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관술정에서 창원향교 육영재를 만나다.

천부인권 2013. 5. 25. 22:51

 

관술정(觀述亭)은 창원시 의창구 내리동 38-2번지 반룡산 기슭의 군용지 안에 위치해 있어 일반인의 접근은 어렵다. 1985년 1월 23일에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24호로 지정된 관술정(觀述亭)은 몇 번에 걸쳐 방문을 시도했으나 군부대 안에 있기 때문에 이런저런 문제로 인하여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가 이번 제례가 기회가 되어 찾아가게 되었다. 군부대를 통과하고도 제법 먼 거리를 들어가 반룡산(盤龍山, 327.7m) 아래 옛 회산 감씨(檜山甘氏)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던 내리동이 있는 곳으로 갔다. 군부대가 들어서기 전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는 곳으로 당시에는 바다와 산을 오가며 반농반어(半農半漁) 생활을 했다고 한다.

 

2013년 5월 24일(음 4월 15일)에 관술정(觀述亭)에서 창원향교 유림 및 관술정 관련 인사들이 모여 감경인(甘景仁)과 동생 경륜(景倫) 형제에게 제례를 봉행했다. 초헌관은 김종만(金鍾萬), 아헌관에는 안일중(安中一), 종헌관은 김판수(金判守)가 각각 맡았다.

 

 

 

관술정(觀述亭)은 창원향교의 서쪽에 건설된 인재육성 건물인 육영재(育英齋)를 훼철할 때 회산감씨(檜山甘氏) 문중에서 1877년(고종 14)에 인수를 받아 이곳에 옮겨 사용해 오다가 1936년 관술정 뒤편에 삼열사(三烈祠)를 세워 임진난(壬辰亂) 때 충무공 이순신을 도와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오른 감경인(甘景仁)과 동생 경륜(景倫) 형제를 모시고 매년 음력 4월 15일에 유림제(儒林祭)를 지내고 있다.

 

 

감경인(甘景仁 1569∼1648)은 회산(檜山)인으로 자는 여일(如一), 호는 관술정(觀術亭)이다. 1588년(선조 21) 무과에 급제한 무신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종군하여 무공을 세워 여도만호(呂島萬戶)에 올랐다. 이어 내금위(內禁衛)로 전직하여 종 4 품 정략장군(定略將軍)에 오르고, 1604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策錄)되었다. 

 

삼렬당문집에 의하면 1606년 전계신(全繼信) 등과 대마도(쓰시마섬)에 파견되어 도주(島主) 무네 요시토모(宗義智)와의 1년에 걸친 교섭 끝에 그들의 국서(國書)를 고치게 하였고, 귀국하면서 왕릉(王陵)을 훼손한 왜인 2명을 잡아오는 한편 조선의 포로 150여 명을 데리고 오는 공을 세웠다. 죽은 뒤 충훈부(忠勳府)로부터 삼렬(三烈)이라는 사호(詞號)를 받고 삼열사((三烈祠)에 제향 되었다.

 

 

후손 감재원(後孫 甘在元)은 관술정기(觀述亭記)에 이렇게 적었다.

 

관술정(觀述亭)은 우리 선조 삼열당 부군(三烈堂 府君)의 호를 나타낸 것으로 맹자(孟子)의 관수유술지의(觀水有術之義)에서 취(取)한 것이다. 부군(府君)께서는 해악정(海岳亭)의 강열한 정기를 이어받아 천성이 괴위(魁偉)하고 의지(意志)와 절개(節槪)가 강하고 성력이 호쾌하며 힘써 학문하여 글에 능하고 활쏘기와 말 타기를 잘 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아우인 현감공(縣監公)에게 알려 말하기를 ‘우리는 국은(國恩)을 입고서 아직 변변치 못한 공적으로 나라에 보답하지 못하였는데 지금이 우리가 절의를 세울 수 있는 때를 만났다.’하고 드디어 아우와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이충무공(李忠武公) 군영에 가서 선봉(先鋒)되기를 자원(自願)하여 왜적 수급(首級)를 참하니 우리군의 기세가 크게 떨쳤다. 당시 창원은 먼저 적로(敵路)를 당할 때 공은 힘을 다하여 방비하니 홀로 다행히 온전하게 되고 난리가 평정 되었으며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기록되었다. 병오년(丙午年)에 일본국(日本國)에 들어가서 국서(國書)를 바꾸고 릉(陵)을 침범한 적을 조사하여 나포해 돌아와서 서울 고가(藁街)에서 효수(梟首)하였으며 본국(本國) 포로 백여인(捕虜 百餘人)을 데리고 돌아왔다. 인조 갑자년(仁祖 甲子年)에 이괄(李适)이 반역함에 공은 아우와 함께 다시 창의(倡義)하여 도강(渡江)할 때에 노를 치며 맹세해 말하기를 “강물은 도도히 흐르고 절의(節義)는 당당하도다. 장사가 한번 떠남에 충성스럽게 죽는 것이 마땅하리라.”고 하였다. 상주[商州(商山)]에 이르니 이괄(李适)의 난이 평정되었음을 듣고 회군하는 도중에 아우 현감공(縣監公)이 발병하여 위급함에 공이 손가락의 피를 내어서 소생(蘇生)시킬 수 있었다. 을축년(乙丑年)에 부친상을 당하여 죽을 먹고 여묘(廬墓) 삼년을 마쳤고 무진년(戊辰年)에 당시 정치에 궐(闕)함이 많아 팔조(八條)로 진술한 소(疏)를 올렸더니 임금께서 가상히 여기시고 받아들이셨다. 계미년(癸未年)에 모친상을 당할 때에는 공의 연세가 75세인데도 죽을 먹고 여묘함이 한결같이 전상과 같이 하였다.

