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1 통영 충렬사 주차장에서 본 모습>
통영시 여황로 251(명정동 1173)에 가면 충무공 이순신장군(忠武公 李舜臣將軍)을 향사(鄕祠)하는 1973년 6월 11일에 사적 제236호로 지정된 통영 충렬사(統營 忠烈祠)을 만난다.
경남교원지 충렬사 편에 의하면 『충렬사는 임진왜란이 끝난 지 7년 후인 선조 39년(1606)에 이운룡 통제사(李雲龍 統制使)가 충무공의 위훈(偉勳)을 기리고 추모(追慕)하기 위하여 왕명에 의하여 건립하였고, 그 뒤 현종(顯宗)께서 이 충렬사(忠烈祠)를 사액(賜額)하셨는데 글씨는 문정공 송준길(文正公 宋浚吉)이 쓰셨고, 그 뒤 현종 11년 경술(庚戌, 1670)에 제51대 통제사 김경(金鏡)이 동·서재(東·西齋)를 중수(重修)하고 숙종 20년 갑술(肅宗 20年 甲戌, 1694) 최숙(崔橚) 제70대 통제사가 경충재(景忠齋)를 증축(增築)하여 서당(書堂)을 개설(開設)하였고 숙종 44년 무술(肅宗 44年 戊戌,1718) 제71대 김중기(金重器) 통제사가 숭무당(崇武堂)을 창건하여 장교3인을 차출하여 전곡관리사무(典穀事務管理)를 집행토록 하는 한편 통영군 산양면 연대도(煙台島)를 사패지(賜牌地)로 받았다. 정조 19년 을묘(正祖 19年 乙卯,1795)에 왕께서 충무공 전서를 발간하고 충렬사(忠烈祠)에 어제제문(御製祭文)을 하사(下賜)하셨고, 고종 6년 기사(高宗 9年 己巳,1869) 대원군(大院君)이 전국에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을 내릴 때도 충렬사만은 유일하게 보존(保存)토록 하였다.
현재 충렬사는 사당을 비롯하여 동재, 서재, 경충재, 숭무당, 내삼문, 중문, 외삼문, 정문, 강한루, 전시관, 비각 6동, 관리사무실, 고직사(庫直舍), 화장실 2동, 매표실, 기념물 매점 등 23동으로 되어 있으며, 경역(境域)은 2,743평으로 역사를 말해주는 동백은 수령 400년, 느티나무는 수령 300년을 넘어 충무공의 충절을 대변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어 현지에 세워진 안내표지판과는 년도가 1년 차이가 있다.
이후 1895년 통제영이 폐지되자 고장의 유지들이 충렬사보존회를 결성하여 충무공의 제사를 모시며 충렬사를 관리하고 있다.
충렬사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통영 충렬사에 들어가기 전에 홍살문(紅箭門)을 만난다. 홍살문은 붉은 색의 두 기둥을 세우고 위쪽기둥과 기둥사이에 2개의 나무로 연결한 후 하늘을 향한 창살을 꽂아 두었는데 중앙에 있는 창살의 목 부분은 태극문양을 붙이고 그 위에 삼지창을 세웠다. 우리 선조들은 붉은 색이 태양을 뜻하므로 사악한 기운을 쫓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동지(冬至)에는 붉은 팥죽을 끓여 나쁜 기운이 들어오는 대문이나 장독 등에 뿌려 액운을 막고자 하는 풍속을 이어오고 있다.
홍살문(紅箭門)은 임금이 충신, 효자, 열녀들을 표창하여 그 집이나 마을 앞, 또는 능(陵), 원(園), 묘(廟), 궁전(宮殿), 관아(官衙), 향교, 사찰의 금강문과 천왕문, 종각, 정려각, 비각, 민가의 솟을 대문 등에 세우도록 한 붉은 門으로 악귀를 쫓는 풍수적 기능을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삼지창은 당파창(鏜鈀槍)이라고도 하는 전쟁 때 쓰는 군기(軍旗)의 일종으로 주로 무당들이 굿을 한 후 돼지 머리 등을 삼지창에 꽂아 쓰러지지 않아야 정성이 제대로 들어간 굿이라 믿는데 이는 나쁜 기운이 접근하지 못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면서 이 문을 출입하는 사람들은 경의를 표하라는 뜻이 담겨있다.
