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창원향교 풍화루를 찾아보니

천부인권 2013. 5. 16. 07:08

 

2013/5/15 창원향교 풍화루 모습

 

 

 

창원시 의창구 의안로59번길 6(소답동 433-2)은 창원향교의 입구인데 홍살문 옆 작은 공터에 주차를 하면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이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 담긴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는 비갈(碑碣)이 방문객을 먼저 맞이한다. 이 하마비(下馬碑)는 창원향교의 위상을 바로세우라는 의미가 있는 표석으로 2012년 2월 8일에 세운 것이다.

 

 

풍화루로 오르는 계단 입구에는 붉은 칠을 한 대문(大門)인 홍살문(紅살門)이 자리를 하고 있다. 홍살문(紅살門)은 능(陵), 원(園), 묘(廟), 대궐, 관아(官衙) 그리고 충효절열(忠孝節烈)의 정려각(旌閭閣)이 있는 마을에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지붕 없이 붉은 살을 세운 문으로 이 문을 출입하는 사람들은 이곳에 경의를 표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계단을 오르면 좌측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이 220년, 높이가 20m, 직경 3.9m로 추정되는 느티나무가 있다. 이 마을의 수호신(守護神)으로 추앙받고 있는 이 나무의 가지를 꺾는 사람은 신목의 벌을 받는다는 믿음이 전해오고 있다. 

 

 

 

우측 흙 담장 앞에는 5기의 비석군이 세워져 있는데 풍화루 쪽에서 가장 안쪽의 비는 2013년 3월 27일에 세운 것으로 ‘해강 노병덕공공적비(海岡 盧秉德公功績碑)’이며 뒷면에 국한문 혼용으로 그 공적의 내용을 적어두었다. 

그 옆으로 세워진 다른 4기의 비는 조선시대의 것으로 창원향교를 이전(移轉)한 부사이공윤덕이교불망비 府使李公潤德移校不忘碑와 풍화루를 창건하거나 재 중건한 공이 있는 순상국홍공재철영세불망비 巡相國洪公在喆飛世不忘碑, 부사이공정현풍화루서재중건비 府使李公定鉉風化樓西齋重建碑, 부사임후익창풍화루창건비 府使任侯益昌風化樓剏建碑가 세워져 있다.

 

 

 

'부사이공윤덕이교불망비(府使李公潤德移校不忘碑)'는 민긍기가 번역한 「역주 창원부읍지」 p209에는 “이윤덕(李潤德)은 정묘년(丁卯年), 영조 23(1747)년 3월에 부임하여 기사년(己巳年)인 영조 25(1749)년 여름에 폄귀(貶歸)되었다. 부사 이윤덕이 무진년(戊辰年 1748)에 내상에 있던 향교를 창원도호부에서 동쪽으로 1리에 옮겨지었다.” 비의 제하(題下)에는 이처럼 새겼다.

 

자혜청덕(字惠淸德) ;글 하나하나 맑은 덕 같은 은혜

명재구비(銘在口碑) ;비석에 새겨져 말하는 듯하고

성독성묘(誠篤聖廟) ;성묘 받듬은 정성이 돈독하고

수이교기(首移校基) ;처음부터 향교를 옮기시고

 민가래모(民歌來暮);백성들은 해질녁 태평가 울리고

사유거사(士有去思);비록 가셨지만 선비의 사모함은 그대로인데

차구무로(借宼無路);(전근)가는 길 막을 수는 없지만

유애재자(遺愛在玆);인애와 유품은 이곳에 있구나

 

창원향교에서 논어를 강학하는 이현호선생은 이교불망비에 대해 아래처럼 번역을 하였다.

