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석탑의 모습>
이락사를 출발하여 19번 국도를 따라 약 3km를 가면 탑동으로 불리는 고현면 대사리가 나온다. 이 마을 중앙시장 입구에는 커다란 자연암괴 위에 소박하고 엉성한 듯이 보이는 ‘정지석탑(鄭地石塔)’이라 불리는 탑이 세워져 있다.
고려 우왕 9년(1383) 정지 장군이 남해 관음포에서 왜구를 격파하여 전쟁에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탑이라고 안내판은 소개하고 있다. 안내판에 소개한 정지장군의 이름을 한자로 鄭池라고 표기하고 있으나 광주시 북구 망월동. 광주기념물 제2호로 지정된 고려 말기의 명장 정지장군예장석묘(鄭地將軍禮葬石墓)에 세워진 비석에는 鄭地라 쓰여 있어 鄭地가 바른 이름일 것으로 생각한다.
<정지석탑의 측면모습>
마을 사람들이 쓴 정지석탑의 유래를 보면 뒷산 종지등에 종각이 있었고 망덕사(望德寺)라는 절이 있었다는 점과 이곳 지명이 대사리인 것을 감안해 보면 망덕사 입구에 세워진 탑 중 하나가 아닐까하고 생각해 본다. 그리고 대사리에서 남.북치리 마을로 가는 길에는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제작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팔만대장경 제작소 흔적이 있다.
<이락사가 보이는 관음포구 전경>
고려 중기부터 우리나라의 해안에서 약탈을 일삼던 왜구는 여·원연합군의 두 차례에 걸친 왜구토벌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후 더욱 약탈이 심해졌다. 공민왕 때에 이르러서는 반도의 모든 연안뿐만이 아니라 강화도와 예성강 입구에까지 왜구가 출몰하는 등 개성까지도 위험에 처했다.
왜구는 연안지역의 약탈뿐만이 아니라 조세운반선을 약탈하는 지경에 이르자 최영을 비롯하여 이성계·최무선·정지·박위 등이 왜구토벌에 나섰다. 이시기에 최무선의 건의로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화포를 개발하였는데 화포를 이용하여 왜구와 진포(군산)싸움에서 크게 이겼다.
특히 정지 장군은 바다로 침입하는 왜구가 육지에 상륙하기 전에 격파해야 백성들이 피해를 입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해전에 능한 군대를 편성하기 위해서는 바다를 모르는 사람들을 뽑는 것이 아니라 바다를 잘 아는 섬사람들 중에 선별하여 싸우면 이길 수 있다며 수군의 창설을 이끌어낸 공로자이다.
1383년에는 왜선 120여척이 경상도 연해로 침입해 오자 불과 47척의 전선을 이끌고 진해 합포와 남해의 관음포에서 격전을 벌여 대첩을 거두었다. 관음포 해전(박두량 해전)에서 대승이 가능했던 것은 최무선이 개발한 화포로 인한 새로운 전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에 이순신장군 역시 정지장군이 왜구와 싸워 승리한 곳에서 똑같이 전투를 하고 대승을 거두는 것으로 볼 때 정지장군의 해전은 독창적인 방법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정지의 나이 17세 무렵에 나주남문 밖을 지나던 중 황소가 사람을 들이받아 생명이 위급한 상황을 보고 황소에게 달려들어 두 뿔을 잡아 둘러 메쳐 인명을 구했다고 전하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당시 나주목사였던 박춘(후일 좌정승에 오름)이 정지의 재목을 간파하고 사위로 삼았다고 전한다.
정지석탑(鄭地石塔)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42호
남해군 고현면 대사리 768
남해를 구해준 정지장군(1347~1391)을 위해 남해 지역주민들이 정성을 모아 손수 돌을 깎고 다듬어서 세운 석탑이다. 정지장군은 최영, 이성계와 함께 고려 말의 명장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 말 조정의 부패로 혼란이 극심했던 시기에 남해안을 침략한 왜구를 무찌르는데 큰 활약을 했다.
탑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높이가 2.25m로 소박하지만 엄숙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탑신 밭침은 자연석의 큰 바위로 이루어졌다. 이락사, 충렬사와 함께 남해가 나라와 백성을 구한 애국정신이 곳곳에 베여있는 호국의 땅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정지석탑이 있으므로 현재까지 마을 이름을 탑동으로 부르며 마을 주민에 의해 잘 보존되고 있다.
탑 앞에는 마을 사람들이 [탑의 유래]를 작은 비석에 새겨두어 여기에 옮겨 적어 둔다.
탑의 유래
지금으로부터 1290년 전 신라 신무왕 5년 전야산군(轉也山郡은 남해군의 전신) 당시 녹두산 남록에 서당골이 있었으며 현 고현국민학교 뒷산 종지등에 종각이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신라 제33대 경덕왕 때 현 대사에 승전법사(勝詮法師)란 분이 오셔서 망덕사(望德寺)라는 절을 창건함과 동시 현재의 자리에 탑을 세우고 그때 이 탑은 망덕사의 입구이었다고 한다. 그 후 약 300년간 존속하다가 망덕사는 화재로 인하여 없어지고 현 탑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으며 그로 인하여 본 동명을 탑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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