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합포구 우산동 창열각 彰烈閣

천부인권 2015. 1. 2. 06:30

 

2014/12/31  우산동 열녀안씨 정려각 창열각

합포구 밤밭고개에서 현동으로 내려가다 좌측에 처음으로 만나는 마을이 합포구 우산동으로 이곳 합포구 우산동 233번지에는 열녀안씨 정려각(烈女安氏 旌閭閣)과 비석 및 郡守尹侯候愛民善政碑(군수윤후후애민선정비), 通政大夫姜俊模惠恤褒善碑(통정대부강준모혜휼포선비) 등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이곳 열녀안씨 정려각에는 창열각(彰烈閣)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편액의 말미에 광무7년 계묘 3월 일이라는 글씨가 있어 1903년에 쓴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각 안에는 烈女順興安燕之碑(열녀순흥안연지비)라 적고, 崇禎紀元後三丁巳七月日立(숭정기원후삼정사칠월일입)이라 새긴 2개의 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오른쪽의 오래된 비는 풍화에 마모되어 글씨를 볼 수 없는 상태이다. 정려각은 정면, 측면 각각 1칸으로 네 개의 기둥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벽은 붉은 벽돌로 쌓았다.

 

열녀안씨 정려각 비석 앞에는 제물이 싱싱한 상태로 놓여 있어 지금도 누군가가 종종 제수를 놓고 기도를 하는 모양이다. 이 정려각 옆에는 烈女安氏 旌閭閣 重建記(열녀안씨 정려각 중건기) 세워져 있다. 그 내용은 아래 내용과 같다.

 

2014/12/31  우산동 열녀안씨 창열각

 

열녀안씨 정려각 중건기(烈女安氏 旌閭閣 重建記)

성현의 가르침에는 충신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요 열녀는 불경이부(不敬二夫)라 하였다. 그러나 그 경우와 사세(事勢)에 따라 일시적인 훼절(毁節)만으로서는 그 시비를 단정할 수 없을 것인가 한다. 듣건대 이곳 고열녀안씨(故烈女安氏)는 그 사적(事跡)이 이미 선인들의 전기(傳記)로 세상(卋上)에 알려져 새삼 거론할 바 아니나 살피건대 안씨는 그를 탐욕(貪慾)하는 이웃 악한(惡漢)의 불측(不測)한 격계(击計)로 그 남편을 잃고 악한의 소행임을 짐작하면서도 그 진부(眞否)를 확인코저 악한의 유혹(誘惑)에 거짓 순종하여 일편단심 남편의 복수(復讐)에 애타 오던 중 천우신조 우연한 소나기가 악한의 마음을 유도(誘導)하여 마침내 그 범행을 고백하게 되니 안씨는 즉시 남편의 유골을 찾아 안장하고 이어 악한의 죄상을 관부(官府)에 고발하여 치죄(治罪)케 한 후 원수(怨讐)의 씨앗인 세 아들을 도끼로 작살(斫殺)하고, 자신 또한 원수의 손에 더럽혀진 살은 모두 베어버린 후 목숨을 끊었으니 비장(悲壯)한 그 열행은 참으로 고금에 탁이(卓異)한 정절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그 연대는 비록 불명하나 나라에서는 정려가 내렸고 후손이 없으매 역대 관원들이 정각(旌閣)을 수호해 왔으며 또한 사림(士林)의 공의(公議)로 치제(致祭)하는 등 그 정혼열백(貞魂烈魄)이 길이 불민(不泯)하였음은 차소위의(此所謂義)롭게 죽는 것은 죽어도 죽지 아니함과 같다라는 옛 말이 과연 옳음을 알았겠다. 내가 일찍이 안씨의 사적을 듣고 그 열기(烈氣)에 감동한바 컸었는데 이제 그 정각(旌閣)의 퇴락(頹落)함이 참아 간과(看過)할 수 없는 경지에서 이곳 사인우남 강동규씨(士人友南 姜銅圭氏)가 거액의 사재를 희사하여 이를 중건 복원함으로서 탁세()의 정령(精靈)이 영세안식(永世安息)을 누리게 하였음은 권선표절(勸善表莭)하는 사군자(士君子)의 본무(本務)를 다한 미거(美擧)로서 길이 후세에 귀감(龜鑑)이 되리라 믿는다. 어느 날 소우 윤석찬군(少友 尹錫贊君)이 나를 찾아와 그 기문을 청하기에 나의 잔학(琖學)으로 감당(勘當)할 수 없으나 그 숭고(崇高)한 모열정신(慕烈精神)에 공감한바 있어 졸문(拙文)으로나마 위와 같이 그 전말(顚末)을 약기()하여 후인의 모교(慕敎)에 자()했으면 한다.