부사이공윤덕이교불망비(府使李公潤德移校不忘碑) 창원도호부사 이윤덕공 향교 이건 불망비1)


자혜청덕(字惠淸德) 은혜롭게 길러주신 그대의 맑은 덕
명재구비(銘在口碑)2) 고을 백성 칭송하여 비명에 새기었네.
성독성묘(誠篤聖廟)3) 문묘를 받드는데 참되고 독실하여
수이교기(首移校基) 으뜸으로 향교의 터전을 옮기셨네.
민가래모(民歌來暮)4) 백성들은 늦게 오신 원님을 노래하고
사유거사(士有去思) 선비들은 떠나가신 원님의 비 세웠네
차구무로(借宼無路) 훌륭하신 우리 부사님 다시 뵐 길 없으니
유애재자(遺愛在玆) 여기에 사랑 남겨 빗돌 세워 기리리라

 

 

순상국홍공재철영세불망비(巡相國洪公在喆永世不忘碑)는 김취진(金冣鎭)이 쓴 풍화루서재중수기(風化樓西齋重修記)에 의하면 『창원부사가 순행하던 관찰사 홍재철공에게 품의(稟議)하니 홍공이 특별히 오백금을 마련하여 이 역사를 완성하게 되었다. 아름답도다! 학교의 설립은 우리 영남 칠십주에 두루 이어져 있어 서로 바라보이니 홍공이 우리 고을에 내린 특별한 사랑이 매우 깊은 것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의 제하(題下)에는 이처럼 새겼다.

 

흥학설방(興學說放);학문을 일으켜 백성을 깨우치고

위정요무(爲政要務);정사를 돌봄은 중한 일을 하셨고

상혜기흡(常惠旣洽);은혜로움은 항상 넘치시고

위덕유막(韋德猶慕);오직 사모하여 그 덕을 에워 샀고

고자제루(顧玆齊褸):뒤 돌아 보니 재와 루는 빛나도다

여피오륜(如彼奧輪)이것 또한 오륜과 같구려

송등유림(頌登儒林)유림의 칭송이 드높으니

각저정민(刻著貞珉)글 새겨 널리 알리리라

 

소천韶泉 이현호李絃浩 유교문화연구소장은 홍재철 영세불망비에 대해서는 이렇게 해석 했다.

순상국홍공재철영세불망비(巡相國洪公在喆永世不忘碑) 경상감사 홍재철공이 고을을 순행한 것을 기념한 영세불망비


흥학설방(興學設放) 학교 설립을 크게 일으키시니
위정요무(爲政要務) 정사를 행하는 중요한 일이라네
상혜기흡(常惠旣洽) 변함없는 은혜가 이미 넘쳐나니
위덕유막(偉德猶慕) 휼륭한 은덕을 아직도 그리워하네.
고자제루(顧玆齊樓) 이제 서재와 풍화루 돌아보니
여피오륜(如彼奧輪) 저와 같이 그윽하고 높구나.
송등유림(頌登儒林) 고을 유림 칭송하여 노래하니
각저정민(刻著貞珉) 아름다운 빗돌에 적어서 새기노라.

 

 

 

 

부사이공정현풍화루서재중건비(府使李公定鉉風化樓西齋重建碑)에 대해서는 김취진(金冣鎭)이 지은 풍화루서재중수기(風化樓西齋重修記) 일부의 기록을 옮긴다.

『우리고을의 풍화루와 서재가 썩고 상한지 몇 년이 되어 중수를 시도하였으니 시절이 나빠 재물을 모으기 어려워 많은 선비들이 뜻을 가지고 있지만 이루지 못하였다. 다행이 부사 이정현공이 이 고을에 부임하여 침체된 것을 일으키고 피폐한 것을 보완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여 문장을 숭상하고 학문을 높이는 도(道)에 뜻이 있어 매 삭망(朔望) 문묘에 제사를 드린 후 “학교는 한 고을의 모범이 되는 곳이다. 문루와 서재가 이와 같이 삭아 퇴락한 것이 비단 사림의 법이 이지러진 것 만이겠는가? 또한 다스리는 사람의 책임이다. 그것을 중수해야 할 것이다.”하였다.』

부사 이정현(李定鉉)은 헌종 6[경자년(更子年, 1840)] 9월에 부임하였다. 임인년(壬寅年, 1842) 8월에 좌수사(左水使)로 옮겨갔다. [출처 : 역주 창원부읍지 p209]

이비는 비신이 부러져 시멘트로 접합한 흔적이 있으며 비대도 시멘트로 덧발라 놓았다. 비신에는 계묘년(癸卯年 1843)에 세운 것으로 적혀있다.

