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사량도의 최영장군 사당 문 ‘강풍에 부셔지다.’

천부인권 2012. 3. 13. 21:21

 

 

 

2007년 12월에 마창기술봉사단이 사량도 금평리 옥동부락으로 봉사활동을 갔다 돌아오면서 통영 도산면 가오치로 나오는 배를 기다리는 시간에 금평리 진촌부락을 돌아다니다 1983년 8월 6일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2호로 지정 된 최영장군사당을 보게 되었다. 9.82㎡ 규모의 작은 사당 옆에는 수령이 300여년 되었고, 높이가 15m, 나무둘레가 4.5m인 최영장군이 심었다고 전하는 보호수로 지정된 팽나무가 서 있어 이곳이 오랜 역사를 품고 있는 곳임을 알게 했다.

4년이 흐른 2012년 3월 또 다시 이곳 사량도를 찾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상사량도 진촌부락 맞은편인 하사량도 덕동마을로 봉사활동을 다녀오는 길에 너무나 많은 등산객들로 인해 우리 일행은 마지막 배편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 그때처럼 금평리 진촌부락을 구경하다 최영장군의 사당을 찾았다.

 

가는 날이 장날인지 3월 11일 배위에서는 바람이 앞으로 나가지 못할 정도로 거세게 불었다. 덕동마을에 사는 주민은 “태풍도 아닌 이런 바람은 70평생에 처음이다.”고 하였는데 사당 앞에서 만난 주민 분은 “10일 밤에 엄청난 바람이 불어 문짝이 부셔졌다.”고 하였다.  부셔진 문을 지나 사당의 문을 살며시 열어보니 중앙에 위패를 두고 벽 중앙에는 최영장군의 영정을 모셨으며, 양쪽에는 조잡한 느낌이 나는 그림이 붙어져 있다. 현재의 사당 건물 상량에는 1983년 12월 20일 오시(午時)라 적고 있어 83년도에 건물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최영장군[崔瑩, 1316~1388]은 기울어 가는 고려왕조를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였지만 결국 이성계의 배신으로 고려왕조는 무너졌고 자신은 부정한 뇌물로 재물을 모았다는 죄명으로 사형을 당했다. 최영장군은 “자신이 살아오는 동안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았다면 무덤에 풀이 자랄 것이지만 결백하다면 풀이 자라지 않을 것”이라는 일화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최영장군이 재상을 지내고 있을 당시 포은 정몽주는 막 관직에 입문하여 최영의 집을 찾아가보니 ‘집은 기어들고 기어나야 할 정도로 초라했고, 방안에 들어갔더니 흙벽(土壁) 그대로이고 바닥엔 멍석을 깔았는데 벼룩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다.’는 말을 하였다 전한다.

 

 

 

최영의 근검과 청렴은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견금여석(見金如石)]. 황금에 욕심이 많으면 옳고 그름의 판단이 흐려지고 백성을 괴롭히게 된다."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른 것이라 전하고 있다.


 

 

 

이러한 최영장군의 절개와 억울한 죽음 때문인지 민간신앙에서 무속신으로 숭배의 대상이 되어 수명장수, 안과태평의 신으로 가장 많이 모셔지는 신령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사량도 진촌에 세워진 사당은 고려말엽 왜구가 침입했을 때 최 영 장군이 이곳에 진을 치고 진두지휘하여 왜구를 무찌르고 나라를 지킨 공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사당으로 후세 사람들은 장군의 위패를 이곳에 모시고 매년 음력 1월 14일과 12월 14일 2회에 걸쳐 사당제를 모시고 있다.

 

 

사량도에 있는 최영장군 사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