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보호수와 노거수

내서읍 안성리 독뫼의 작은 숲이 전하는 이야기

천부인권 2015. 8. 23. 10:04

 

 

<2015/8/25 안성리 독뫼산 푸조나무>

 

노찾사가 찾아간 내서읍 안성리는 오래된 마을이기도 하지만 풍수적으로도 잘 만들어진 비보 숲을 갖춘 마을이다. 안성저수지 퇴숫도랑 바위에 風浴(풍욕)이라 쓴 금석문이 남아있다는 것은 갓쟁이 또는 머리에 먹물이 든 사람들이 나름의 세월을 즐기며 살았다는 흔적이기도 하다.

진동, 진북, 진전에는 前窄後寬(전착후관)를 만들기 위한 숲들이 제법 남아 있지만 내서읍에는 삼풍대 숲과 이곳 안성리 비보림이 남아 있는 숲의 모두이다. 그 중에서도 안성리 비보림을 보면 전착후관이 뭔지를 깨닫게 되는 좋은 본보기이다.

이곳 사람들이 큰 숲이라 부르는 곳에서 150m 떨어진 독뫼산은 안성마을의 조산이기도 하고 전망대이면서 독뫼의 가장자리는 나무를 심고 중앙은 비워 두어 공동의 휴식처이기도 한 곳이다.

이 독뫼에는 나뭇가지가 용트림을 하는 소나무와 은행나무, 푸조나무, 회화나무, 서어나무, 팽나무 등이 어우러져 있는데 서어나무, 팽나무를 제외한 나무들은 사람이 직접 식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독뫼산에서 가장 굵은 푸조나무 2그루는 내서읍에는 자생지가 없는 나무라 이곳에 식생 되어 있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가장 큰 푸조나무의 가슴높이 둘레를 재어보니 425cm 정도이고, 높이는 21m이다. 추증 되는 나이는 200년 정도인데 마을의 형성시기를 본다면 더 올려 잡아도 무방하리라고 생각한다.

 

 

 

 

 

<내서읍 안성리 독뫼산의 소나무 노거수>

 

 

 

 

<안성못 퇴수도랑으로 가는 하천에 위치한 古今 각자>

 

내서읍 안성마을의 비보숲을 탐사하다가 안성저수지까지 가보니 內西水利組合創設記念碑(내서수리조합창설기념비)가 못둑 입구에 세워져 있었다. 갑술(1934)년 복양절(復陽節)李秉株(이병주)가 지은 비문이고, 소화(昭和) 10(을해, 1935)1월에 조합원들이 세운 것이다. 創設人(창설인)南士兼(남사겸), 崔炳化(최병화), 朴璟俊(박경준) 등이다. 아마도 1930년경에 안성못이 조성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안성못의 물이 넘쳐흐르는 퇴수도랑은 산자락의 일부를 잘라 만들었는데 단단한 화강암의 큰 덩어리라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하여 폭파를 한 흔적이 있고, 그렇게 조각난 화강암은 하천 둑을 쌓는 견치돌로 사용을 하였다. 이 화강암에는 녹물이 많이 나와 철분이 많음을 알게 한다.

 

 

 

<안성못 퇴수도랑의 風浴 각자>

 

이렇게 만들어진 바위 절개지에는 風浴(풍욕)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고, 아래의 큰 바위에는 古今(고금)이라는 각자도 새겨져 있다. '풍욕''논어' '선진편''욕호기풍호무우영이귀(浴乎沂風乎舞雩詠而歸)에서 따운 글로써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면서 돌아오고 싶다'는 구절에서 비롯된 말로 바람을 일으켜 하는 목욕을 말한다.

이 금석문 각자는 이곳에 위치한 신불사에 기거하던 거사가 새겼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으며, 아직도 관리를 하는지 글씨에 붉은 칠을 한것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곳의 바위 절개지는 안성못을 만들면서 다이나마이트의 폭발로 화강암을 깨어내면서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그 후 글을 새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1930년 이후에 새긴 것으로 추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