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들/향교와 뿌리

김해향교에서 무너진 우리 정신을 생각한다.

천부인권 2014. 2. 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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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1 김해 분산성에서 본 김해향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17호인 김해향교(金海鄕校)는 김해시 호계로543번길 20-5(대성동 224)에 위치한다. 김해향교가 있는 이곳의 지명은 조선시대에는 교동(校洞)이었으나, 1947년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대성정(大成町)으로 개명을 하여 지금은 대성동(大成洞)이라 불린다.

서울에 성균관이 있는 마을 지명은 명륜동으로 성균관의 교육공간인 명륜당(明倫堂)에서 이름이 유래한 것처럼 지방에는 학교를 뜻하는 교동이 있는 곳엔 분명 향교(鄕校)가 있다.

대성전은 五聖(공자자사증자맹자안자), 공문십철(孔門十哲), 송조6(宋朝六賢), 우리나라 18(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제사 공간이다. 일제가 김해의 교동을 대성정(大成町)으로 지명을 바꾼 것은 직접 교육을 통해 정신이 계승 되는 학교라는 뜻을 지닌 교동보다는 제사라는 형식만 존재하는 대성전을 부각함으로써 조선의 정신과 민족의 정기가 사라졌다는 것을 일깨워 주기위해 지명을 바꾸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해 본다.

 

1966년 육천 안붕언(育泉 安朋彦)선생이 쓴 김해향교중수기(金海鄕校重修記)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지방의 향교는 학궁(學宮)이고, 공자(孔子)는 성인이라 천하가 제사(祭祀)를 지내는 사람이다. 따라서 향교는 인재를 키우는 강독(講讀)을 하면서 춘추(春秋)에 석채(釋菜)로 제사를 상례(常禮)로 지냈다.

그러나 세교(世敎)가 쇠퇴(衰退)하여 제향(祭享)은 봉해 졌지만 강독(講讀)은 마을 글방이 대행하게 되었다. 글방은 작으나 천하의 이치를 배우고 각자의 기풍(氣風)을 세웠으며, 세상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선성(先聖)의 도()를 알았다.

그런데 신식학교(新式學校)가 일어나 글방이 사라지니 사람들이 금수(禽獸)의 세계로 들어가 구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 학교교육은 과목(科目)도 많고 술()도 정밀함을 알겠지만 인도(人道)를 닦을 줄 모르니 그 폐단(弊端)이 극심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마을 글방으로는 대안이 되지 못하니 결국 전국에 234개소가 있는 향교가 학문(學問)을 강설(講說)해야 할 것이다. 사람이 금수의 세계로 갈 수 없으니, 옛 향교의 규모(規模)만은 못하겠지만 농한기(農閑期)에 고을의 자제를 불러 모아 깨우치고, 신식학문을 배운 학생들은 겨울·여름 휴가기(休暇期)에 청강(聽講)하게 할만하다.[이하 생략]

 

 

우리가 배우고 있는 현재의 학문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신의 영역에 점점 다가가고 있지만 신의 영역에 다가갈수록 인간성은 파괴되고 더 외로운 존재가 되어간다. 이는 인간이 인도(人道)는 모르고 물질만능의 세계를 지향(志向)함에 따라 정신세계가 황폐(荒廢)해 진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다.

 

 

 

 

 

 

<김해향교 유림회관 전경>

 

김해읍지(金海邑誌)에 의하면,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0(선조 33) 부사 정기남(鄭奇男)이 김해읍 동쪽 다전동에 대성전을 중건하였고 인조 초기 동서무와 남루(南樓)가 건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그 후 1683(숙종 9) 향교 뒷산이 사태로 무너지자 1688(숙종 14)에 지방 유림 김후수(金後修)와 부사 이행익(李行益)이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대성전과 동무서무를 건립하였고 그 이듬해에 동재(東齋)서재(西齋)를 건립하였다.

1693년 부사 이하정(李夏禎)이 명륜당과 남루를 중건하였으며 1769(영조 45) 소실되자 이듬해 재건하였다. 1880(고종 17)에는 김익성(金益成)이 중수하였고 1887년에는 교궁(校宮)을 보수 및 단청하였으며 내삼문(內三門)도 수리하였다. 1904년 군수 이근홍(李根洪)이 중수하였고 1972년에는 대성전과 명륜당·삼문(三門), 1975년에는 서무를 보수하였다.

 

 

 

 

 

 

김해향교 앞에는 향교의 일을 처리하고 유림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 현대식 유림회관이 있고, 향교건물 배치 형식은 일직선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직렬형 배치를 하고 있으며, 정문 앞에 담장을 둘러 마당을 만들고 입구에 홍살문을 세웠다.