공이 졸(卒)함에 이르러서는 향도사림(鄕道士林)이 연장(聯章)으로 그 충효를 포창(襃彰)하고 거주하는 마을에 사당(祠堂)을 세울 것을 청하니 조정으로부터 삼열(三烈)이라는 사호(祠號)를 내리시니 그것은 충효우(忠孝友)를 온전히 보존하였기 때문이다. 아! 부군은 세대를 거른 드문 영재로서 일찍이 적개심을 발하여 왕실의 위급(危急)함에 이르러서는 만리(萬里) 밖에서 전대하여 종묘사직(宗廟社稷)과 신인의 분함을 쾌히 씻었다. 연세가(75세) 과도한데도 내간상(內艱喪)의 여묘를 자처하여 모친상을 마쳤으며 손가락을 벤 피로써 죽어가는 아우의 생명을 구했으니 그 충성은 해와 별을 관통하고 효와 우는 신명(神明)에 통했으며 문장은 전아(典雅)하고 도량은 넓고 원대하여 능히 조정에서 보필(輔弼)을 시행할 만 하였으나 졸하였다. 세속을 따라 움직이는 하급관료들은 맡은 바를 진술 할 수 없어 이증(貤贈)의 은전을 입지 못함은 후손의 한이 늘 극함이 있었다. 공의 묘소는 반룡산(盤龍山)의 편편한 곳에 있으나 재실은 아직도 없었다. 더군다나 관술정(觀述亭)은 공 자신을 나타낸 것이다. 곧 당연의 유적지에는 있었으나 옛날의 사적이 있었던 곳이 더욱 장구하게 되고 재변(災變)을 당하게 되어 아득하고 멀어서 기송(起宋)의 무징(無徵)과 같아서 고증(考證)할 수가 없었느니라.

 

삼열당 감경인

<창원시 충의(忠義)의 애국지사 감경인(甘景仁) 장군의 생애와 한시> 고영화(高永和)
관술정(觀術亭) 감경인(甘景仁 1569~1648) 장군은 조선중기 여도만호, 내금위, 정략장군 등을 역임한 경남 창원 출신 무신이다. 본관은 회산(檜山), 자는 여일(汝一), 호는 관술정(觀術亭), 아버지는 감예종(甘禮從)이며, 어머니는 반남박씨(潘南朴氏)로 박종(朴宗)의 딸이고 동생은 감경륜(甘景倫)이다. 1588년(선조 21) 무과에 급제하였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 감경륜(甘景倫)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며, 이순신의 진영에 달려가 공을 세웠다. 1603년(선조 36)에 무과에 급제하여 권관이 되었다. 1606년(선조 39) 도해차관부사과 전계신(全繼信)을 따라 군관으로 일본 대마도에 파견되어 1년간 머물면서 도주(島主) 소 요시토시(宗義智)와 교섭하여 그들의 국서를 고치게 하고, 두 명의 왕릉범(王陵犯)과 다치바나 도모마사(橘智正)을 잡아오는 한편, 잡혀간 포로 150여 명을 데리고 왔고 차관이 왜인과 문답한 내용을 기록한 『문답별록(問答別錄)』과 장계를 가지고 먼저 돌아오는 등 전후 수습에 힘썼다. 이어 내금위(內禁衛)·정략장군(定略將軍)이 되고, 원종공신의 적에 올랐다.
1) 견내량 관방 우음[見乃梁關防偶吟] 3수(三首) / 감경인(甘景仁 1569~1648)
身到關防上 내가 마침내 도착한 관방에서
孤眠夜如年 외롭게 잔 하룻밤이 한해 같은데
披襟時起㘴 흉금을 열고 때맞추어 일어나 앉았더니
窓外月嬋娟 창 밖에 달빛이 곱기도 하구나.
永夜愁難歇 긴긴 밤에는 시름 접기가 어렵다보니
終朝知不明 아침이 다하도록 알아내지 못했는데
漁人無限怨 어부가 한없이 원통하다하니
添我雪千莖 나의 흰머리가 천 개나 더 생기네.
滄海雲千里 창해 바다엔 구름이 천 리이고
山林樹萬行 산과 숲에는 나무가 만 리를 뻗었네.
行人斷復續 길손의 발길이 늘 끊어졌다 이어지니
多少去來情 오가는 정(情) 그 얼마이더냐.

