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3일 ‘마창기술봉사단’이 함양군 병곡면 연덕리(휴촌, 덕평, 연서마을)를 봉사활동 지역으로 정했다. 창원 중동성당에서 출발하여 함양IC를 빠져나가 병곡면 입구까지 잘 찾아갔지만 목적지를 정확히 몰랐다. 그러다보니 우리 일행은 덕평마을로 진입한 것이 아니라 이웃 마을인 휴촌마을로 들어갔다 나오는 헤프닝을 겪었다. 덕분에 위천변의 영귀정을 멀리서나마 볼 기회를 가졌고 이후 시간을 내어 촬영을 하였다.
休村(휴촌)마을에 대하여 甁谷面(병곡면)에서는 “조선 세조 때 한남군(세종대왕의 12째 아들)이 엄천골로 유폐당하여 가는 길에 이곳 근처 분동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쉬어 갔다고 해서 둔터 또는 쉼터라 하여 한자어로 휴촌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일설에는 마을 주변에 갖가지 나무들이 무성하여 숲의 그늘과 장소가 좋아 지나가는 나그네들이 쉬어간다고 하여 휴촌이라 하였다 하며, 숲이 우거진 터라서 숲터라고 불렀는데 음이 변하여 수터로 되었다는 설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봉사활동 지역인 덕평마을에서 주민에게 마을의 유래를 물으니 병곡면 우체국 뒤편에 위치한 송호서원과 위천변 詠歸亭(영귀정)을 알려 주었다. 인터넷으로 영귀정을 찾아보니 전국에 제법 많은 곳이 검색이 된다. 그래서 ‘詠歸亭(영귀정)’이라는 뜻을 살펴보니 공자와 제자들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이름이다. 공부자가 제자들에게 “이루고 싶은 소원이 무엇이지.”를 묻자 대부분의 제자들은 벼슬에 올라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한다고 답했다.
그런데 曾點(증점)이라는 제자는 “늦은 봄 날씨 따뜻한 때 봄옷이 마련되면 대 여섯 명의 어른과 예닐곱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기수(沂水)에 나가 목욕하고 무우(舞雩)의 제단 터에서 바람을 쏘인 뒤 노래하며 돌아오는 삶을 살고 싶다.”고 대답 했다. 詠歸(영귀)란 증점의 마음에서 비롯된 영이귀(詠而歸)에서 나온 용어이다. 이후 선비들과 도학자들이 詠歸(영귀)라는 이름의 亭(정), 樓(루), 臺(대)를 짓고, 가장 닮고 싶고, 이루고 싶은 삶의 이상향으로 삼은 것이 이 詠歸(영귀)라는 것이다.
권세와 재물 등 세상의 욕망을 버리고 오롯이 부모, 아내, 자식과 즐거이 봄나들이를 다녀 온 후 노래하며 집으로 돌아온다는 詠歸(영귀)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이루고 싶은 진정한 삶의 아름다움이며, 불변의 가치이고, 행복의 완결이 아닐까?
병곡면 위천변의 비지정문화재로 분류 되는 詠歸亭(영귀정)은 단종의 복위를 바라던 충신 고은 이지활의 손자인 송계 이지번이 수안군수 시절 연산군의 어지러운 정치로 사직하고, 수양을 위해 이곳 고향에 돌아와서 지은 정자라고 한다. 그러나 잦은 병란으로 정자가 폐허가 되었고, 이후 후손들이 중건하였다가 1946년 다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영귀정은 송계 이지번이 연산군 원년(1495)에 창건하였으나 훼손된 것을 1907년 13세손 이교운, 14세손 이종필 등이 중수하였다. 그러다 1946년 송계가 노닐던 이요대위에 이전 건립하였다.
영귀정이 위치한 곳은 위천이라 찾아 가고자 한다면 ‘함양군 병곡면 연덕리 249’을 입력하고 가면 된다. 병곡면 사무소에서 직선거리로 300m 쯤 되며, 농로를 따라 위천으로 따라가면 만나게 된다.
敬次重建韻
林巒遙揖翼如亭 수풀뫼가 멀리서 내리면 정자(亭子)에 읍하는 듯
先祖當年養性靈 선조께서 당연에 성품(性稟)을 길렀도다.
酒熟凉春團白社 술 익는 서늘한 봄에 두레를 이루어서
煙薰鎭日讀黃庭 훈훈한 연기로 진일(鎭日) 황정견서(黃庭堅書) 이르도다.
久嗟廬阜荊榛沒 슬프다 오래도록 오두막 형진(荊榛)에 묻혔으니
謄喜濾江水石醒 기쁨이란 강을 걸러 흐르는 수석(水石)에 깨우침이라.
百世完然風詠裏 백세토록 완연히 풍류(風流)의 운치 속에
雲仍須念繼遺馨 자손들은 모름지기 향화(香火)를 이을 것을 생각하노라.
後孫鶴容 후손 학용(鶴容)
謹次原韻
登亭嘯詠竟妄歸 정장에 올라 읊조리며 마침내 돌아갈 줄 알았더니
了却坌塵遠是非 분진(坌塵)을 잊었으니 옳고 그름 멀리했네.