 
 

 

 

 

부사임후익창풍화루창건비(府使任侯益昌風化樓剏建碑)는 가첨석, 비, 귀부를 완전히 갖춘 형태이고 사암제(砂巖製)로 만들었다. 비석의 밭침돌로 귀부를 놓는 것은 명나라 호승지(胡承之)가 쓴 『진주선(眞侏船)』에 의하면 황룡과 청룡이 교미를 하여 아홉의 자식을 두었는데 모두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로 각자 독특한 성격을 지닌 채 일생을 살았다. 이를 일러 용생구자(龍生九子)라 말하는데 첫째는 비희(贔屓), 둘째는 치문(鴟吻), 셋째는 포뢰(蒲牢), 넷째는 폐안(狴犴), 다섯째는 도철(饕餮), 여섯째는 리수(螭首), 일곱째는 애자(睚眦), 여덟째는 산예(狻猊), 아홉째는 초도(椒圖)이다. 그 첫째가 비희인데 비(贔)는 ‘큰 거북이고’, 희(屓)는 ‘힘쓰는 모양’이라는 뜻이니 “힘을 쓰는 큰 거북이 된다.”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을 좋아하고, 몸통은 거북을 닮고, 머리는 용을 닮았으며 석비 아래에 둔다. 거북은 장수하는 동물로 알려져 있으니 영원과 길상(吉祥)을 상징하며 이것을 만지면 복이 온다고 한다.

영조 37(1761)년 창원대도호부사 임익창(任益昌)에 의해 풍화루(風化樓)가 창건되었고 그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로 부사가 떠난 3년 후인 1765년 당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비문을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면의 제하(題下)에는 이렇게 새겼다.

 

루비유완(樓非遊翫) 풍화루는 놀이하는 곳이 아니고 

부풍강립(扶風綱立) 이곳에서 풍속을 받들어 기강을 세워야 한다.

수위경영(誰爲經營) 누구를 위해 경영하느냐

도의화행(道義化行) 미풍양속을 인도하여 행동하게 하리오.

성존상서(誠存庠序) 정성 깃던 참됨이 향교에 있으니

삼척불후(三尺不朽) 배우는 학동들로 하여금 썩지 않게 하고

재대간성(材大干城) 재주를 키워 나라의 간성이 되게 하여

만고방명(萬古芳名) 꽃다운 이름 영원히 남게 하리라

 

임익창(任益昌)은 정숙량(鄭肅良)의 뒤를 이어 경진년(庚辰年) 영조 36(1760)년 2월에 부임하여 임오년(壬午年)인 영조 38(1762)년 7월에 전광훈(田光勳)과 교체된 부사이다.[출처 : 역주 창원부읍지 p211]

 

소천韶泉 이현호李絃浩 유교문화연구소장의 번역은 아래와 같다.

樓非遊翫 풍화루는 놀고 떠드는 곳이 아니니

誰爲經營 무엇을 위하여 지었는가

扶風綱立 풍속을 바로잡고 기강을 세우며

道美化行 미풍으로 이끌어 교화 행하기 위함이라

誠存庠序 향교1)에 정성을 모아서

材大干城 간성2)의 인재를 키우리라

三尺不朽 삼척의 빗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니

萬古芳名 영원토록 아름다운 명성 빛나리라

 

향교1): 원문은 상서庠序이다. 庠序는 중국 고대의 향교 즉 지방 학교 이름이다. [맹자] <등문공 상>에 상,서,학,교를 설치하여 백성들을 가르쳤으니 상은 봉양한다는 뜻이요 교는 가르친다는 뜻이요 서는 활쏘기를 익힌다는 뜻입니다. 하나라에서는 교라하였고 은나라에서는 서라하였고 주나라에서는 상이라 하였으며 학은 삼대가 이름을 함께하였으니 이는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인륜이 위에서 밝히면 소민들이 아래에서 친해집니다.