 

●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의병 100여 명을 모아 경상북도 상주에 이르렀으나 이괄이 이미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1628년(인조 6) 상소를 올려 민심을 바르게 하고, 재해에 대비하며, 부역을 관대히 하고, 농상을 권장하며, 군사 장비를 마련하고, 속오를 분명히 하며, 기예를 힘써 익히고, 인재를 등용할 것 등 8가지 일을 진달하였다.
2) 까마귀만 못해 탄식한다[不如烏歎] / 감경인(甘景仁 1569~1648)
까마귀만 못해, 까마귀만 못해
나는 지금 사람들에게 까마귀만 못하다 말하네.
어미 따라 훨훨 날아가는 까마귀만 못하고
어미 따라 까악까악 노래하는 까마귀만 못하고
어미에게 좁쌀을 쪼아 먹이는 까마귀만 못하고
어미에게 벌레를 잡아 먹이는 까마귀만 못하네
까마귀만 못해, 까마귀만 못해
나는 지금 사람들에게 까마귀만 못하다 말하네.
[不如烏不如烏我今人而不如烏飛飛隨母不如烏啞啞呼母不如烏啄粟哺母不如烏拾蟲哺母不如烏不如烏不如烏我今人而不如烏]

 

● 위의 사(詞)에서 알 수 있듯이, 감경인(甘景仁)이 까마귀 새끼가 자라서 어버이에게 먹이를 먹여 주는 일이 있다는 ‘반포지효(反哺之孝)’,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새 ‘자오(慈烏)’, 부모를 봉양할 줄 아는 새 ‘효오(孝鳥)’ 등을 예로 들면서 까마귀를 찬양하며 효행을 무릇 강조하고 있다. 나중에 그 자신도 효행이 드러나, 본도에서 장계를 올려 감경인의 세금과 요역을 면제받기도 했다한다.
1877년(고종 14) 창원향교가 훼철되자 창원 지역 유림에서 서쪽의 육영재(育英齋)를 옮겨다 경상남도 창원시 내리동에 관술정(觀術亭)을 지었는데, 1936년 관술정 뒤에 삼열사(三烈祠)를 지어 감경인과 동생 감경륜을 봉향하였다. 죽은 뒤 충훈부로부터 삼렬(三烈)이라는 사호(祠號)를 받고, 삼렬사에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삼렬당문집(三烈堂文集)』이 있다.
3) 은혜에 감동하여 지은 시[感恩詩] / 감경인(甘景仁 1569~1648)
‘나는 재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분에 넘치게 나라의 은혜를 받았으나, 재능을 다하여 왕의 은혜에는 미처 보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직급과 공훈을 천만 뜻밖에 여러 차례 받았으니 부끄럽고 황송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다. 특별히 부, 조부, 증조부 3대를 추증하는 추작(追爵) 받은 것은 전례에 따르더라도 참으로 특별한 예우였다. 그래서인지 깊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게 되어, 한 절구의 시를 짓는다. 보잘 것 없는 조그마한 정성이지만 만분의 일이나마 보탬이 됐으면 좋으련만.(余以不才濫受國㤙未效涓埃之報而職階勳賞屢及於夢寐之外措躬無地而特追爵父祖曾三代如例眞異數也 感涕之極賦一絶詩庸寓微悃之萬一云爾)’
慇懃聖旨降蓬萊 은근히 임금의 조서(詔書)를 봉래로 내려주니
感激愚腸日九回 나의 창자가 하루에 아홉 번 뒤틀리도록 감격스러웠다.
擢髮雜酬山海渥 머리털을 다 뽑아도 보답하기 어려운 은혜가 산과 바다를 적시니
滿腔忠義夢崔嵬 마음속에 높고 큰 충성과 절의가 가득 차 혼미하여라.

