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우리 것이라 애틋한 해인사 국사단(局司壇)

천부인권 2013. 5. 23. 07:54

 




해인사 일주문을 지나고 커다란 나무가 도열한 숲길을 걷다 보면 해인총림(海印叢林)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사천왕문을 지나게 된다. 이 사천왕문의 별칭은 봉황문으로 봉황(鳳凰)은 극락세계(極樂世界)로 안내하는 상상의 새를 말하며 이 문을 통과하면 이미 극락세계로 들어 왔다는 것을 뜻한다.




봉황문을 나오면 높다란 계단위에 해동원종대가람(海東圓宗大伽藍)이란 현판이 붙은 해탈문(解脫門)이 우뚝 서 있다. 이 해탈문을 오르기 전 우측에 비켜 앉은 자그마한 맞배지붕의 건물이 세워져 있는데 많은 관광객들이 지나가지만 작은 전각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지나는 것이 보통이다. 




<2013/5/18 해인사 국사단>

 

 

<2011/8/2 해인사 국사단>


 

이 국사단(局司壇)은 본래 대비로전의 자리에 있던 것을 대비로전(大毘盧殿)을 지으면서 옮겨 온 곳이라 한다. 건물의 정면에는 국사단이라는 현판이 있고 좌측에는 지공증점지(指公點地)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指公點地’는 ‘지공이 점지한 곳’이라는 뜻인데 지공(指公)은 인도에서 온 고승으로 그의 제자가 고려말 나옹선사이고 나옹선사의 제자가 무학대사라 한다. 지공증점지(誌公曾点地)’라는 현판으로 국사단의 최초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1855, 1899, 1961년에 중수한 기록이 있으며 현 건물은 2007년 전면 해체 복원되었다.



 



일반적으로 건물은 전(殿)이나 각(閣) 등으로 표현하는데 이 건물만은 단(壇)이라고 표현한 것은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흙이나 돌을 쌓아 만든 터’라는 의미도 있지만 이 가람에서 국사단이 있는 장소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의 전통신앙이 있는 듯 없는 듯 희미한 흔적처럼 모질게 남은 것이 절에서는 가람신을 모시는 곳이다. 국사단은 불교의 것이 아니라 순수 단군민족과 관련이 있는 신앙이라는 점에서 절 안에 두는 것이 불교의 신앙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고 그렇다고 빼버리기엔 사람의 마음을 잡아두는 가람신의 능력이 뛰어났을 것이다. 그래서 절 안이긴 하지만 외각 지대에 배치를 하였을 것이다. 그것도 약간 비켜 앉은 곳으로......


이곳 안내표지에는 『국사단(局司壇)은 국사대신(局司大神)을 모신 단으로서 국사대신은 도량이 위치한 산국(山局)을 관장하는 산신과 토지가람신(土地伽藍神)을 가리킨다. 가야산신인 정견모주(正見母主-깨달음의 어머니)는 하늘의 신 이비가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큰 아들 이진아시왕은 대가야국을, 작은 아들 수로왕은 금가가야국을 각각 건국하였다 한다. 국사대신은 인간세상을 손바닥 보듯이 하면서, 신비스런 현풍(玄風)을 떨쳐 해인사에 재앙을 없애고 복을 내린다. 가람을 수호하는 신을 모셨기 때문에 도량 입구에 배치되었다.』고 적어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