滿壁圖書眞活計 벽장(壁藏)에 가득한 글 참되게 살아갈 계책(計策)이거늘
詠歸閑月夢依依 영귀(詠歸)하는 한가한 달에 꿈이 의의(依依)하도다.
濫溪表沿沫 남계 표연말(表沿沫)
倦飛山鳥放先歸 게으른 산새들이 훨훨 먼저 돌아가니
謾敎淵明悟昨非 도연명(陶淵明)의 아득한 가르침에 어제의 잘못 깨달았네
痛矣斯門廷禍後 비통(悲痛)하다 우리의 도(道) 화(禍)가 뻗친 그 뒤에
吾生從此更君依 오생(吾生)등 이를 쫓아 다시 그대에게 의지하리라.
勿翁兪好禮 물옹 유호예(兪好禮)
白雲山下詠歸亭 백운산 아래의 영귀정(詠歸亭)에서
簫灑襟懷養性靈 산뜻한 회포(懷胞)에 성품의 정령(精靈)함을 길러왔도다.
綠野三杯忘世事 푸른 들녘 술 석잔에 세상일 모두 잊고
潯陽五柳鎖門庭 심양(潯陽)의 오유(五柳)는 뜰문에 감추었네.
寄情泉石眞知止 정 붙인 천석(泉石)에는 참된 그칠 바를 알거늘
玩意琴書任喚醒 금서(琴書)에 뜻을 두고 부르면서 깨우침을 맡겼노라.
粧點溪庄淸晩福 시냇가에 장점(粧點)하여 늦은 복이 맑으니
滿家羊鴈又寧馨 집에 가득한 양안(羊鴈)은 또한 이와 같도다(寧馨).
崔圭巖 漢候 최규암 한후
詠歸亭原韻 영귀정 원운
秋來見月詠而歸 가을 달을 보고 읊으며 돌아오니
四十三年始覺非 사십삼년 흘러간 세월 비로소 헛됨을 깨닫노라.
誰掃粃糠能濟溺 그 누가 비강(粃糠)¹⁾을 쓸어내리고 능히 침닉(沈溺)된 도를 구제하리.
暮年吾道更無依 저물어 가는 이 해에 우리의 도(道) 의지할 바 없도다.
無端出世髮皤然 무단히 세상에 나서 머리카락 세어가니
滿腹桑弧試未全 배부른 상호(桑弧)²⁾를 시사(試射)함이 은전(穏全)치 아니하네.
歸矣已辭彭澤宰 돌아가리니 이미 팽택(彭澤)의 재읍(宰邑)도 사양하고
居然又得紫陽泉 거연(居然)히 또한 자양(紫陽)의 샘을 득(得)하게 되도다.
襟前山水兼仁智 바로 앞의 산과 물은 인(仁)과 지(智)를 겸하여서
案上詩書做聖賢 책상 위의 시서(詩書)들은 성현(聖賢)을 본 받았네.
萬物同春康濟地 만물(萬物)이 같이한 봄 강제(康濟)³⁾하는 이 땅에
此身只此送餘年 이 몸은 다만 이 남은 세월 보내노라.
辛未春重修韻 신미년 봄 중수 때 소리
依舊重新一小亭 옛날같이 새로워진 한 작은 정자에
枕山臨水盡奇靈 산(山)을 베고 물에 임하니 모두가 신기한 영구(靈區)더라.
烟霞自作羲皇國 안개와 노을은 스스로 희황(羲皇)의 나라를 만들었고
詩禮曾趨叔父庭 시서(詩書)와 예악(禮樂)은 일찍 숙부(叔父)의 조정에 나아갔다.
抺月櫛風身欲老 세월을 만지고 바람이 빗질하니 몸은 늘고져 하거늘
撫松隨柳意初醒 소나무 만지며 버들 따라 뜻을 처음 깨쳤도다.
太和春境無邊畔 태평(泰平)한 봄의 경계(境界)는 가이없이 화(和)하거늘
會得偸閑一味聲 모여서 한가함을 훔쳐 얻으니 일미(一味) 같은 소리더라.
松溪翁稿 송계옹이 운을 쓰고
丁未暮春重建日 정미년 늦은 봄 중건 일에
十三世孫敎運謹書 13세손 교운이 삼가 쓰다.
【주석】
비강(粃糠)¹⁾ : 쭉정이와 겨
상호(桑弧)²⁾ : 뽕나무로 만든 활, 옛날에 아이를 낳으면 이 활 여섯 개에 쑥화살 여섯 개를 천지사방(天地四方)에 쏘았음.
강제(康濟)³⁾ : 백성을 편안하게 하여 구제함.
雲霄遠外氣超然 구름 낀 먼 하늘 기상이 초연하니
百世遺風節義全 백세(百世)에 끼친 풍류 온전한 절의더라.
詩就淸呤心似月 글을 읊는 맑은 마음 눈 같이 맑으니
境深幽寂枕回泉 깊은 경계(境界) 유적하니 회천(回泉)을 베었더라.
經籍講磨牖後學 경서(經書)를 강마(講磨)함은 전현을 벗했도다.
恁地名亭如是好 임지(恁地)의 명정(名亭)이 이같이 좋거늘
吾家先蔭復餘年 우리 집 선조(先祖)의 음덕(蔭德)이 다시 넉넉하도다.
十三世孫廷蘭 13세손 정란(廷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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