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돌리(석동) 옛길에서 만난 웅천현감 청덕표

천부인권 2014. 10. 30. 12:26

 

 

<2014/10/30 진해 석동>

 

현재 진해구 석동이라는 지명을 가진 안민고개 아래 진해방면의 옛길을 가다보면 산 중턱에서 자연 암괴의 중앙을 비석모양으로 다듬어 글을 새긴 두 개의 마애비를 만나는데 그 중 하나는 현감이공지학청덕표(縣監李公之㰒淸德表)라 새기고 좌측에는 을유사월일 중면(乙酉四月日 中面)이라는 글귀가 있다. 이 청덕표는 을유사월 웅천현 중면에 세웠다는 것으로 이지학 현감의 청렴하고 고결한 덕행을 후세에 까지 널리 알리려는 뜻에서 세운 것이다.

 

 

 

<이지학 마애비>

 


웅천현읍지 관안에는 윤염(尹恬), 이시휘(李時輝), 정도삼(鄭道三), 이지학(李之㰒), 양세징(楊世徵) 등이 차례로 이름이 나오지만 다른 기록은 없다. 기록 중에는 비가 있다고 기록된 현감들도 있다.


【숙종실록 17권, 숙종 12년 8월 10일 임술 1번째기사 / 춘당대에 나가 시예를 마치고 수석한 자에게 수령을 제수하다
壬戌/御春塘臺, 雜技試藝旣畢, 命居首人楊選漢、李之㰒、朴長世等, 皆除守令, 識者皆以爲: "生民休戚, 係於守令, 而選漢等, 只以一時武藝, 直授牧民之任, 前所未有云。"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잡기(雜技)의 시예(試藝)를 마치고 수석(首席)을 한 양선한(楊選漢)·이지학(李之㰒)·박장세(朴長世) 등에게 모두 수령(守令)을 제수하니, 견식이 있는 자들은 모두 말하기를, ‘백성들의 즐겁고 괴로움이 수령들에게 달린 것인데, 양선한 등은 다만 한때의 무예(武藝)로써 곧바로 목민(牧民)하는 임무에 임명되었으니 이러한 일은 전일에 없었던 것이다.’고 하였다.】


 

 

이지학(李之㰒) 웅천현감에 대해서는 잘 몰라 다음에 웅천현지(熊川縣誌)가 있으면 공부를 해봐야겠다.

창원향교지에는 李之櫟(이지력)이라는 현감은 나오지만 이지학이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승정원일기에는 웅천현감 이지학에 대해 “1702(숙종 28) 628金演(김연)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이라 기록하고 있다.

또한 1704(숙종 30) 1124일에는 黃鎬(황호) 등의 罷黜(파출)에 대한 金演(김연)의 장계에 대해 내린 전교에 웅천현감 이지학의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웅천현감을 2년은 했다는 것이다.



 

 

<이시휘 마애비>

 

그 옆 조금 작은 돌에는 현감이공시휘청덕표(縣監李公時輝淸德表)’라 새기고 좌우에 편갈수진(片碣雖盡) 욕송기덕(欲頌其德) 무인육월일(戊寅六月日)”이라고 적었다. 이 뜻은 이시휘 현감의 청덕을 기리는 뜻으로 바위 조각에 새긴 글이 비록 다 할지라도 그 덕을 칭송한다.”는 내용이다.

웅천현감 이시휘에 대해 승정원일기에는 1697(숙종 23) 76일에 宋墁(송만) 등에게 관직을 제수했다는 기록과 1697(숙종 23) 811金夏錫(김하석) 등과 함께 하직했다는 기록도 있다. 따라서 웅천현감으로 약 한달 정도 부임했다는 것이다.

달랑 한달 근무한 사람이 덕을 베풀었으면 얼마나 베풀었는지 궁금타!

 

 

 

이시휘(李時輝) 현감은 전주 이씨이고, 자는 뇌경(雷卿)이며, 1677(숙종 3), 31세 되던 정사(丁巳)년에 한량과에 합격하였다. 품계는 통훈대부(通訓大夫)이고, 관직은 행웅천현감(行熊川縣監)으로 1697년 선정을 펼쳤다 [참조 : 정해문무과별시방목(丁亥文武科別試榜目)(국립중앙도서관일산6024-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