 

● 감경인(甘景仁)의 한문학(漢文學) 소개
경남 창원시 출신인 ‘관술정(觀術亭) 감경인(甘景仁 1569~1648)’ 장군은 조선중기 국난이 빈번한 어지러운 시대를 살았던 원종공신 무인이자, 문학인이었다. 또한 임진왜란(1592~1598), 인조반정(1623년), 이괄의 난(1624년), 정묘호란(1627년), 병자호란(1636년) 등을 겪으며 오직 충의(忠義)에 온 몸과 마음을 쏟았던 애국지사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선생의 한시는 하고픈 말을 담백하게 표현하다보니, 곁가지와 온갖 기예(技藝) 없이 구성되어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런고로 그의 시(詩)는 청절(淸節)하고 운치(韻致)가 있어서 세속에 찌들지 않았고 그의 문(文)은 순정(醇正)하여 속되지 않고 담박(淡泊)하게 늘어놓았다.
그의 『삼렬당문집(三烈堂文集)』에는 한시(漢詩) 몇 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경남 거제시와 통영시 경계인 견내량에서 근무하면서 읊은 견내량관방우음(見乃梁關防偶吟)과 견내량우음(見乃梁偶吟), 견내량 섬에서 해상으로부터 피리소리를 듣다(見乃島上聞笛聲自海上) 등 3편과, 그리고 부(父) 조부(祖父) 증조부(曾祖父) 3대를 추증 추작(追爵) 받아 기뻐서 적은 ‘감은시(感㤙詩)’, 가을날 영도에서 온갖 근심스런 생각을 담은 ‘영도추사(影島秋思)‘ 등이 있고, 사(詞)에는 그의 효성을 대변하는 ’불여오탄(不如烏歎)‘, 소(䟽)에는 ’진시정팔조소(陳時政八條䟽)‘ 등이 있다.
4) 서울로부터 집으로 돌아와[自亰還家] / 감경인(甘景仁 1569~1648)
曉出都門別帝亰 새벽에 도성 문을 나서서 임금의 도읍과 이별하는데
片雲殘月影惸匚 조각구름에 새벽달의 그림자가 그지없이 애태웠네.
漢江江水深千尺 한강 강물의 깊이가 천 길이나 된다 해도
那似今朝去國情 어찌 오늘 아침에 도성 떠난 이내 마음만 하리까.
5) 달천(達川)에 이르러[到達川] / 감경인(甘景仁 1569~1648)
滿目兼葭欲受霜 어지러운 갈대가 눈에 가득한 곳에서 이슬 맞은
寒驢行客暗悲傷 절름발이 나귀 탄 나그네, 남몰래 몹시 슬퍼하누나.
可憐無限沈江骨 가련하다, 힘찬 강물 중심에서 끝없이 잠긴 몸이라,
應共寒波遠恨長 응당 매서운 추위에 멀리 떨어져 있는 한(恨)만 길어지네.

 

● 1628년 인조 6년 9월 30일 인조실록에 따르면, ‘감경인(甘景仁 1569~1648)이 민심을 바르게 하는 일 등의 8개 조목을 진달하다’라는 기사가 있다.
[전(前) 만호(萬戶) 감경인(甘景仁)이 상소하여 민심을 바르게 하고[正民心], 재해에 대비하고[備災害], 부역을 관대히 하고[寬賦役], 농사와 양잠을 권장하고[勸農桑], 무비를 닦고[修武備], 속오군(束伍軍)를 명확히 하고[明束伍], 기예를 힘써 익히고[專技藝], 인재를 등용할 것[用人才] 등 8개 조목의 일을 진달하니, 상이 가납(嘉納)하고, 비국에 내려 행할 만한 일을 채용하게 하는 동시에 그를 상당한 직책에 제수하도록 명하였다.] 당시 임진왜란 후, 피폐해진 백성의 삶으로 인해 민심 이반이 극심한 시기였다. 감경인(甘景仁)은 이러한 전후 사정을 살펴 빠른 국가경제의 복구를 위해 힘썼다.
6) 견내량에서 우연히 읊다[見乃梁偶吟] / 감경인(甘景仁 1569~1648)
生平志願未能成 일생 동안 원하던 뜻 아직 이루지 못했는데
白首今爲將仗兵 이제 백발이 되어서야 군사를 이끌게 되었어라.
幕下功名堪可笑 막하(幕下)의 공명(功名)이 참으로 가소롭지만
時時不耐腹中鳴 때로는 뱃속이 부글거려 견디기 어렵다네.

