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3.3 옥석견의 묘지 앞에 위치한 비와 효원각 모습
창원시(昌原市) 의창구 동읍(東邑) 용잠리(龍岑里) 692번지에 있다는 조선 전기의 효자 옥석견(玉石堅)의 효행을 기려 세운 효원각(孝源閣)을 찾아 나섰다. 네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하고 용잠리로 향했지만 결국 엉뚱한 곳으로 안내되어 찾지를 못했다.
동읍 덕천마을에서 용잠리로 이주한 동읍로19번길 16에 사시는 분의 도움으로 효원각은 용잠리 본동 즉 용잠리 용잠부락의 야산 기슭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주소를 물어보니 도로명 주소가 동읍로 75-31이고, 용잠리 692번지가 맞으나 평소에는 용잠리 용잠마을 322번지로 사용했다고 한다.
용잠리 ‘햇살나무어린이집’ 입구에 차량을 주차하고 마을 안쪽으로 들어와 마을 뒤 야산을 살폈지만 기와지붕인 효원각은 보이지 않았다. 마을 주민에게 물으니 옥씨 묘가 위쪽 소나무와 대나무가 우거진 마을 끝에 있으니 올라 가보라고 하면서, 그 후손들이 10월 초순경 일요일에 제례를 지내기 위해 해마다 찾아온다고 한다. 감나무 과수원을 지나 야산에 붙어 있는 마을의 마지막 집인 작은 흙집으로 접근하니 비석과 묘가 보인다. 흙집 비탈길 위쪽에 묘지와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비석 가까이 다가가니 오른쪽에 효원각이 보인다. 마을에서는 대나무에 가려져 볼 수가 없는 구조이다.
옥석견의 묘지에서 마을을 바라보면 동읍주민센터가 정면으로 보인다.
묘소 앞에 세워진 화강암의 비석 앞면에는 ‘성균진사의령옥공지묘(成均進士宜寧玉公之墓)’라는 글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묘와 거의 동일한 높이의 위치에 효원각이 있는데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옥석견(玉石堅)의 효행을 기려 의령옥씨(宜寧玉氏) 문중에서 세운 것이나 정확한 건립 시기는 알 수 없고 대략 일제강점기의 건물로 추정하고 있다.
편액의 기록과 효원각 정려기(旌閭記)와 여기후소지(閭記後小識)에 따르면 그 이전에는 불천(佛川)과 창원부 남문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어떤 연유로 마산 봉치(烽峙)까지 옮겨졌는지는 알 길은 없고, 1974년 마산의 도시계획으로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는 사실이 편액에서 확인된다. 정면에 ‘효원각(孝源閣)’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으며, 안에는 ‘효자성균관진사의춘옥석견지려갑인십월일이건(孝子成均館進士宜春玉石堅之閭甲寅十月日移建)’이라는 현판이 있다. 지금은 정려각 솟을문이 없으나 이곳으로 옮겨오기 전에는 솟을문도 있었던 것으로 여기게 하는 효원문(孝源門) 편액이 정려각 안에 걸려 있다.
옥석견은 조선 전기 창원 사람으로 수(壽)의 아들이다. 효행과 절의가 뛰어나 경상도관찰사로 있던 강혼이 천거하여 1474년(성종 5)에 조정에서 정려를 내렸다.
