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김해 사충단은 최초의 의병을 모신 곳

천부인권 2014. 1. 30. 06:30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을 모신 김해 사충단.hwp

 

2014/1/27 분산성에서 본 사충단

경상남도 기념물 제99호 사충단(四忠壇)은 김해시 가야로405번안길 22-9(동상동 161)에 위치하며, 분산성(盆山城) 우측 계곡에 있다. 사충단은 임진왜란 때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켜 김해부성(金海府城)을 지키다 전사한 송빈(宋賓), 이대형(李大亨), 김득기(金得器), 류식(柳湜)선생의 공을 기리기 위하여 고종 8(1871) 왕명으로 건립한 묘단이다.

 

 

2009/8/22 외삼문인 경앙문 모습

선조 25(1592) 4월에 동래성(東萊城)을 함락한 왜적 제3(第三隊)를 이끄는 구로타 나카마사(黑田長政)가 김해부성(金海府城)을 공격해오자 부사(府使) 서례원(徐禮元)은 성을 버리고 도망을 갔고,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조대곤(曺大坤)도 창원병영에 많은 군사가 있었음에도 구원조차 요청 않고 도망갔다.

 

국록을 먹는 책임자가 도망간 김해부성(金海府城)은 정보도 없어 도망도 못간 민초들과 주인의식을 가진 네 분이 전쟁에 임하여 이 땅을 지키려 했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장렬이 순국하였다. 국가는 이들에게 통정대부(通情大夫) 등의 관위와 벼슬을 내리고 그 뒤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추증(追贈)했다.

 

 

사충단이건기념비

 

2009/8/22 송담서원 전경

이런 사례는 오늘 날에도 국가가 위급할 시 이 때까지 목소리 깨나내고, 밥 좀 먹었다는 놈들에게 일어나는 보편적인 이야기 일 것이다. 당시 조선의 왕 선조(宣祖)도 자기 백성과 나라를 버리고 중국으로 도망을 쳤는데 이 나라 대통령과 정부관료 및 국회의원 몇 놈 등은 전쟁이 나면 미국으로 잽싸게 도망가지 않으려나? 그래서 역사는 기억하는 사람이 많아야 한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숙종 34(1708) 김해부사 이봉상(李鳳祥)의 발의로 김해부민이 진례면(進禮面)에 송담사(松潭祠)와 송담서원(松潭書院)을 세워 ··3충신을 향사하였다. 순조(純祖) 33(1833)에 국가로부터 표충사(表忠祠)라는 사액을 받았으나, 고종 5(1868)에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된 것을 다시 고종 8(1871)에 왕명으로 사충단(四忠壇)을 설립하고 비로소 ···사충신을 향사(享祀)하였다.

 

 

처음 사충단을 세운 동상동 873번지에 있었던 것은 김해의 도시계획으로 동상동 227-6, 228번지로 옮겨 세웠고, 1995년 또다시 김해시 가야로405번안길 22-9(동상동 161) 일원인 이곳으로 확장 이건하였다.

 

 

송담서원의 현판

송담서원과 표충사를 ··市費 20억원을 들여 복원했는데 비각 이외의 건물은 모두 신축하였다. 비각은 주심포식(柱心包式) 겹치마의 맞배지붕을 하고 여의주를 문 네 마리의 용이 사방을 지키고 있는 모양이다. 아마 네 명의 충신을 용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하고 있으며, 매년 음력 420일에 향례(享禮)를 지내고 있다.

 

 

표충사로 들어가는 주출입문인 성인문

조선환여승람 김해군 충신(忠臣)편에 의하면 네 분에 대한 대략의 행장이 적혀 있다.

 

송빈(宋賓) - ()는 사신(士信)이고 청주인(淸州人)이며 대사성(大司成) 송승은(宋承殷)의 후손(後孫)이다. ()하고 굳세었으며 대절[大節:대의(大義)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지키는 절개(節介)]을 지니고 있었다. 임란(壬亂) 때 창의[倡義:국난(國難)을 당()하여 의병(義兵)을 일으킴]하여 순절(殉節)하였으며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 ()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고 표충사(表忠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내삼문인 상절문

이대형(李大亨) - ()는 태래(泰來)이고 호()는 관천(觀川)이며 증직편(贈職篇)에 있는 이경유(李景裕)의 아들이다. 임역(壬役)에 분성진(盆城鎭)에서 순절(殉節)하였으며 판결사(判決事)에 증직(贈職)되고 표충사(表忠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순조조(純祖朝)에 정랑(正郞) 건우(虔愚) 이치(李致)에게 명()하여 표충사(表忠祠)에서 제사(祭祀)를 지내게 하였다.

 

 

제례공간인 표충사

김득기(金得器) - ()는 구오(具五)이고 절의편(節義篇)에 있는 김거익(金居翼)의 후손(後孫)이다. 친제[親癠:부모(父母)의 병환(病患)]에 단지(斷指)의 효도(孝道)를 하였고 임역(壬役)에 출발(出發)할 때 옷 한 벌과 머리 한 줌을 아들 김간(金侃)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어머니와 같이 합장(合葬)하여라.”라고 하였다. 송빈(宋賓) 이대형(李大亨)과 함께 육력[戮力:힘을 합()]하여 함께 싸웠으나 힘이 다하여 순절(殉節)하였다.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贈職)되고 송담사(松潭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비각 사충단

 

 

사충단 내부의 비

류식(柳湜) - ()는 낙서(樂棲)이고 호()는 낙오(樂吾)이며 명환편(名宦篇)에 있는 류용(柳墉)의 손자(孫子)이다. 효도(孝道)와 우애(友愛)가 있었고 지조(志操)와 절개(節介)를 지녔으며 임진년(壬辰年)에 창의(倡義)하여 성()을 지키다가 적()이 우물길을 끊어버리자 객사(客舍) 계단(階段) 아래로 나아가 땅을 파 샘을 얻었다. ()이 함락(陷落)되기에 이르러 순절(殉節)하였다.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贈職)되고 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사충단(四忠壇)에 제향(祭享)되었다.

 

 

 

표충사에서 바라보는 분산성

殉節詩(순절시) 참판 송 빈(宋 賓) 공의 장대벽상 순절시

 

粤自先公荷國恩 (월자선공하국은) ! 내 선조님께서 나라의 은혜를 많이 입었으니

孫何背祖向犬戎 (손하배조향견융) 자손이 어찌 선조를 배반하고 오랑캐를 따르리오

力盡孤城無奈何 (역진고성무내하) 성은 외롭고 힘은 다하니 어찌할 수가 없구나

先斬二帥效丹忠 (선참이수효단충) 먼저 두 적장을 베어 단충(丹忠)을 보이리라.

人之仗節人何勸 (인지장절인하권) 남의 절개 가질 것을 남이 어찌 권하리오

二子如今任自量 (이자여금임자량) 자네들은 이제 자네들 마음대로 하시게나

報國殉身吾已決 (보국순신오이결) 나는 이미 나라 위한 순신을 결심 하였네

北向百拜辭吾王 (북향백배사오왕) 북향백배 올리오며 나랏님께 하직 드리오!.

 

 

사충단에서 보는 김해시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을 모신 김해 사충단.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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