홍살문 앞에는 계단이 있는데 시인 백석이 통영 명정골에 산다는 이화여고에 다니던 ‘난’이라는 분을 만나러 왔다가 만나지 못하고 이 계단에 앉아 「통영(統營)」이라는 시를 지었다고 이 싯구에 적었다. 맞은편 작은 공원에는 백석의 시비가 세워져 있고 그 맞은편에는 명정샘이 지금도 자리하고 있다.
계단을 오르면 충렬사 담장과 연결 된 대문인 첫 번째 외삼문을 만나게 된다. 이 대문의 좌우는 사무실과 매표소로 사용하는 곳으로 이곳에서부터 문정공 송준길(文正公 宋浚吉)이 쓰신 현판을 만나게 된다.
첫 번째 문을 지나 우측에는 이순신장군의 충절이 동백꽃이 되어 핏빛처럼 뚝뚝 떨어 질것 같은 경상남도 기념물 제74호인 통영 충렬사(統營 忠烈祠) 동백(冬柏)나무를 만난다.
정면에 보이는 강한루(江漢樓) 우측에는 저절로 난 것인지, 누군가가 심은 것인지 모르지만 1982년 9월 20일에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둘레는 2.5m, 수고는 17m, 수령은 170년 되는 느티나무를 보게 된다.
또 다른 문 구실을 하는 강한루(江漢樓) 아래 출입구 중앙에는 ‘지자총통’과 ‘현자총통’을 놓아 두어 사람들에게 총통도 구경하고 우측통행을 하라는 암시를 하고 있다.
강한루(江漢樓)의 안내판에는 『1840년 제172대 통제사 이승권(李承權)이 여기 누각(樓閣)를 지었을 때 시인 강위(姜偉)가 경승지 통제영과 이충무공의 위업을 이 강한(江漢)의 고사에 연관 지어 강한루라 이름 하였다고 전해진다.』고 적고 아래에 강위(姜偉)의 시(詩)를 적었다. 이 누각은 1913년 큰비로 인해 파손된 것을 1988년 전형적인 조선의 팔작지붕 양식으로 복원 하였다.
試溯神仙夢(시소신선몽) 물길 거슬러 신선의 꿈 아렸더니,
重開漢上襟(중개한상금) 강한루 다시 올라 흉금을 활짝 연다.
孤月行天遠(고월행천원) 외로운 달 먼 하늘 떠가고,
衆流到海深(중류도해심) 개울물 모두 흘러 깊은 바다로 가는 구나.
逢人問古地(봉인문고지) 사람 만나서 옛 땅 물어보고,
對酒憐初心(대주련초심) 술 나누는 첫 마음 애련도 하여라.
충렬사당재(忠烈祠堂在) 여기 충렬사 있어,
天涯已再尋(천애이재심) 찾아온 지 벌써 두 번째렸다!
강한루의 반대쪽에는 영모문(永慕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영모문(永慕門)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길을 그리워하는 문”이라는 뜻인데 아마도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택하신 충절의 길을 후대 사람들이 그리워하라는 의미인 것 같다.
홍살문과 관리사의 외삼문을 지나 강한루 아래를 통과하면 진짜 충렬사 외삼문을 만난다. 외삼문(外三門) 좌우에는 비각이 줄지어 서있어 담장구실을 하여 외삼문을 통과해야만 내부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외삼문 입구 좌측에는 또 다른 보호수가 있는데 지정일은 1982년 9월 20일로 나무둘레는 4.2m, 수고는 13m, 수령은 300년 된 느티나무가 역시 식수를 한 것인지 저절로 씨앗이 날아와 자란 것인지 모른 채 서있다.
계단을 올라 만나는 외삼문에도 역시 문정공 송준길(文正公 宋浚吉)이 쓰신 현판을 만나게 된다.
