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보호수와 노거수

내서읍 원계리 느티나무 노거수

천부인권 2015. 8. 25. 15:30



 

<2015/8/22 원계리 느티나무 노거수>

 

 

노거수를 찾는 사람들이 내서읍에서 찾아 간곳 중에는 원계리 당산목인 느티나무도 포함 되어 있었다. 이 원계리 노거수는 마을 입구에 160cm 정도의 높이로 돌로 쌓은 둥근 조산을 조성하고 그 중앙에 느티나무를 심었다. 마을 입구에 조산을 조성한 것은 마을로 들어오는 나쁜 액운이 이 조산 때문에 직선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돌아서 진입하도록 하여 그 힘을 반감 시키고자 하는 이치를 담고 있다. 옛 마을에서는 이 조산이 동구 밖과 안을 구분하는 경계이다. 따라서 이 조산의 당산목이 마을을 형성하는 위치의 기준이 되는데 만약 이 당산목 앞에 집이 있다면 그 집은 원계마을과 상관없이 이후에 세워졌거나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 거주하던 집이라 생각하면 된다.


 



조산과 누석단이 다른 것은 보통 서낭당이라 부르는 누석단은 사람들이 오가며 쌓아둔 돌무더기이고, 조산은 풍수적으로 터를 비보할 목적으로 돌을 쌓는 것으로 기술자가 체계적으로 조성한 것이다.

이곳 원계리 입구의 느티나무 노거수의 뿌리 부분을 보면 母木(모목)이 쓰러져 죽은 줄기 위에 지금의 느티나무가 자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지금의 노거수는 원래의 나무가 죽은 후 떨어진 씨앗이 발아를 해 그 자리에 지금의 느티나무 노거수가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이 느티나무 노거수는 사람들이 심은 흔적이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자연 발생한 특징인 줄기가 발생하는 위치를 보면 130cm 부분에서 분화 되었는데 가슴높이인 120cm 높이에서 측정을 해보니 488cm이다.





원계마을 노거수에서 50m여 마을로 올라가면 옛 마을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공동우물을 만나게 된다. 그 우물에서 골목길로 10m여 떨어진 곳에 충열공 창계 서응시(忠烈公 昌溪 徐應時 ; 1531~1592)을 배향하는 甑山書院(증산서원)있다.

회원구 내서읍 원계증산길 57-11(원계리 523번지)에 위치한 증산서원은 6·25사변으로 소실된 것을 1953년에 다시 대지 200, 건평 60평의 목조와가(木造瓦家)로 복원하였다. 대문인 외 삼문과 정면 4칸 측면 2칸인 강당, 정면 3칸인 별묘를 건설하였는데 매년 삼월 초팔일에 유림들과 함께 별묘인 崇節祠(숭절사)에서 향례(享禮)를 올리고 있다. 특히 강당은 2003년 태풍 매미로 인해 파손되자 그해 11월에 복원하였다.





창계 서응시(昌溪 徐應時公)의 스승은 중봉 조헌선생(重峯 趙憲先生)으로 왜구의 침입에 대비할 것을 상소했으나 조정 신료들에 의해 묵살되었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조직하였고 이때 공이 참모역할을 하다 금산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를 하여 사적 제105호인 칠백의총에 안치 되었다.

 

창계선생문집에 실린 가는 길이 어려움이라는 제목의 행로난(行路難) 구절을 되새겨 본다.

行路難(행로난) 가는 길이 어려움

出門世路多岐(출문세로다기) 문을 나서니 세상 길 여러 갈래인데

之東之西難知(지동지서난지) 동서로 가도 알기가 어렵구나.

前者覆後者冥(전자복후자명) 앞 사람이 넘어지니 뒤 사람도 아득한데

長夜漫漫無醒(장야만만무성) 긴 밤은 만만하여 깨어나지 못하네.

只藏鴻寶萬卷(지장홍보만권) 단지 큰 보물인 만권을 갈무리하고,

自照靈臺一片(자조령대일편) 영대일편에 스스로 비추노라.


 




김성일과, 황윤길은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전에 일본을 방문한 통신사절단의 정사(황윤길)와 부사(김성일)이다.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놓고 황윤길은 침략할 것으로, 김성일은 침략이 없을 것이라고 선조에게 고한다. 당시 김성일이 속한 동인이 우세한 조정 상황에서 김성일의 의견이 채택 된다. 훗날 임진왜란이 발생하였고 이로 인하여 오늘날에는 그 일로 인하여 비난을 받은 인물이 김성일이다.

서응시의 스승 조헌은 왜국사신(倭國使臣)인 승려 현소(玄蘇)와 유천(柳川) 등이 부산항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듣고는 중봉 조헌선생이 도끼를 들고 궁전 앞에 엎드려서 임금에게 왜구사신 처단을 상소하고 왜국군(倭國軍)이 침략할 것이니 그들의 침범에 대비하기를 주장하였으나 묵살 되었다.


 




내서읍 광려천을 사이에 두고 증산서원에 배향된 서응시선생은 통신사 황윤길의 주장을 따랐고, 첨두서원에 배향된 노경종선생은 김성일의 주장을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