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김해 분산성 만장대와 충의각

천부인권 2014. 1. 29. 09:17

 

 

<2009/8/22 김해 사충단에서 바라본 모습>

 

경상남도 김해시 가야로405번안길 210-162(어방동 산9번지)에 위치한 분산성(盆山城 : 323m)은 사적 제66호로 높은 산은 아니지만 산성의 정상인 봉화대에 서면 김해시내는 물론이고, 김해평야와 낙동강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분산성은 산의 정상부에 띠를 두르듯이 돌로 쌓은 테뫼식산성으로 고려 우왕 3(1377) 부사 박위(府使 朴葳)가 왜구를 막기 위해 이전부터 있던 고산성(故山城)을 보수하고 축성하였는데, 이후 1871(고종 8) 김해부사 정현석(金海府使 鄭顯奭)이 개축하여 별장(別將)을 두었다. 분산성은 해안 방어의 요충지에 위치하면서 읍치와 인접하여 유사시 고을을 수호할 수 있는 이점을 지니고 있어서 이 시기 개축한 것이다.

 

 

 

 

 

‘1872년 지방도’ ‘분산산성지도(盆山山城地圖)’에는 성곽 내부는 물론이고 김해 경계의 지명과 거리 등이 적혀 있어 당시의 분산성을 이해할 수 있다. 성곽의 내부에는 진아(鎭衙)를 비롯하여 창고, 우물과 연못, 그리고 숯과 소금을 보관했던 탄교(炭窖), 염교(鹽窖) 등도 그려져 있다. 성의 남쪽에는 타고봉(打鼓峯)이 있는데, 여기에는 북을 달아 놓고 유사시 이 북을 쳐서 부민(府民)들에게 알려 이 성으로 피난하도록 했다고 전했다. 고을의 남쪽 해안에 있는 죽도(竹島)는 이 고을의 관문(關門)으로서 수진군기(水陣軍器)가 들어서 있는데 전선과 병선, 각종의 무기류가 보관되어 있었다.

분산산성지도(盆山山城地圖)’에 명기된 지명과 내용은 아래와 같다.

가덕진(加德鎭), 군기(軍器), 군기고(軍器庫), 금정산성(동래)(金井山城(東萊)), 나전현(羅田峴)

, 가락면(洛駕面), 남산(南山), 암문(南暗門), 남역(南驛), 남포(南浦), 산면(菉山面), 대산면(大山面), 대해(大海), 덕도(德島), 덕산역(德山驛), 동문(東門), 만장대(萬丈臺), 명지도(鳴旨島), 모암(母菴), 물금진(勿禁津), 백운암(白雲菴), 봉대(烽臺), 부성(府城), 북문(北門), 산산창(蒜山倉), 삼랑진(三浪津), 삼차강(三叉江), 상동면(上東面), 생림면(生林面), 서림사(西林寺), 서문(西門), 선암진(仙巖津), 수진(水陣), 염교(鹽窖), 유등면(柳等面), 유민산(裕民山), 율리면(栗里面), 율현(栗峴), 은해사(恩海寺), 전병선(戰兵船), 전산(前山), (), (), (), (), 죽도(竹島), 중북면(中北面), (), (), (), 진아(鎭衙), (), 초선대(招仙臺), 칠산면(七山面), 칠점산(七點山), 타고봉(打鼓峯), 탄교(炭窖), 하동면(下東面), 하북면(下北面), 해창(海倉), 화약고(火藥庫), 활천면(活川面) [출처 : 1872년 지방도, 분산산성지도 해제]

 

 

 

 

<2014/1/27 해은사 풍경>

 

김해시는 150억 원의 사업비를 투자할 분산성 종합정비계획을 수립하고 2000년에 착공하여 성곽 923m408m를 복원했고, 봉수대도 복원 완료했으며, 2015년에는 전체 완공예정을 하고 있다. 현재 김해시 내에서는 분산성의 웅장한 모습을 볼 수 있어 이미 명물이 되었다.

분산성 남쪽에는 봉수대(烽燧臺)와 만장대(萬丈臺)가 있고, 옛 진아(鎭衙) 자리에는 충의각(忠義閣)이 있으며, 해은사(恩海寺)는 분산산성지도(盆山山城地圖)에 표기된 그 위치에 현재에도 있다.

