리석은 백성들 까지도 뜻을 결단하고 생사를 겁내지 않음은 오직 제갈무후(諸葛無侯 : 호, 孔明)가 이러함과 같다. 그러나 제갈무후가 죽음은 병사(病死)한데 반하여 공은 적과 싸우다가 순국하셨다. 공명이 죽은 후 얼마 안가서 한나라가 위태로워 졌거니와 공은 비록 죽었어도 지우금일(至于今日)에 사목(社穆)을 봉안케 하였다. 이에 공은 무슨 유한이 있겠는가? 공의 공적과 충성은 위로는 주상께서 포상하시고 백성들로부터도 추앙을 받아 아름다운 비취(翡翠)보다 빛났으며 태상(太常 : 奉尙寺의 별칭. 시호를 맡아보던 관청)에 기록되어 있고 맹부(盟府 : 誓約의 소류를 넣어두는 창고)에 등재되어 있으며 그 충절과 공열은 학사 대부들에 의해서 시가(詩歌)로 혹은 문장으로 찬양되어 더욱 길이 빛났다. 
이는 진실로 췌언(贅言)이 불요(不要)하는 것이다. 오직 공은 해상에서 이룩한 공이 크고 많아 그 처음 무공을 펼침은 호남수역(湖南水域)에서 녹유(綠由)함인즉 좌수영에 대첩비가 있고 흉측한 왜군의 전열을 막아 호기지방(湖畿地方)을 안정시킴은 벽파해전에 있음인즉 여기에는 명량대첩비(鳴梁大捷碑)가 있고 수아건곤(樹牙建閫)하여 앉아서 청안(淸晏)함을 얻었음은 삼도통제영에 있음인 즉 고성에는 충렬사비가 있고 순천의 충렬사와 남해의 충렬사와 고금도의 탄보묘(誕報廟)에 모두 현액이 있어서 무궁토록 전하거늘 홀로 이 땅은 정성스런 인(仁)을 이루는 성역이라 하겠다. 돌이켜 보건대 아직 이 공훈이 기록된 문서가 없더니 우리 성상(聖上 : 순조) 32년 임진년에 선조임금께서 도회(圖恢)하신 네 번째 환력(還曆)을 맞는 때라 주상께서 임란 당시의 그 해를 회상하시고 함께 충신들의 공훈의 크고 작음의 차이에 따라 신위를 모시는 자리에서 공의 영위(靈位)를 수위(首位)로 모신 바 있다. 
이즈음 공의 팔세손 항권(恒權)이 마침 공이 옛날 통제하던 삼도수군통제사로 있던지라 왕명을 받들어 공이 순국한 이 자리에 사당을 지어 영(靈)을 모시고 여러 지방 인사와 의논하니 많은 인근 사람들이 모여들어 나무를 치고 돌을 깎아 그 터를 표하고 글을 새기니 이때 사람들은 항권 통제사가 능히 그 세대를 이었다 하더라. 그 명(銘)에 이르기를 오직 남해에 태양을 이고 있으니 큰 물결이 망양(茫洋)하도다. 바람이 자고 파도가 없으니 이무기와 악어가 깊이 그 몸을 감추었도다. 세상이 평화로우니 아녀자들의 얼굴도 화락(和樂)하고 황소도 부지런히 밭을 갈며 양잠(養蠶)하고 길삼하니 이제 전쟁은 끝이 나고 평안하도다. 
누구의 주심인가. 공의 충성을 생각하도다. 무용이 뛰어나신 공이시어 실로 동사(東士)를 안정시켰도다. 큰 거북과 건장한 매도 크고 분발하여 기상을 펴도다. 명량에서 갑옷 씻고 옥포에서 싸움을 끝내었다. 많은 고기잡이배가 만선으로 돌아오매 오리 떼는 물가에서 노는구나. 난여(鸞輿 : 임금이 타는 수레)가 서서히 돌아오다 악기를 제 틀에 걸었으니 사방이 고요하도다. 공이 남긴 공훈은 만세에 빛날 것이나 공은 먼저 떠났도다. 아득한 바다 물결처럼 많은 사람들 눈시울에는 슬픔이 가득하니 공의 영령은 길이 살아남으리라. 
하늘에 북두칠성이 있어 재앙을 물리치며 복을 낳으시고 적은 두 번 다시 바다를 침범할 수 없음이 확연하니 백성들은 영원히 평안하리라. 공의 높고 어진 공열은 영구히 이어져 오직 돌처럼 굳은 절개일지어라. 
자헌대부예조판서겸지경연사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재학지성균관사규장각제학 홍석주(洪奭周) 짓고 
자헌대부형조판서겸지경연춘추관사예문관제학 이익회(李翊會) 쓰다. 
숭정기원후사년임진(崇禎紀元後四壬辰. 1832년) 월 일 세우다 
[출처 : 설천면지-설천면지편찬위원회/디자인 세상(2017.4.20.)

 

이락산의 첨망대

 

 비각에서 500m 떨어진 이락산(李落山) 높은 곳에 세운 첨망대(瞻望臺)는 2층 팔작지붕으로 1991년 2월 16일에 건평 55.8m²으로 건립한 전각이다. 이곳은 이순신 장군이 순국하신 관음포를 굽어보고, 노량해협과 광양제철소, 하동군을 한 눈에 살필 수 있는 곳이다.

 

 

첨망대 안에는 뭇 객들의 한시(漢詩)가 걸려 있으며, 첨망대기(瞻望臺記) 현판이 걸려 있어 첨망대를 건립하기까지의 상황을 알 수 있다.
 

첨망대에서 바라본 관음포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의 필승을 위해 이곳 관음포를 격전지로 선택하고 왜적(倭賊)을 관음포 안쪽으로 몰아넣어 조명연합함대 150척으로 500여척의 왜선 중 200여척을 파괴하여 패잔병은 선소리 왜성까지 육지로 도망을 가게 하였다. 선소리 왜성 바닷가에는 명나라가 조선을 구한 것처럼 찬양하는 마애비가 있으니 [조선의 치욕을 노래하는 ‘장량상 동정 마애비']를 참고하면 된다.

 

관 음포 입구와 남해바다

 

광양제철소와 아름다운 남해바다의 풍경

 

하동 화력발전소와 하동군으로 가는 노량해협의 풍경

 

장군은 어떻게 관음포를 필승의 장소로 정했을까? 과연 독창적 생각으로 관음포를 전투지로 선택했을까? 이런 의문에 해답을 주는 “남해 정지석탑(南海 鄭地石塔)”을 찾아서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