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책과 기록

당암 강익문(戇庵 姜翼文)은 15대조이다.

천부인권 2012. 9. 13. 16:11

강익문 [姜翼文 : 1568~1648]

원본글 출처 : 강익문의 묘지명(墓誌銘)
저자 : 허목(許穆)
대표관직 : 현감(縣監)
자 : 군우(君遇)
호 : 당암(戇庵)
원전서지 : 국조인물고 권25 명류(名流)

 

 

 

 

공(公)의 휘(諱)는 익문(翼文)이고, 자(字)는 군우(君遇)이며, 호(號)는 당암(戇庵)이다. 성이 강씨(姜氏)인 사람들은 본래 진양(晉陽) 사람인데, 그의 4대조 강승전(姜承顓) 때부터 합천(陜川)으로 이사해 살아 드디어 합천이 본관이 되었다. 조부 강인수(姜仁壽)와 부친 강세탁(姜世倬)은 자손이 귀하게 됨으로 해서 관작이 추증되었는데, 강인수는 사헌부(司憲府), 강세탁은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

 

공은 젊을 적에 사부(詞賦)로 명예를 얻었고 22세 때인 기축년(己丑年, 1589년 선조 22년)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39세 때인 병오년(丙午年, 1606년 선조 39년)에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여, 무신년(戊申年, 1608년 선조 41년)에 성균관 학유 겸 시강원 설서(成均館學諭兼侍講院設書)가 되었고, 광해군 원년인 기유년(己酉年, 1609년)에 예조 좌랑(禮曹佐郞)이 되어, 이후 4년 동안에 세 번 정언(正言)이 되고 네 번 헌납(獻納)이 되었으며, 여섯 번 지평(持平)이 되고, 다섯 번 문학(文學)이 되었다. 계축년(癸丑年, 1613년 광해군 5년)에 장령(掌令)에서 필선(弼善)으로 옮겼다가 다시 제용감 정(濟用監正)이 되고, 또다시 사간(司諫)이 되었다. 이때 큰 옥사(獄事)가 있었는데,1) 문익공(文翼公) 이덕형(李德馨)이 영창 대군(永昌大君)의 일을 간(諫)했다가 형률로 다스릴 것을 논하게 되자, 공은 이를 즐겨 따르지 않았으므로 비로소 당시 의론에 위배되게 되었다. 이듬해 갑인년(甲寅年, 1614년 광해군 6년)에 광해군이 영창 대군을 죽이자, 정온(鄭蘊) 공이 상소하여 극언(極言)하매, 대역(大逆)으로 죽일 것을 논하는지라, 공은 즉시 거짓으로 병이 났다 하여 사직하였는데, 장남인 강대수(姜大遂)가 사간원에 있으면서 역시 쟁론(爭論)하다가 죄를 얻었고, 공은 충원 현감(忠原縣監)으로 좌천되었다가 마침내 구속되어 옥(獄)에 갇혀 있은 지 9년이었다. 혹자가 사사로이 말하기를, “구속되어 있음은 참으로 고통스러울 것이다. 바야흐로 지금 모후(母后)를 폐하자는 사태가 급박한데, 어찌 자제로 하여금 상소하게 하여 이 일을 말하도록 하지 않는가? 그러면 갇혀 있는 것 또한 석방될 것이다.”하였으나, 공은 개연히 죽음으로써 거절하였다. 계해년(癸亥年, 1623년 광해군 15년)에 인조(仁祖)께서 반정(反正)하여 정온 공은 풀려날 수 있었다. 신미년(辛未年, 1631년 인조 9년)에 전적(典籍)이 되매 논하는 자들이 앞서의 사건을 말하며 이를 저지하려 하였는데, 동도공(東都公, 아들 강대수를 말함)이 상소하여 그 사건의 시종(始終)을 갖추어 진술하여 이를 해명하였다. 다음 해에 통례원 봉례(通禮院奉禮)를 거쳐 다시 제용감 정이 되었는데, 들어가 사직하고 즉시 전리(田里)로 내려가 한가하게 스스로 즐기며 장수하다가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많은 자에게 내리는 은전(恩典)으로써 통정 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랐고 후에 추은(推恩)의 예에 의해서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증직되었다.

 

공은 평생토록 화려한 집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옷은 몸에 편한 것을 취했고 음식은 입에 맞는 것을 취했을 따름이다. 항상 자제들에게 경계시키기를, “늙은 애비 때문에 오욕(汚辱)을 당함이 없도록 하라.”하였으며, 성질이 성실하고 신중하여 겉모양만 꾸미기를 일삼지 않았고 남과 함께 할 때는 겉으로 드러냄이 없었으며, 불선(不善)한 것을 보면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선한 자들은 매우 좋아하지 않았다.

 

공은 융경(隆慶) 3년인 기사년(己巳年, 1569년 선조 2년) 정월 13일에 태어나 인조 27년(1649년) 5월 7일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 81세였다. 의령(宜寧)의 낙서(洛西)에 장사지냈는데, 정부인(貞夫人) 합천 이씨(陜川李氏) 또한 89세에 세상을 떠나 합장하였다. 3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강대수(姜大遂)는 동도 윤(東都尹)으로 세 번 결혼해 2남 3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강휘연(姜徽衍)ㆍ강휘만(姜徽萬)이고, 사위 세 사람은 현감인 이당규(李堂揆)와 김정익(金庭翊)ㆍ이시격(李時格)이며, 또 서출(庶出)의 아들 강휘윤(姜徽尹)과 사위 이명길(李命吉)이 있다. 차남 강대적(姜大適)은 강휘민(姜徽敏)ㆍ강휘중(姜徽重)ㆍ강휘망(姜徽望)을 낳았고, 사위 두 사람은 조화(趙璍)ㆍ오선기(吳善基)이며, 서출의 아들은 강휘준(姜徽俊)ㆍ강휘걸(姜徽傑)이다. 막내 강대연(姜大延)은 강휘정(姜徽鼎)ㆍ강휘진(姜徽晉)을 낳았고, 사위 세 사람은 이두추(李斗樞)ㆍ김옥(金鋈)ㆍ송정태(宋廷泰)이다. 공의 장녀는 별제(別提) 이여한(李汝漢)에게 시집가서 4녀를 두었는데, 사위는 정유우(鄭有佑)ㆍ안시추(安時追)ㆍ이의겸(李義謙)ㆍ하자혼(河自渾)이다. 차녀는 참봉(參奉) 정유숙(鄭惟熟)에게 시집갔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성실하면서도 곧았고 질박하면서도 순후하였으므로, 장수하는 길상(吉祥)이 있었을 뿐더러, 게다가 자손들까지 번성하였도다.

 

 

 

 

 

 

각주
 
1) 1613년 광해군 5년의 계축옥사(癸丑獄事)를 말함. 대북파 정인홍(鄭仁弘)ㆍ이이첨(李爾瞻) 등이 박응서(朴應犀)ㆍ서양갑(徐洋甲) 등을 문초할 때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영창 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진술을 받아내어 영창의 외조부이며 인목 대비의 부친인 김제남(金悌男)을 사사(賜死)시키고 영창 대군을 서인(庶人)으로 강등하여 강화도로 유배하였다가 죽인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