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창원시 성주사(곰절)의 이모저모

천부인권 2012. 4. 16. 21:37

 

성주사는 현재 급격히 변화하고 있는 불교의 모양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절이 되었다. 예전의 한적함이나 아담한 모습은 사라지고 건물의 규모도 많아지고 크기도 웅장해져 점점 기업화 되어가는 종교의 또 다른 모습을 보는 듯하다.
이렇게 변해가는 성주사의 모습을 기록하는 것도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하며 전체 풍경과 건물, 성물의 위치변화 등을 살펴보고 새로운 구조물의 변화도 살펴본다
.

 

2012.1.5. 안민고개에서 바라 본 성주사 풍경

 

 

성주사 입구의 어수각

 

성주사의 어수각

 

성주사 입구에 약수터가 있다. 약수터 옆에 있는 바위에 어수각(御水閣)이라 새겨둔 글귀가 보인다.
어수각은 가야국 수로왕 아들 10명 중 7명이 장유화상을 따라 불모산으로 출가하여 수행 하게 되자 수로왕과 황후가 출가한 아들을 찾아왔다한다. 그때 목이 말라 성주사 앞 약수터에서 수로왕이 물을 마셨다는 뜻으로 어수각(御水閣) 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성주사 절은 허황옥을 보위해 온 사촌오빠 장유화상이 창건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창건자를 무염국사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렇게 불리는 이유를 생각해보니 무염국사의 생애와 많은 관련을 지은 듯하다.

성주사지 낭혜화상부도비(聖住寺址朗慧和尙浮屠碑)에 적힌 내용으로 본다면 신라 무열왕의 8대손인 무염국사는 13세에 입산하여 부석사(浮石寺)의 석징(釋澄)에게 화엄경(華嚴經)을 익히고 당나라에 가서 수도하고 백제 땅 보령으로 돌아와 웅천의 오합사(烏合寺)에 머물면서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조(開祖)가 된다. 여기서 말하는 웅천은 진해구 웅천이 아니라 충청도 보령의 웅천을 말한다.
창원시의 성주사는 원래 웅신사라는 절이었지만 이후 성주산문의 중들이 절을 장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성주사로 개칭되고 현재까지 이름을 전해 오고 있다는 생각이다.
무염국사가 건립했다는 우리 지역의 절들은 전단산의 우곡사(牛谷寺)(832년)와 구천동의 성흥사(聖興寺)(833년), 함안 장춘사(832년)등 수많은 절을 지었다고 전하나 전해지는 것은 현재 이 세 곳뿐이고 성주사는 추측만 무성하다.


 

 

대웅전의 적멸루

 

성주사 대웅전 뒤편에 쓰인 차우 김찬균 거사의 글

 

성주사 대웅전 뒤편에 가면 차우 김찬균(此愚 金瓚均) 거사의 묵적이 남아있다. 편액은 적멸루(寂滅樓)라 적고, 佛記2513년(西1969년), 김찬균(金瓚均)이라 새겨 놓았다. 보통 사찰에는 적멸궁(寂滅宮)이라고 쓰는데, 성주사의 편액에는 적멸루(寂滅樓)라고 적은 것은 추측컨대 김찬균 거사가 유림의 사람이라 그렇게 쓴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해본다.

 

 

 

 

성주사(곰절)에는 천사도 있다?

 

오랜만에 성주사에 가보니 모든 농경지가 사라지고 공업도시로 변화한 창원시처럼 성주사가 엄청나게 많이 변하여 옛 곰절의 모습은 찾기 어려웠다. 예전에는 가장 큰 건물이 대웅전이었는데, 지금은 새로 지어지는 다른 건물보다 초라한 모습으로 변해 있다.
새로 거창하게 세워진 지장전 앞에는 어른의 키를 훌쩍 넘는 커다란 석등이 놓여 있는데, 이 석등 옥개석의 귀꽃마다 날개를 단 천사의 모습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조각되어져 있다.
인간과 신의 중간 영역에서 매개 역할을 하는 이가 동양에서는 선녀로 표현되고, 서양에서는 천사로 표현되는데 선녀가 아니라 천사를 석등에 새겨 넣은 것이 이채롭다.

 

 

 

성주사 영산전 중수가 안타까운 이유

 

성주사 영산전이 낡고 오래되어 완전히 헐어버리고 새롭게 지으면서 예전의 크기보다 조금 더 크게 지었다. 그러다보니 처음부터 기존의 영산전은 완전히 제거하고 새로운 자재로 영산전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예전의 크기대로 중수하였다면 많은 건축자재가 기존의 것들로 사용되어 전통의 맥을 이어 갈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처음에는 영산전 출입문의 문짝도 모두 새것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물의 크기에 맞추어 문틀을 만들었다. 그러다 문짝만이라도 기존의 것으로 사용하자는 의견이 있었는지 크기가 작은 문짝을 이미 만들어 둔 큰 문틀에 맞추려하니 아래위로 다른 나무를 덧대어 합판으로 마감을 하는 꼴사나운 문틀이 되었다.


이후 아무리 보아도 이상한지 다시 신축할 때 새로 맞춘 문을 다시 달았다. 영산전은 이제 완전히 새롭게 신축된 건물이 되어 앞으로 얼마나 더 흘러야 문화재로 등록 될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성주사 삼성각(三聖閣) 주련이 지장전으로 옮겨졌다.

 

삼성각은 불교가 어떤 지역이나 국가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토착신앙 또는 민간신앙과 융합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것으로 흔히 단군이 산신이 되었다는 전설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이곳 성주사 삼성각 앞에 붙어있는 주련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관음보살 대의왕(觀音菩薩大醫王) 중생병 고치시는 큰 의사이신 관세음보살님
감로병중 법수향(甘露甁中法水香) 감로수 병속에 법수 향기로워라
쇄탁마운 생서기(灑濯魔雲生瑞氣) 마귀의 구름 벗겨 버리고 서기 살아나게 하시며
소제열뇌 획청량(消除熱惱獲淸凉) 모든 번뇌 씻어버리고 청량함을 얻게 하시네.

 

왔다간다  2012.04.20 15:15

천부인권님 반갑습니다.

언급하신 기존의 영산전에는 부처님 정면에만 문이 있었는데 정면에 있는 문은 '어간'이라해서 일반 불자들이 출입하기가 부담스럽지요. 그래서 출입문을 법당 양 측면에 만들다 보니 문 크기 만큼 크지게 되었습니다.
사진의 속의 문은 준공전에 점안식을 위해 임시로 달았던 문이였음을 확인해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편안한 하루되십시오..
성주사에서 보적 합장

 

왔다간다님이 언급하신 내용을 2009년 사진으로 확인해 보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어간(御間)’이란 신이 출입하는 중앙문을 말하는 것이고 양쪽의 협간(夾間)은 승이나 일반 사람들이 출입하는 문으로 원칙적으로 말하면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 오른쪽 문으로 나오면 되는 것입니다.

영산전이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후 중수하는 건물도 원형에 가깝게 건설하는 것이 옳은 일이지 후대 사람들의 편리를 위해 완전히 다른 건물을 짓는 것은 정통성을 보는 관점에서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특히 영산전을 신축하면서 옛것 보다 규모를 크게 하려다 보니 기존의 부재들을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을 노후화가 심해서 모두 쓸 수가 없었다.’고 답하신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리고 임시로 달았다는 그 문이 옛 영산전의 문짝임을 아시는지요? 건물을 크게 하고 문을 크게 하다 보니 기존의 영산전 문이 작아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이 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