외삼문의 좌측 첫째 비각에는 1974년 12월 28일에 지정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3호인 충렬묘비(忠烈廟碑)가 세워져 있다. 묘(廟)는 사당을, 비명(碑銘)은 비에 새긴 글을 말하는데 장군의 공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광해군이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에게 명을 내려 1614년 글을 짓게 하고, 1681년(숙종 7)에 제60대 통제사 민섬(閔暹)이 비와 비각을 여기에 세웠다. 비문의 끝 부분에는 우암 송시열(宋時烈)선생이 묘비를 세우게 된 경위를 기록했고, 비석의 위쪽 ‘통제사충무이공충렬묘비명(統制使忠武李公忠烈廟碑銘)’이라 쓴 글씨는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선생이 전서체(篆書體)로 적었다.
이 비석 건립에 참여한 인물들을 보더라도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맞아 나라와 민족의 혼을 지킨 영웅에 대한 추모의 뜻이 담겨 있다. 그 내용은 이순신장군의 무훈과 충절에 대한 것이라 임진왜란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사료가 된다.
그 외 ‘덕수이씨 후손 통제사 공적비’와 ‘제111대 통제사 이언상 사적비’, ‘제70대 통제사 최숙 사적비’, ‘제7대 통제사 이운룡 기적비;, ’제5대 통제사 유형 기적비‘ 등이 세워져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숭무당(崇武堂)과 경충재(景忠齋)가 마당을 두고 마주보고 있는데 제70대 통제사 최숙(崔橚)이 건립한 건물들로 조선수군장교 3명이 상주하여 제위(祭位)전답과 사무를 관리하던 곳이다.
숭무당의 기둥의 주련은 이렇게 걸려있다.
天日成盟草木知(천일성맹초목지)하늘에 맹세하니 초목도 아는도다.
閣上麒麟圖像肅(각상기린도상숙)기린각에 그린모습 엄숙도 한데
鼓邊蝌蚪鐫名休 (고변과두전명휴)북가에 새긴 이름 아름답고
江山不息英雄氣(강산불식영웅기)강산에는 영웅기상 끊임이 없도다.
江漢悠悠忘千秋欲慕風風 (강한유유망천추욕모풍풍)강한은 유유히 천년을 흐르고 경모하는 마음은 쉼 없는 바람이어라
경충재(景忠齋)는 이 지방 청소년 들에게 학문과 충의를 가르치던 강당으로 충렬서원이라 불렀다. 1864년 서원철폐령에도 존속되었던 유서 깊은 서원이다.
경충의 기둥에는 이런 주련이 걸려 있다.
閑山島夜吟(한산도야음)
水國秋光暮 (수국추광모)바다(한산도?)에 가을빛이 저문데
驚寒雁陣高 (경한안진고)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떼는 높이 나는구나.
優心輾轉夜 (우심전전야)나라근심에 잠 못 이루는 밤에
殘月照弓刀 (잔월조궁도)새벽달은 활과 칼을 비치누나.
숭무당과 경충재를 뒤로 하고 중문(中門)을 바라보니 좌우에 태산목이 호위를 하듯 높이 솟아 있다. 중문은 외 협문(夾門)이다.
중문을 통과하니 다시 마당을 마주하고 동재와 서재가 있는데 제51대 통제사 김경(金鏡)이 1670년에 건립한 것이다. 동재는 헌관(獻官)과 집사(執事)들이 향사를 봉행하기 전 심신을 정화(淨化)하고 제복을 갈아입는 공간이다. 주련에는 이렇게 적었다.
盟山草木知(맹산초목지)산에 맹세하니 초목들이 알고
誓海漁龍動(서해어룡동)바다에 맹세하니 고기와 용들이 감동한다.
창원시 진해구 남원로터리에 가면 백범 김구 선생이 이순신장군의 진중음의 일부인 위 주련과 같은 글귀를 비갈에 새겨 두었다.
서재는 제례용 음식을 장만하고 제구(祭具)를 보관하는 곳으로 거북선 모형과 장계의 내용 등이 걸려 있다.