 

● 삼열사(三烈祠)는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공으로 선무원종공신에 오른 감경인(甘景仁)과 그의 동생 감경륜(甘景倫)을 향사하기 위해 창원시 내리동에 세운 사우(祠宇)이다. 감경인은 죽은 뒤 충훈부로부터 삼열(三烈)이라는 사호(祠號)를 받았다. 1871년(고종 8) 서원철폐령으로 창원향교(昌原鄕校) 서편에 있던 인재육성 건물인 육영재(育英齋)를 훼철하자 회산 감씨 문중에서 육영재를 인수하여 1877년(고종 14) 현재의 자리인 창원시 내리동 회산감씨 집성촌으로 옮겨 관술정(觀術亭)을 지었다. 정자의 이름은 감경인의 호가 관술정인 데서 유래하였다. 이후 회산(檜山)감씨 문중에서는 대대로 관술정에서 감경인과 감경륜의 향사를 모셨으나 사우가 없음을 안타까워하였다. 1927년 관술정 앞에 조선 말기 무신 감재원(甘在元)의 공덕비가 건립되었다. 이에 감재원의 아들로 김해부사를 역임했던 감기현(甘麒鉉)과 회산감씨 문중의 발의로 1936년 관술정 뒤쪽에 삼열사(三烈祠)를 건립하였다. 삼열사에서는 매년 감경인과 감경륜 형제의 향사를 올리고 있으며, 음력 4월 15일에 유림제를 지낸다. 현재 삼열사는 민간인들이 출입할 수 없는 군사 지역에 속해 있으므로 삼열사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창원시 반계동에 있는 군부대에서 허락을 얻어야 한다.
7) 거제부사와 더불어 첨사를 불러들이어 견내량 섬 위에 모였는데, 해상으로부터 피리소리가 들려와서 7언절구(七言絶句)을 읊었다.[與巨濟府使求登僉使會見乃島上聞 笛聲自海上來因吟一絶] / 감경인(甘景仁)
醉倒斜陽見乃秋 취해 쓰러지는 듯한 비낀 햇살 드리운 견내량의 가을날,
雙雙飛去白鷗洲 흰 갈매기 한 쌍이 빈 모래톱에서 날아 사라지는 이때
此中何處孤舟笛 이 중 어느 배에서 외로운 피리소리 들려오는가?
吹送塞聲解客愁 해풍을 타고 변방의 소리 들려오니 모든 수심 사라지네.

 