입구에 붉은 창을 세운 홍살문(紅箭門)은 사악한 기운을 물리쳐 유생들이 공부를 잘 하고 성현의 뜻을 받들 수 있기를 바라는 풍수적 기능을 한다. 창의 가운데에는 음양을 뜻하는 둥근 삼태극(三太極)을 그렸고 그 위에 군기(軍旗)의 일종인 당파창(鏜鈀槍)으로 불리는 삼지창을 세워 나쁜 기운이 근접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따라서 이 문을 출입하는 사람들은 이곳에 경의를 표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2010/8/24 김해향교 은행나무>

 

홍살문을 들어서면 마당 우측에 오래된 은행나무가 둥근 단위에 세월을 지키고 있는데 은행나무를 심은 이유는 은행나무에 열매가 많이 열리듯이 성현을 기리는 제자들이 은행나무의 열매처럼 많이 열리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홍살문을 지나면 꽤 너른 마당을 마주하고 김해향교의 외삼문(外三門)인 풍화루가 세워져 있다. 풍화루(風化樓)풍속(風俗)을 교화(敎化)하는 집 또는 교육(敎育)과 정치(政治)의 힘으로 풍습(風習)을 잘 교화(敎化)시키는 곳.’이란 뜻이 담긴 글이다. 풍화루는 유생이 사색(思索)도하고 어울려 놀 수 있도록 정면3, 측면2칸의 중층누각 건물로 상층은 정자역할을 하면서 하층은 대문 구실을 하도록 건설되었다. 아래층의 기둥은 오랜 세월을 지탱할 수 있도록 110cm정도 높이의 돌로 만들었다.

 

 

 

 

<2010/8/24 김해향교 명륜당>

 

우리나라는 우측통행을 하는 것이 예법이라 풍화루(風化樓) 아래로 들어 갈 때에는 세 개의 문 중 동쪽 입구로 들어가야 한다. 이를 동입서출(東入西出)’이라는 용어로 정리하지만 모든 통행은 우측통행만 하면 된다. 풍화루를 들어가면 마당 너머 정면에 강학 공간인 명륜당이 마주한다. 명륜당(明倫堂)은 정면 5,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지붕 와가이다. 좌우 양쪽은 방이며 가운데는 마루로 되어 있다.

2007322일에는 새벽 4시경에 전기 과열로 인해 '명륜당' 건물 68.55를 태우고 출동한 소방차량에 의해 20여분 만에 진화되었다. 이 화재는 당시 노무현대통령에게 보고되어 복구비 54천여만 원을 투입하여 이듬해 919일에 복원을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10//8/24 김해향교 서재>

 

명륜당 좌우에는 동·서재가 마주하고 있으며, 자연초석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웠으며 정면 4, 측면 2칸으로 앞은 대청마루이고, 뒤는 방으로 꾸몄으며, 맞배지붕이다.

 

 

 

 

<김해향교 동재>

 

동재 앞에는 제기 등을 넣어 두는 창고가 있고 담장으로 통하는 협문을 지나면 관리사가 있다.

 

 

 

 

 

대성전으로 가기 위해 명륜당 뒤쪽을 가니 벽면 두 곳이 튀어나와 있고 그 아래에는 방을 따뜻하게 하는 아궁이가 만들어져 있다. 벽면의 튀어나온 곳은 방 안쪽에서는 물건을 넣어 두는 붙박이 장롱 같은 구실을 하는 곳으로 밖에서는 비가 올 때 아궁이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구실을 한다. 창원향교에도 예전에는 이런 구조가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졌다.

 

 

 

 

 

대성전으로 향하는 내삼문을 오르는 곳은 좌우에 계단이 있고 신도(神道)라 말하는 정문 쪽에는 계단이 없다.

 

 

 

 

 

<김해향교 내삼문>

 

 

 

 

내삼문을 들어서면 마당 너머 대성전이 마주하는데 정면 3, 측면 3칸의 단층 건물로 2익공양식(二翼工樣式)의 맞배지붕집이다. 대성전을 오르는 계단은 정면에 어울리지 않는 신식 계단이 신도의 역할을 하고 제관들이 이용하는 계단은 좌우측면에 만들어졌다. 대성전은 오성(五聖[공자자사증자맹자안자]) 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2010/8/24 서무>

 

동무(東廡서무(西廡)는 송조2(宋朝二賢), 우리나라 18(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제사 공간으로 각각 정면 4칸 측면 2칸인 맞배지붕이다.

 

서무(西廡)에는 휘국공 주희(徽國公 朱熹), 문창공 최치원(文昌侯 崔致遠), 문충공 정몽주(文忠公 鄭夢周), 문헌공 정여창(文獻公 鄭汝昌), 문원공 이언적(文元公 李彦迪), 문간공 성혼(文簡公 成渾), 문열공 조헌(文烈公 趙憲), 문정공 송시열(文正公 宋時烈), 문순공 박세채(文純公 朴世采)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동무(東廡)에는 예국공 정호(豫國公 程顥), 홍유후 설총(弘儒候 薛聰), 문성공 안유(文成公 安裕), 문경공 김굉필(文敬公 金宏弼), 문정공 조광조(文正公 趙光祖), 문순공 이황(文純公 李滉), 문성공 이이(文成公 李珥), 문원공 김장생(文元公 金長生), 문성공 김집(文成公 金集), 문정공 송준길(文正公 宋浚吉)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함안 민속박물관과 향교

 

영산 향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13호)

 

곤양향교(경남 유형문화재 제221호)를 찾아서

 

고성향교에서 마을 이름을 생각해본다.

 

창원향교 풍화루를 찾아보니

 

창원향교의 교육 공간인 명륜당과 동·서재

 

김해향교에서 무너진 우리 정신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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