유당(攸堂) 김종하(金鍾河)선생이 쓴 「창원군지」 72P, 효자편에서 옥석견(玉石堅)은 “일찍 아버지를 잃고 가난한 집에서 편모(偏母)를 섬기되 지성(至誠)을 다했으며, 진귀(珍貴)한 식물(食物)을 얻으면 반듯이 어머니께 드렸다. 어머니가 하세(下世)한 후 당시 단상법(當時 短喪法:삼년상의 기한을 줄여서 1 년만 복을 입는 법)이 엄(嚴)하였으나 여묘(盧墓:상제가 무덤 근처에 여막을 짓고 거기에 살면서 무덤을 지키는 일)에서 삼년간(三年間) 최질(衰絰:상중(喪中)에 입는 삼베옷)을 벗지 아니하였고 그 후 삼년간 또 조석전(朝夕奠:아침저녁으로 영전에 지내는 제사)을 폐하지 아니하였다. 본도(本道)에서 장문(狀聞)하여 정려(旌閭)를 명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창원향교지」 하권 “정려(旌閭), 효열(孝烈), 절부(節婦)”편 907P에도 효자 옥석견의 이야기가 전하고 있으며, 「창원의 얼을 찾아서」 조선시대 “효성이 지극했던 사람들”에도 옥석견의 이야기를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창원시 문화유적분포지도」 140P, 일련번호 248 ‘창원 용잠리 효원각’에도 상세히 기록 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2권, 경상도(慶尙道)창원도호부(昌原都護府) 효자편에는 김효량(金孝良), 박시명(朴始明), 박정견(朴庭堅)과 더불어 옥석견(玉石堅)의 이야기도 전하는데 “아버지가 일찍 죽고 집이 가난하였으나 어머니를 지성으로 섬겼다. 별미(別味)가 생기면 가슴에 품고 와서 드렸다. 어머니가 죽자, 매우 슬퍼하여 예(禮)보다 더하였다. 그때에 복상을 짧게 하는 법이 매우 엄하였으나, 홀로 여묘(廬墓)하고 최질(衰絰)을 벗지 않았으며, 상을 마친 뒤에도 다시 3년 동안 아침저녁으로 전 올리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금상(今上) 5년에 장문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玉石堅 中司馬早孤家貧事母至孝得美味必懷歸供進及喪哀毁愈禮時短喪法嚴獨廬墓祥 畢猶設朝夕奠中廟命旌 [嶠南誌卷之七十一]
<려각 내부 정면 모습>
孝子成均進士玉公旌閭記
古昔明王以孝治天下人倫大明敎化盛行當世之人無不薰蒸融液於熙嘷之中矣 降在後世人紀不修風敎漸敗則人祛率由天常 而不至於悖德悖禮者亦或鮮有之矣 而況通天之誠邁人之行千百焉 而難乎一二
者乎苟有其人上之人必表厥宅里於以風勵 而奨勉之是固扶世敎 而淑人心者豈徒然哉 故國子生宜春玉公 諱石堅主居于府治東佛川之里早孤 而貧篤於學事母以至誠以水山若千供菽水飬临大旱無以揷秧往于田號泣則不移時雲集泉涌卒得耕種 而鄰坪無及焉又有井鯉冬筍與孟王故事千載符合異感有如是矣及其喪母哀毁踰禮時短喪法嚴燭衰絰廬墓以畢三年三年浚煪朝夕奠三年其若心于何如也 竊意以公之有學非不究先王之制耳祀時禁固有不辤 而若夫爲過中之行則得非俯就之餘餘哀切切不覺自趋於徑直者歟愈可見天情測恒之至 而前所以動得天地神祇也 柳亦以是也 夫其爲孝也 信乎卓卓偉矣肆 國朝盛際特竪綽楔于本里以之 褒獎者而自鄕中隨壞隨繕以至數百載而不替焉在浔侯宣洙時移以建城之南門外自是之後歲月寖久未加修治而際又桑瀾一翻 國移而邑遷則鄕風隨而陵遲欹甍敗桷幾不兔行路嗟惜吁可慨己是嵗秋玉生麒煥乃謀增制而作新之舍其故處 而更移于馬山烽嶺之下以城圯而孔路在此也 功旣訖屬予以記之予惟公之孝府之人雖婦人小子皆誦之如昨日事番於耳 而碑於口者何述之有但閭故無記事實未該又不詳其 㫌命之在何時剏建移設之爲某年某月殊爲可欠耳接短喪是燕山時事則蒙 㫌之爲 中廟朝恐無疑 而未可臆度以質之也且令距梁俟時不爲甚遠而亦未之記年月則尙何論其餘哉令苟曰己例而又復因循無一言得無所謂浚之視令猶令之視昔者耶矧玆世人洪流倫綱斁絶不徒罔念其先徵之闡又淀而昧然於孝之爲何物事則孰有以傍承之遠裔而傾葴儲而悉心力至於如此乎仍念生以丱角而淀吾遊旣見其姿明而趣不凡又聞居家雖劇務中而不廢書籍尤善於養親是知是擧也不爲無所本而亦可謂賢遠於人矣遂㨿州誌閭誌等軐爲之論著孝蹟因書作興大槪俾宩者
有攷焉閼逢攝提格南至節盆城 金柄麟 記
<효원각과 내부에 걸려있는 편액들>
<좌우 측면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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