● 후손(後孫) 감재원(甘在元)은 관술정기(觀述亭記)에 이렇게 적고 있다.
관술정(觀述亭)은 우리 선조 삼열당 부군(三烈堂 府君)의 호를 나타낸 것으로 맹자(孟子)의 관수유술지의(觀水有術之義)에서 취(取)한 것이다. 부군(府君)께서는 해악정(海岳亭)의 강열한 정기를 이어받아 천성이 괴위(魁偉)하고 의지(意志)와 절개(節槪)가 강하고 성력이 호쾌하며 힘써 학문하여 글에 능하고 활쏘기와 말 타기를 잘 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아우인 현감공(縣監公)에게 알려 말하기를 ‘우리는 국은(國恩)을 입고서 아직 변변치 못한 공적으로 나라에 보답하지 못하였는데 지금이 우리가 절의를 세울 수 있는 때를 만났다.’하고 드디어 아우와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이충무공(李忠武公) 군영에 가서 선봉(先鋒)되기를 자원(自願)하여 왜적 수급(首級)를 참하니 우리군의 기세가 크게 떨쳤다. 당시 창원은 먼저 적로(敵路)를 당할 때 공은 힘을 다하여 방비하니 홀로 다행히 온전하게 되고 난리가 평정 되었으며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기록되었다. 병오년(丙午年)에 일본국(日本國)에 들어가서 국서(國書)를 바꾸고 릉(陵)을 침범한 적을 조사하여 나포해 돌아와서 서울 고가(藁街)에서 효수(梟首)하였으며 본국(本國) 포로 백여인(捕虜 百餘人)을 데리고 돌아왔다. 인조 갑자년(仁祖 甲子年)에 이괄(李适)이 반역함에 공은 아우와 함께 다시 창의(倡義)하여 도강(渡江)할 때에 노를 치며 맹세해 말하기를 “강물은 도도히 흐르고 절의(節義)는 당당하도다. 장사가 한번 떠남에 충성스럽게 죽는 것이 마땅하리라.”고 하였다. 상주[商州(商山)]에 이르니 이괄(李适)의 난이 평정되었음을 듣고 회군하는 도중에 아우 현감공(縣監公)이 발병하여 위급함에 공이 손가락의 피를 내어서 소생(蘇生)시킬 수 있었다. 을축년(乙丑年)에 부친상을 당하여 죽을 먹고 여묘(廬墓) 삼년을 마쳤고 무진년(戊辰年)에 당시 정치에 궐(闕)함이 많아 팔조(八條)로 진술한 소(疏)를 올렸더니 임금께서 가상히 여기시고 받아들이셨다. 계미년(癸未年)에 모친상을 당할 때에는 공의 연세가 75세인데도 죽을 먹고 여묘함이 한결같이 전상과 같이 하였다.
공이 졸(卒)함에 이르러서는 향도사림(鄕道士林)이 연장(聯章)으로 그 충효를 포창(襃彰)하고 거주하는 마을에 사당(祠堂)을 세울 것을 청하니 조정으로부터 삼열(三烈)이라는 사호(祠號)를 내리시니 그것은 충효우(忠孝友)를 온전히 보존하였기 때문이다. 아! 부군은 세대를 거른 드문 영재로서 일찍이 적개심을 발하여 왕실의 위급(危急)함에 이르러서는 만리(萬里) 밖에서 전대하여 종묘사직(宗廟社稷)과 신인의 분함을 쾌히 씻었다. 연세가(75세) 과도한데도 내간상(內艱喪)의 여묘를 자처하여 모친상을 마쳤으며 손가락을 벤 피로써 죽어가는 아우의 생명을 구했으니 그 충성은 해와 별을 관통하고 효와 우는 신명(神明)에 통했으며 문장은 전아(典雅)하고 도량은 넓고 원대하여 능히 조정에서 보필(輔弼)을 시행할 만 하였으나 졸하였다. 세속을 따라 움직이는 하급관료들은 맡은 바를 진술 할 수 없어 이증(貤贈)의 은전을 입지 못함은 후손의 한이 늘 극함이 있었다. 공의 묘소는 반룡산(盤龍山)의 편편한 곳에 있으나 재실은 아직도 없었다. 더군다나 관술정(觀述亭)은 공 자신을 나타낸 것이다. 곧 당연의 유적지에는 있었으나 옛날의 사적이 있었던 곳이 더욱 장구하게 되고 재변(災變)을 당하게 되어 아득하고 멀어서 기송(起宋)의 무징(無徵)과 같아서 고증(考證)할 수가 없었느니라.
8) 영도의 ‘가을철 사념’[影島秋思] / 감경인(甘景仁 1569~1648)
影島西風倚脫檣 영도에 서풍이 불어오면 돛대를 풀어 놓는데
海天愁思正茫茫 바다 위 하늘이 근심스러워 정히 아득해지구나.
聖代分符憂獨任 성대(聖代)에는 수령들이 병부를 나누어 맡아 애태우지만
殘年垂緩意堪傷 남은 여생동안 상처를 치유하며 천천히 베풀어야지.
畵角聲中山日暮 뿔 나팔 소리 속에 산의 해가 저물어가니
綠琴絃上水雲長 녹금(綠琴)의 줄 위에 안개가 계속 피어오르네.
遙望蓬萊何處是 봉래가 어디쯤인가? 멀리 바라보다가
手搴汀菊獨彷徨 물가의 국화를 뽑아들고 홀로 서성이누나.

 

[주1] 분부(分符) : 왕에게 부절(符節)을 나눠 받았다는 뜻으로 보통 군현(郡縣)의 수령을 뜻하는 말이다.
[주2] 녹금(綠琴) : ‘녹색의 거문고’ 라는 뜻이다. 푸르른 숲이 내는 아름다운 소리를 거문고 소리에 비유한 것이다. 사마상여가 탁문군을 유혹할 때 사용했던 거문고를 의미하기도 한다.
[주3] 수운(水雲) : 수운은 수운향(水雲鄕)의 준말로, 안개가 피어오르는 곳. 은자(隱者)가 사는 청유(淸幽)한 지방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