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8/22 내서읍 삼계리 옛 첨두서원 은행나무>
‘유명하고 존귀한 사람을 만나 뵌다.’는 뜻을 가진 첨두서원(瞻斗書院)의 구지(舊址)인 내서읍 삼계리 705-2번지에는 도랑에 뿌리가 들어난 ‘첨두서원 은행나무 노거수’라 명명하는 늙고 굵은 나무가 있다. 은행나무의 나이는 280년으로 추정하고, 가슴높이 둘레는 560cm이며, 높이는 19m이다. 이 은행나무가 벼락을 맞아 줄기 일부가 부러져 지금은 줄기의 동쪽 부분 중앙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 있고 그 부분에 맹아들이 자라고 있다. 은행나무는 노거수가 되면 나무의 가지에서 숨을 쉬기 위해 유주가 발달하는데 이곳 첨두서원 은행나무도 여러 개의 유주가 발달하고 있다. 유주(乳柱)란 글자 그대로 ‘젖기둥’ 이라는 뜻으로 그 모양이 마치 여인의 젖가슴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뿌리 부분도 호흡뿌리가 땅위에 드러나 있다.
은행나무는 향교나, 서원, 절 등에 표식수(멀리서도 잘보고 찾을 수 있는 나무)로 사용하는 나무이다. 그리고 나무가 뿜어내는 향기가 좀이나 벌레 등이 싫어하는 물질이 있어 책 등이 쉽게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고, 제례나 향례 때 그 열매를 사용하기 위해 주로 심었던 나무이다.
또한 나무의 열매가 많이 열리므로 스승을 따르는 제자가 은행나무에 열매가 달리 듯이 많이 생겨나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첨두서원 은행나무는 창원시에서 보호수로 지정한 단계리 우곡사 은행나무와 동정동 은행나무 다음으로 오래되고, 큰 은행나무인데 보호수 지정도 되어있지 않은 노거수이다. 이보다 연륜도 작고 커지 않은 은행나무인 관해정 은행나무는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 있다는 점에서 창원시의 보호수 정책에 허점을 보게 된다.
첨두서원(瞻斗書院)은 홍문관 교리 겸 지제교를 지낸 노정직(盧廷直)공을 주향으로 삼고, 그의 5대 후손인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명암 노경종(明庵 盧景宗, 1555 ∼1625)을 종향으로 봉안하여 채례(采禮)를 지내던 것을 1981년 유림(儒林)의 공의(公義)를 얻어 서원으로 승격되면서 매년 음력 4월 1일에 향례를 올리고 있는 곳으로 회원구 삼계로 63(삼계리 589번지)에 위치한다.
노정직(盧廷直)은 일찍이 세종 때에 벼슬길에 올라 직무를 수행하다가 단종이 왕위를 물려줄 즈음에 슬픈 마음으로 벼슬을 버리고 문창(文昌) 남쪽에 은거(隱居)하면서 망복(罔僕: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것)의 뜻을 간직한 채 고향에 돌아와 백산재(白山齋)를 지어 놓고 시문을 읽으며 여생을 즐기셨는데 ‘알고서 돌아왔다’는 그 뜻을 담아 마을 명칭이 ‘지이리(只耳里)’에서 ‘지귀촌(知歸村)’으로 불렸다고 한다. 지금의 의창구 봉곡동 코오롱아파트 자리이다.
명암 노경종(明庵 盧景宗)은 11세 때(1566년) 어른들을 따라 마을 뒷산인 태백산(현 태복산)에 올랐다가 앞에 보이는 산 이름을 어른에게 물으니 정병산(精兵山)이라는 대답을 듣고 즉석에서 ‘망견정병산(望見精兵山)’이라는 시를 지었으니 그 영특함에 기대를 받았다한다.
望見精兵山(망견정병산) 정병산을 바라보며
海國精兵出(해국정병출) 해국의 정병이 출병하니
南蠻不敢侵(남만불감침) 남쪽의 오랑케 감히 침략하지 못하고
將軍應在比(장군응재비) 장군에 견줄 이 여기 있으니
特立幾千尋(특립기천심) 우뚝 솟고 매우 깊어 위태롭구나.
그러한 공이 임진란(壬辰亂)이 발생하자 ‘생당호국사당집의(生當護國死當執義)’란 글을 써서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뜻에 따라 창의(倡義)하니 집안과 향내(鄕內)의 젊은이가 모였고, 무릉산(武陵山)을 거점으로 대항하다가 초계군수(草溪郡守)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강우(江右)의 요충지를 지키기 위하여 초계로 달려가 매복하였다가 빈 성인 줄 알고 입성한 왜구를 기습 공격하여 승전을 하니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 1538~1593)에게 알려져 가수첩(假守帖)을 받았으며, 곽재우장군과 연계해 전공을 세워 난이 평정 되자 이등공신(二等功臣)의 책록(策錄)을 받았다. 선조 36년(1603년)에는 특설무과(特設武科)에 합격 절충부호군(折衝副護軍)에 이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고 인조 3년(1625년)에 향년 71세로 별세하였다.
첨두서원(瞻斗書院)은 영조7년(1731)에 창건되었으나 고종 때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47년에 복원하였고, 1950년에 6·25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광복 을미(光復 乙未 1955)년에 재건하였다. 지금의 서원(書院)은 2001년 도시계획으로 인하여 구 건물은 없어지고 회원구 삼계로 63(삼계리 589번지)의 위치로 옮겨 신축을 한 것이다.
<첨두서원 내삼문 '공북문' 앞 교화노씨양현세거비>
'식물 > 보호수와 노거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한재를 품은 동정동 은행나무 보호수 (0) | 2015.08.27 |
---|---|
내서읍 원계리 느티나무 노거수 (0) | 2015.08.25 |
내서읍 안성리 독뫼의 작은 숲이 전하는 이야기 (0) | 2015.08.23 |
대산면 우암리 민주엽나무 노거수 (0) | 2015.08.08 |
불모산 재찜고개(上點嶺)의 소사나무 노거수 (0) | 2015.07.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