단기4317년 갑자 중추절 [서기 1984]

商山 周永晋 謹撰

仁川人 李是奉 謹書

晋陽人 友南 姜銅圭 謹竪

 

郡守尹侯候愛民善政碑 ( 군수윤후후애민선정비 )

通政大夫姜俊模惠恤褒善碑 ( 통정대부강준모혜휼포선비 )

 

위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열녀안씨는 전 남편과의 열행을 지키기 위해 의심이 가는 현재의 남편과는 거짓으로 혼인을 하였다. 안씨를 사모하여 전 남편을 살해하고 안씨와 결혼에 성공한 현재의 남편과는 아들을 셋이나 낳았지만 전 남편을 죽인 원수임을 아는 순간 현재의 남편은 관에 고발하여 처벌을 받게 하고, 자신이 낳은 죄 없는 세 아들을 도끼로 처 죽여 어미로서는 할 수 없는 악업을 행한다.

아무리 조선시대라 해도 이처럼 집요하게 원수를 갚기 위해 자신의 몸을 망치고 아이까지 낳는 무모한 행동을 하는 것이 정상적인 인간의 행동인지는 열녀를 떠나 생각해 볼 일이다. 인간은 부모의 몸을 빌려 세상에 탄생하는 순간 이 우주에서 유일무이한 단 하나의 생명체로 존재하게 되고 자연사 할 때까지 동물과는 다른 물질적 정신적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불행을 담보로 하는 열녀안씨처럼 생활 하는 것이 권장할 만한 이야기 인지, 아니면 집착이 빛은 정신병인지 한 번 더 생각해봐야겠다.

 

 

烈女安氏旌門重修記    尹永稷

郡之南四十里許 古龜城之北 有一祠焉 卽故烈女安氏之閭也 不知創建於何時 而重修者亦幾年矣 其遺蹟 記於舊扁 載於邑誌 而皆略而未詳也 余郡人也 稔聞此烈之卓異 而憐其無雲仍之奉守矣 歲在壬寅秋七月 余自諫議院 出宰此郡 啣 恩覲親之路 過其閭前 棟朽而瓦滲 將至顚覆之境 立馬彷徨 自有惻然之心 此豈非烈氣之能感人者乎 余惜其姱節之將泯 粤明年春 始捐廩而修理 則民或有出義者 是知人皆秉彛 上行上效 捷於影響而然 於是 輸材運瓦 黝堊丹碧 綽楔扁楣 擧以新之 役夫勤工匠善 不數月成而妥靈焉 噫 安氏之貞魂烈魄 歷千百年而長存 或現於鎭將之夢 而使助祭 或露於守令之行 而使修閭 古人所謂得其死而死 則死而不死者 豈不信矣哉 余嘉其節而修其閭 復位土成節目 而使面人 奉其祀事焉 後之人 知此樹風勵俗之義 則庶有踵而修之者矣 記而亂以詞曰 福山巍巍兮 禮川洋洋 烈風凜凜兮 百世流芳
光武七年癸卯三月上澣知郡尹永稷記