동·서재를 지나고 정당(正堂)으로 향하는 가장 안쪽에 내삼문(內三門)이 자리를 하고 있다. 단아하면서도 정교한 건축양식은 조선중기 삼문조형(三門造形)의 정화(精華)로 신문(神門)의 양쪽 초석을 해태로 조각하고 안팎에 활주(버팀기둥) 8개로 지붕의 무게를 받쳤다. 내삼문의 양쪽 협문을 낮게 만들어 몸을 낮추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도록 했는데 이는 참배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몸을 낮추라는 의미이다.
내삼문의 안쪽 좌우에는 은행나무가 높이 솟아 있는데 두 그루다 숫나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은행나무는 암수딴그루인 나무로 암나무에만 열매가 열리는데 열매가 익어 떨어지면 고약한 냄새가 나므로 열매가 없는 숫나무만 심었다 한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이충무공 한분만의 위패를 모신 정당(正堂)이 나온다. 이곳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영령에 제향을 올리고 공의 정신과 위훈을 만대에 기리기 위하여 제7대 이운룡(李雲龍) 통제사가 선조(宣祖)의 명을 받아 세운 곳으로 300년간 제향을 받든 신성한 곳이다.
정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맞배지붕으로 1606년에 창건되었고, 후원은 충절을 상징하는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기와지붕의 용마루에 새긴 주역 팔괘(周易 八卦)는 음양의 조화와 만물이 화생하는 역(易)리의 원리를 담고 있으며, 제의(祭衣)는 정통 유교의 법식을 고수한다.
1895년 통제영이 폐영되어 관급(官給)이 끊어지고,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여 제사를 받드는 주체가 없어지자 지방민들이 1919년 독립운동을 계기로 충렬사영구보존회를 결성하여 제향의 맥을 이어왔으나 일제강점기 때 왜경이 장군의 위폐를 칼로 부수고, 삼문의 태극문양에 일장기로 덧칠을 하고, 정당에 못질을 하여 제사를 올리지 못하도록 수난을 겪기도 했다.
정당 좌우에는 명나라 진린도독이 이충무공을 찬양한 어록의 한구절인 “욕일보천지공(浴日補天之功)”과 “서해어룡동(誓海魚龍動) 맹산초목지(盟山草木知)”에서 따온 예서체의 대가 신관호(申觀浩) 제187대 통제사가 남긴 휘필이 있다.[출처:안내표지판]
이 글씨는 문에 가려져 사진으로 남기지 못했다.
400년이나 지난 충렬사 정당 지붕에는 오래된 기와에 서식하는 와송(瓦松)이 한 송이도 없는 것이 특이했다. 그리고 정당 좌우에 스스로 향을 내는 금목서를 심어 꽃이 필 때면 사람이 향을 피우지 않아도 향이 날 수 있도록 배려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중국에게 배워야 하는 것은 향을 판매하여 소득을 올리는 것은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수키와의 막새에는 조선왕조의 상징인 오얏꽃 문양을 새겼다. 그런데 요즘 바꾼 기와는 다양한 문양을 사용했다. 이왕이면 옛 정통을 살렸으면 한다.
400년 전에 깔아 둔 충렬사 정당 마당의 돌에는 네 개의 구멍이 뚫린 돌이 있는데 이 구멍들은 제례를 지낼 때 기둥을 세워 천막 등을 치기 위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뚜껑을 닫은 구멍이 하나 더 있는데 이것은 제문을 태우기 위해 만든 망료위이다.
<충렬사 정당의 건축은 하나하나가 다 눈길이 가고 예사롭지 않는 것이 없다.>
처마의 서까래에는 나무 도르래를 달아 천을 펼치고 접을 때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정조 19년 을묘(正祖 19年 乙卯,1795)에 왕께서 충무공 전서를 발간하고 충렬사(忠烈祠)에 어제제문(御製祭文)을 하사(下賜)했다.
<영정이 모셔진 정당 내부 모습>
<각각의 문에 걸려 있는 충렬사 현판>
<건축물 마다 걸려 있는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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