 

 

 

 

20098월에 한번 방문한바있는 이곳 분산성을 2014127일 다시 방문하게 된 것은 예전의 사진 자료가 사라져 다시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서였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북문지 방향에서 서문 방면으로 성곽을 따라 걸었다. 분산성으로 들어가는 곳 입구에는 안내표지판과 사적 제66호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성 돌이 허물어진 것 같은 30m의 옛 성곽 보존구간을 보면서 인간의 힘만으로 이처럼 엄청난 공사를 했다는 것에 경외심과 더불어 극한의 고통을 감수했을 민초들의 수난을 떠올려 보게 된다.

 

 

 

<서문 안쪽에서 본 모습>

 

 

<서문 안쪽에서 입구를 바라 본 모습>

 

 

 

분산성의 서문(西門)은 성 아래쪽에는 돌로 서넛 평의 평평한 구역을 만들었고 계단을 통하여 작은 문을 통하게 만들고 성 위쪽은 양쪽으로 치가 있어 성문을 들어오는 자를 쉽게 제압하도록 되어 있다.

 

 

 

 

타고봉(打鼓峯) 자리는 현재 산불감시초소가 자리를 잡고 사람의 접근을 막기 위해 접근금지 표지를 붙이고 있다. 은해사에서 파사석탑적멸보궁을 세운 진신사리부도탑 자리가 타고봉이라고 하지만 고지도를 확인하니 김해읍성을 마주한 남쪽의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봉우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봉수대 앞에 다다르니 산행 나온 몇 분이 성곽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어 평화롭고 여유롭게 보였다. 예전에 쓴 김해 분산성 해은사는 용왕의 은혜를 기리는 절이다.”라는 글에서도 잠깐 언급 했던 석굴이 이번에는 개방이 되어 있었다. 아마도 해은사를 처음 창건한 장유화상이 산신의 허락을 얻기 위해 이곳에 머물면서 기도하여 도()를 얻었을 것이다.

 

 

 

 

 

봉수대를 가기 직전에 화강암을 칼로 쪼게 납작하게 만들어 놓은 것 같은 바위 앞에 놓여 있는 동그란 주춧돌을 만나게 된다. 아마도 이곳은 분산산성지도(盆山山城地圖)에 표기된 누각이 있던 자리로 추정된다.

 

 

 

 

 

봉수대를 오르다 암벽을 보면 정기만이 쓴 만장대기념목이라는 싯구를 보게 된다. 싯구는 이렇게 적었다.

만장대기념목(萬丈臺記念木) 만장대 기념식수

천생만장대(天生萬丈臺)      하늘이 만든 만장대에

아식천년수(我植千年樹)      나는 천년수를 심었다.

임진맹춘(壬辰孟春)            임진년 꽃샘추위가 한창인 봄날에

정기만(鄭琪萬)                  정기만이 쓰다.

 

 

 

<정기만이 식수 했다는 나무와 봉수대 모습>

 

 

 

새로 복원한 봉수대에는 식수를 했다는 나무가 서있고, 봉수대 옆 큰 바위에 만장대(萬丈臺)라 쓰고, 그 왼쪽에 정현석(鄭顯奭)이라는 이름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이 글은 분산성을 보수한 정현석 부사가 새긴 것으로 보인다.

 

 

 

 

봉수대를 내려와 흥선대원군이 친필로 썼다는 만장대(萬丈臺)란 글귀와 인장을 새긴 만장대에 당도 했다. 이곳의 바위는 금강산의 화강암과 비슷한데 조각이 난 모양이 편편한 돌이라 글을 새기기엔 정말 안성맞춤이다.

 

 

 

 

만장대를 뒤로하고 충의각(忠義閣)에 도착하니 약속 시간이 다되어 가고 있다. 이 충의각(忠義閣)은 분산성의 건설내력 등을 기록한 4개의 비석을 보존한 건물이다.

'정국군 박공위 축성사적비(靖國君朴公葳築城事蹟碑)'는 고려말 분산성을 보수하여 쌓은 박위 장군의 업적과 내력을 기록한 것으로 김해부사 정형석이 고종 8(1871)에 세운 것이다. 사적비의 내용은 이렇다.