열녀안씨정문중수기(烈女安氏旌門重修記)¹⁾  윤영직(尹永稷)²⁾

군(郡)의 남쪽 사십리 쯤 옛 구성(龜城)의 북쪽에 사당이 하나 있다. 이는 돌아가신 열녀 안씨(安氏)의 정려(旌閭)이다. 그러나 어느 때에 창건하였는지 또 중수한 것이 언제인지도 모른다. 그 남겨진 자취는 옛 편액에 기록되어 있고 또 읍지에도 실려 있지만 모두 간결하고 상세하지 않다. 나는 이곳 창원군의 사람이므로 이 열녀의 정렬이 높고 드문 것을 들으니 제사를 지내고 정려를 지키는 자손이 없음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임인(壬寅 1902) 칠월 초가을에 내가 간의원(諫議院)에서 창원군으로 벼슬을 나오게 되었다. 이때 임금께서 가까이에서 부모를 봉양하라는 은혜를 내리셨던 것이다. 내려오는 길에 정려문 앞을 지나다가 기둥이 썩고 기와가 헐고 비가 새어 장차 전복될 지경이었다. 말을 세우고 방황하다가 스스로 측연한 마음이 들었다. 이것이 어찌 열녀의 정기가 사람을 감동시킨 까닭이 아니겠는가. 나는 아름다운 절의가 장차 사라질 것을 아쉬워하여 다음해 봄에 비로소 봉름을 덜어 수리를 하니 백성들 중에서도 간혹 뜻을 보태는 자가 있었다. 이로써 사람들이 모두 하늘이 내린 떳떳한 천품을 지니고 있음을 알았다. 위에서 실행하고 위에서 모범을 보이면 그 영향이 끼쳐서 그런 것이다. 이에 목재를 모으고 기와를 옮겨 집을 짓고 검고 희고 붉고 푸른 색칠을 하고 문설주 높이 현판을 걸어 올리니 정려각이 모두 새롭게 되었다. 노역하는 인부가 힘쓰고 목수와 장인이 좋으니 몇 개월 지나지도 않아서 영령을 모시게 되었다. 아아 안씨의 곧은 혼과 뜨거운 기백이 천백년이 흘러도 길이 보존될 것이다. 혹은 진을 지키는 장수의 꿈에 현몽하여 제사를 도우게 하고 간혹은 수령의 행차에 모습이 보이게 되어 정려각을 중수하게 할 것이다.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죽을 명분이 있는 자리에서 죽게 되면 그것은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니 어찌 믿지 않겠는가. 내가 그 절의를 아름답게 여겨 그 정려를 중수하고 위토(位土)를 회복하고 절목(節目)을 정리하여 면민(面民)들로 하여금 제사를 봉행하게 하였다. 후세의 사람들이 이렇게 풍속을 기르고 힘쓰게 하는 뜻을 알게 된다면 그 자취를 좆아서 따르려 애쓰게 될 것이다. 이게 기록하고 끝으로 고하노라. 복산(福山)은 우뚝하고 예천(禮川)은 멀리 흐르니 정렬(貞烈)의 기풍 늠름하여 백세토록 아름답게 전하리.
광무(光武) 칠년(七年) 계묘(癸卯)³⁾ 삼월(三月) 상한(上澣)
군수(知郡) 윤영직(尹永稷) 씀

 


【주석】
열녀안씨정문중수기(烈女安氏旌門重修記)¹⁾ : 합포구 우산동 233번지에 있는 정려각 
윤영직(尹永稷)²⁾ : 윤영직애민선정비(尹永稷愛民善政碑).춘추관의관(1902 고종39), 창원군수(1902∼1906), 이원 군수(利原郡守)를 지낸 윤군수의 선정을 표송(表頌)하기 위해 지방의 사림이 세웠다.
광무(光武) 칠년(七年) 계묘(癸卯)³⁾ : 1897년 –1907년 고종 연간의 연호, 광무 7년은 1903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