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수해를 막고자 세운 단계리 석조여래좌상

천부인권 2014. 1. 31. 06:30

 

산청 단계리 석조여래좌상.hwp

 

 

<2012/9/8 단계리 석조여레좌상의 뒷 모습, 광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있다.>

 

 

경남 산청군 신등면 단계리 767-1번지에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9호인 단계리석조여래좌상(丹溪里石造如來坐像)이 있다. 신등 면소재지인 단계리(丹溪里)5일마다 서는 단계시장이 있고, 시장통 뒤편에 마을회관이 자리하고 있다.

 

 

 

 

<2010/8/18 단계시장 모습>

 

 

<2010/8/18 단계천변 공원 모습>

 

마을회관 앞 단계천변은 이충무공(李忠武公) 추모행로(追慕行路) 유적지(遺蹟地) 공원으로서 꾸며져 있는데 장군의 동상 및 추모탑, 백의종군로(白衣從軍路)안내표지탑 등이 세워져 있다. 정유재란 당시 옥살이를 하고 권율장군이 있는 합천 초계로 가던 중 159762일 새벽 단성에 있는 박호원의 노비 집을 나와 비가 오락가락 한 날씨 속에서 이곳 단계천(丹溪川)에 이르러 아침을 먹기 위해 잠시 머물렀던 곳이라 기록되어 있는 곳이다. 400여년 전 이순신장군도 이곳에서 아침을 먹으면서 단계리 석조여래좌상(丹溪里 石造如來坐像) 보았을 것이다. 풍전등화 같은 조국의 운명과 백의종군 하고 있는 처지에 놓인 장군 마음은 이 불상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2010/8/18 백의종군로 안내표지탑과 단계쉼터에서 이순신장군이 아침을 먹었다는 기록을 하고 있는 탑>

 

 

<이순신 동상상과 추모탑>

 

이순신장군은 일본의 모략과 선조의 오해를 핑계한 배신으로 직책을 박탈당하여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을 선고 받으나 정탁의 청원으로 목숨은 구제 받는다. 정유년(1587) 41일 출옥하여 권율장군의 휘하에 백의종군 하라는 어명을 받고 서울을 떠나 율곡(栗谷 : 현 합천)으로 향한다. 2개월 후 6월에 산청까지 당도한 것을 볼 때 당시 한양을 오가는 대략적 시간을 유추할 수 있는 기록이기도 하다.

 

 

 

<단계리 석조여래좌상 탑각>

 

신등면 단계천은 신등천에 합류하는 지류의 하천으로 두 하천이 만나는 지점으로부터 삼각주를 이루는 산속의 평야지대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단계리 석조여래좌상(丹溪里 石造如來坐像)이 세워진 단계천에서 신등천에 합류하기 전까지 불과 800m여 정도의 거리에 있다 보니 집중호우 등으로 갑자기 물이 불어나면 물난리가 나기 쉬운 곳이다.

 

 

 

 

단계리 석조여래좌상(丹溪里 石造如來坐像)의 안내표지에는 석조여래좌상을 이곳에 세우게 된 이유로 풍수지리 상 단계마을의 지형이 배()의 모양을 하고 있어 이 배를 띄우기 위해 물난리가 자주 난다는 것이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부처의 힘으로 자꾸만 일어나는 홍수를 막아보자고 불상을 세웠다. 불상을 조성하고도 물난리가 계속되자 배에 돛대와 삿대가 없기 때문이라 생각하여 그것들을 만들고 가까운 나무에 걸어 두었더니 그 뒤로 수해가 없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불상에 두 손이 모두 있으면 배를 저어 떠난다하여 불상의 한쪽 손을 떼어냈다고 한다. 그런 까닭인지 현재 불상은 오른쪽 팔부분이 거의 떨어져 나간 채 훼손되어 원래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다.

 

 

 

 

불상의 머리 부분도 떨어져 나간 것을 인근에서 찾아 다시 붙였으며, 얼굴은 살이 붙어 통통한 편이지만 세부적인 특징은 분명하지 않다. 넓고 각이진 어깨, 튼튼한 가슴으로 표현한 상체는 건장한 모습인데 비해 하체는 상대적으로 빈약하여 안정감을 잃고 있다. 이처럼 하반신이 상반신에 비해 약하게 표현되는 양식이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이다. 왼손에 약 항아리를 들고 있는 것 같아 이 불상이 약사여래상(藥師如來像)일 것이라 추측을 하고 있다. 약사여래는 인간세계의 모든 질병과 무지(無知)를 고쳐주는 부처로서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 부른다. [출처 : 안내표지판]

 

산청 단계리 석조여래좌상.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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