간성2): 방패와 성 같은 역활을 할 수 있는 인재를 말한다. [시경] <토저>에 "씩씩한 무부여 공후의 간성이로다."

 

 

 

영조 37(1761)년 부사 임익창(任益昌)에 의해 건설된 풍화루(風化樓)는 ‘풍속(風俗)을 교화(敎化)하는 집 또는 교육(敎育)과 정치(政治)의 힘으로 풍습(風習)을 잘 교화(敎化)시키는 곳.’이란 뜻이 담긴 글이다. 모든 향교의 입구가 다 풍화루란 현판이 걸려 있는 것은 아니다. 창원향교의 풍화루는 팔작지붕으로 처마 끝을 치켜 올려 멋을 내었고 난간도 설치하였다. 유생이 사색(思索)도하고 어울려 놀 수 있도록 정면3칸, 측면2칸의 중층누각 건물로 상층은 정자역할을 하면서 하층은 대문 구실을 하도록 건설되었다. 아래층의 기둥은 오랜 세월을 지탱할 수 있도록 150cm정도 높이의 돌로 만들었고 상층의 마루귀틀이 보 역할을 하고 있다. 

 

손사익(孫思翼)이 지은 풍화루기(風化樓記)를 보면 『사람을 가르치는 법으로 학교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고 학교를 세우는 것이 풍속(風俗)을 교화하는 관건이다. 성현의 묘가 있음으로써 횡당(黌堂)이 있고, 횡당이 있음으로써 동서 양쪽의 재(齋)가 있고 묘우(廟宇)와 당서(當序)가 있은 이후에 풍화루가 있어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회산(檜山)의 한 부(府)가 비록 바닷가의 작은 읍이지만 본디 동방의 추노(鄒魯)로서 교남(嶠南)의 큰 도회라 칭해지고 문물(文物)과 사업(事業)의 성대함이 다른 고을보다 단연 우월하나 학교를 처음 세우면서부터 또 무진(戊辰)에 옮겨 세운 이후로 조금씩 수선하였지만 풍화루(風化樓)는 아직 세울 겨를이 없었다. 이미 여러 해 일을 추진하였지만 실로 사적이 미치지 못했기에 온 고을의 선비들이 항상 이것을 아쉬워했다. 경진년(庚辰年 1760) 봄에 서하(西河) 임익창(任益昌)공이 우리 고을로 부임해 와서 직무에 힘을 다하여 침체된 것은 일으키고 폐단이 있는 것은 고쳐 보완하였다.』

 

함안 민속박물관과 향교

영산 향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13호)

곤양향교(경남 유형문화재 제221호)를 찾아서

고성향교에서 마을 이름을 생각해본다.

창원향교 풍화루를 찾아보니

창원향교의 교육 공간인 명륜당과 동·서재

김해향교에서 무너진 우리 정신을 생각한다.

 

1) 不忘碑는 善政碑, 頌德碑, 功德碑, 去思碑, 遺愛碑라고도 한다, 碑銘의 韻은 碑, 基, 思, 玆('支' 平韻)

2) 구비는 萬口是碑라는 의미로 백성들의 칭송이 비를 세운것과 같다는 말이다.

3) 성묘는 文廟, 즉 공자님 사당을 의미한다.

4)來暮之頌, 來何暮의 준말, “어찌 이다지도 늦게 오셨는가!” 善政을 베풀어 백성들이 칭송하는 말 『後漢書』 「廉范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