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국제통화기금, International Monetary Fund)사태가 일어났던 1997년 말 지도자의 판단 실수로 나라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는 굴욕을 겪었을 때 대한민국 민초들이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난 일이 ‘금 모으기 운동’이었던 것처럼, 지금으로부터 106년 전인 1907년 2월 11일 대한제국이 짊어진 일본에 대한 재정적 빛을 민초(民草)들의 모금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려는 운동이 창원향교 유생들로부터 분연히 일어났으니 이를 일러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의 시작이라 말한다.
일제 통감부와 일진회 등의 무자비한 방해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창원시 용호동에 있는 ‘경남도민의 집’에 가면 뼈아픈 역사의 한 토막을 알려주는 ‘국채보상운동 회문(國債報償運動 回文)’ 사본이 놓여 있다.
이 땅에 몸을 의지하고 온몸으로 살고자 하는 민초들은 나라가 진 빚을 갚고 일제의 지배에서 벋어나고자 ‘국채보상운동’을 벌이며, 나라의 힘을 한곳으로 모으는 작은 희망의 불씨를 제시 했지만 결국 지도자들이 뭉치지 못해 조선은 망했다. 그러나 나라를 구하고자 변방의 작은 지역인 이곳 창원향교에서 시작한 유생(儒生)들의 그 정신은 높이 살만하다.
그 회문의 내용인 즉, 「-중략- 우리 온 나라의 신서(臣庶)들은 모두가 다 오백년동안 교화 생육 속에 자라난 혈기로되, 이렇듯 국가가 위태한 때를 당하여 진실로 털끝만치라도 국가를 무시하고 광구(匡救)한 도리가 있다면 비록 힘을 다하고 생명을 바치며 살같이 닳고 뼈가 으스러지더라도 어떻게 다른 마음을 가져 힘쓰지 않겠는가? 오호라 안타깝도다. 현금 국용(現今 國用)이 모자라서 외국의 부채차관이 벌써 1,300만원이나 되는데 이것은 온 나라가 사느냐 죽느냐 하는 일대 관건이다.
-중략-
무릇 우리 군부의 신자 된 자로서 인륜의 도리에 의거하여 공의를 높이 확장하여 일반 사람이 같은 말로 단연회라 이름 하여 각도에 통문을 발송하여 조액을 수취하니 소문을 듣는 이들은 누구나 충의에 감격하여 팔뚝을 뽐내고 발을 굴리며 앞 다투어 의연금을 내는 이들이 그 몇 천 몇 만인지 알 수 없다. 우리 고을은 비록 먼 변방에 처해 있지만 동일한 우리 요순 같은 임금의 신민인즉, 어찌 용맹한 뜻으로 다투어 나아가 만에 하나의 티끌만한 보답이라도 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우선 본(창원)향교에서부터 이에 감히 우러러 포고하노니 의연금의 다과를 막론하고 서로서로 권고하여 힘에 따라 의연금을 내고 본교에서 회합하여 위로는 성주의 은혜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신민의 금수 같은 수치를 씻기를 바라노라.
초하루날 기록한 내용. 해당 동리에서는 통문이 도착하는 즉시 각기 그 동네 집집마다 설명하여 모르는 사람이 없도록 하고, 또 모이는 날은 오는 장날인 17일로 정하니 이렇게 알 것.
丁未(1907년) 2월 11일 發文校任 曺喜正, 金柄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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