 

정국군박공위축성사적비(靖國君朴公葳築城事蹟碑)

 

금관지(金官志)를 살펴보면, ()은 홍무(洪武) 을묘년(우왕 원년, 1375)에 김해부사(金海府事)에 제수(除授)되어 여러 차례 왜적(倭賊)을 물리치고 대마도(對馬島)를 쳐서 큰 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김해 산성(金海山城)에서 왜구(倭寇)의 침입을 그치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다. 포은(圃隱) 정공(鄭公)이 지은 '김해산성기문(金海山城記文)'의 대략(大略), "김해(金海)는 왜적이 출몰하는 요충지(要衝地)로 비록 명성(名聲)이 있는 자라도 다스리기가 어려운 곳이다. 이에 밤낮으로 정신이 지치도록 생각을 다하여 계획을 세워 임금의 은덕(恩德)을 미루어서 추위에 떨고 굶주리는 자로 하여금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하였고, 고통에 신음하는 자로 하여금 태평한 세상을 노래하도록 하였으며, 살아남은 자로 하여금 장대하게 집을 짓게 하여 한 달 사이에 온갖 폐단(弊端)이 사라졌다. 그런데도 오히려 얼굴에 근심을 띠며 말하기를, '경내(境內)가 물로 둘러싸여 있는 바닷가의 고을은 만약 요새화(要塞化) 하지 않으면 왜적을 당할 수가 없다.'라고 하고, 이에 옛 산성(山城)을 수축(修築)하여 확대(擴大)하였다. 역사(役事)를 마치고 아래에서 바라보니 천 길 높이로 벽처럼 우뚝 서서 한 사람이 관문(關文)을 막더라도 만 명이 열 수가 없었다. 내가 장차 새로 쌓은 산성 위에서 술잔을 들어 공이 성공을 거둔 치적(治績)에 대해 축하하려 한다."라고 하였다.

 

! 공의 풍부한 공로(功勞)와 두터운 은택은 천 년이 지난 뒷일지라도 경탄(敬歎)할 만하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은 이후로 성이 무너져서 폐하여졌는데 지금 내가 조정(朝廷)의 명령을 받들어 개축(改築)하였다. 공의 후손과 김해 고을 사람들이 비석을 세워 공의 치적을 기록하니, 내가 세대를 뛰어넘어 추모하는 마음을 금하지 못하고 마침내 이를 서술하여 기록하였다.

때는 성상(聖上) 9년 신미년(고종 8, 1871) 3월이고, 부사(府使) 정현석(鄭顯奭)이 기록하다.

 

按金官志公於 洪武己卯除金海府使屢却倭賊擊對馬島建大功築

山山城寇戢民安圃隱鄭公爲之記其畧曰金海倭衝也雖有智者難爲治

乃日夜疲精竭思設計推恩使凍餒者飽煗呻吟者謳歌煨燼者奐輪旬月

間百廢擧矣猶憂形於色曰海曲之邑水環其境苟非施險無以爲也於是

古山城擴而大之功旣訖自下望之壁立千仞雖使一夫當關万夫莫能開

將擧酒於新城之上以賀政績之有成也噫 公之豊功厚澤雖在千載之

可敬也已自壬燹以後城圯而廢今余承 朝命改築之公之雲仍與邑人

立石紀公績余不禁曠感之思遂述此以識之時

聖上九年辛未三月也 府使鄭顯奭記

[출처 : 조동원 편저,한국금석문대계4, 원광대학교 출판국, 1985]

 

 

그리고 '흥선대원군 만세불망비(興宣大院君萬世不忘碑)' 2기는 김해부사 정현석이 분산성을 보수하며 쌓은 후 이를 허가해 준 흥선대원군의 뜻을 기려 세운 것으로 비석에는 고려 말 정몽주가 쓴 분산성 관련 글도 새겨져 있다.

부사 통정대부 정현석 영세불망비(府使通政大夫鄭顯奭永世不忘碑)'는 분산성을 보수하고 쌓은 정현석 부사의 공을 영원히 잊지 않고 기리기 위해 고종 11(1874)에 건립한 것이다.

이와 같이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신 공들의 충정을 받들기 위해 매년 양력 10월 28충의각에서 제례를 지내고 있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