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월광사지 쌍탑은 대가야의 눈물일까?

천부인권 2016. 3. 20. 06:41



<2011.8.21 월광사지동서삼층석탑>


 

합천군 야로면 월광리 369-1에는 보물 제129호로 지정이 된 月光寺址東西三層石塔(월광사지동서삼층석탑)이 위치해 있다. 이 쌍탑은 옛 月光寺(월광사) 앞에 세워진 탑이라 하여 월광사지동서삼층석탑이라 부른다. 월광사는 대가야의 마지막 왕인 道設智王(도설지왕=월광태자)이 창건했다고 하여 월광사라 이름 붙였다. 사라진 월광사 터에 요즘에 다시 월광사가 들어섰지만 쌍탑이 서있는 이곳은 월광사지라 부르고 있다. 이 월광사지의 위치는 해인사로 가는 가야산로(1084 국도)에서 좌측 월광이천길로 들어서면 약 250m에 가야천을 가로지르는 월광교가 나온다. 월광교를 지나면 우측에 소나무가 서있는 곳에 위치한다.




<2011.8.21 남쪽에서 본 월광사지동서삼층석탑>


月光寺址東西三層石塔(월광사지동서삼층석탑)은 월광사지의 동서로 배치된 쌍탑으로 2중기단에 3층의 탑신부를 갖춘 전형적인 신라의 탑이고 높이는 5.5m이다. 두 탑은 전체적으로 비슷하게 보이나 동탑은 전체의 규모에 비해 기단부의 구성에서 다소 많은 돌을 사용하였고, 서탑은 쓰러진 것을 최근에 세워 파손된 흔적이 보인다. 또한 기단 각 면의 가운데에도 기둥모양을 본떠 새겨놓았는데 서탑은 2개이고, 동탑은 1개이다. 따라서 제작 수법이 차이가 나 세워진 연대가 다른 것으로 보고 있다.


 


<2011.8.21 북쪽에서 본 월광사지동서삼층석탑>


 

마의태자가 신라 최후 왕자라면 월광태자는 대가야 최후의 왕자이다. 나라가 망하면 최고의 권력자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시대를 떠나 두 태자들의 신세가 말해 준다. 월광태자의 서러운 삶을 통해 대가야의 옛 이야기를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해인사 국사단>


 

가야산의 1천년 고찰 해인사 대웅전으로 가다보면 높다란 계단위에 海東圓宗大伽藍(해동원종대가람)이란 현판이 붙은 解脫門(해탈문)이 우뚝 서 있다. 이 해탈문을 오르기 전 우측에 비켜 앉은 자그마한 맞배지붕의 건물에는 局司壇(국사단)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내부에 걸려 있는 탱화에는 여인이 주인공으로 그려져 있다.

국사단의 안내판에는局司壇(국사단)局司大神(국사대신)을 모신 단으로서 국사대신은 도량이 위치한 山局(산국)을 관장하는 산신과 土地伽藍神(토지가람신)을 가리킨다. 가야산신인 正見母主(정견모주-깨달음의 어머니)는 하늘의 신 이비가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큰 아들 이진아시왕은 대가야국을, 작은 아들 수로왕은 금관가야국을 각각 건국하였다 한다. 국사대신은 인간세상을 손바닥 보듯이 하면서, 신비스런 玄風(현풍)을 떨쳐 해인사에 재앙을 없애고 복을 내린다. 가람을 수호하는 신을 모셨기 때문에 도량 입구에 배치되었다.고 적어 두었다. 이 국사단은 안내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대가야의 시조인 가야산신 정견모주를 기리기 위해 세운 社壇(사단)으로 이 건물을 모태로 창건한 절이 해인사이다.


 


<2011.8.21 북쪽에서 본 동삼층석탑>

 

대가야가 멸망하기 전에는 많은 철의 생산으로 연맹체를 넘어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 놓였던 시기였다. 대가야는 중국에 사신을 보내 관직을 받고, 왜와도 직접교류를 가졌다.

그러나 500년대 초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영토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신라와 백제의 땅은 넓어지고 대가야의 세력은 날로 줄었다. 가야제국은 구심점을 잃고, 신라와 백제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대가야는 가야제국을 아우를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편승해 때로는 신라, 때로는 백제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2011.8.21 남쪽에서 본 동삼층석탑>


대가야는 생존을 위해 522년 신라 왕실과 정략결혼을 맺었고 이뇌왕과 신라 이찬의 딸 사이에서 비운의 월광태자가 태어난다. 그러나 529년 신라가 대가야에 쳐들어와 3성을 빼앗음으로써 그 동맹은 깨진다. 국제관계란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지금의 한미관계도 다를 바 없다는 점에서 우리 민족의 앞날은 참담하다고 본다.




<2011.8.21 서쪽에서 본 서삼층석탑>


562, 급기야 신라는 장군 이사부(異斯夫)와 정예군을 보내 대가야를 공격했다. 화랑 사다함(斯多含)이 선봉에 선 기병 5천명이 망산(望山;錦山) 고개를 넘고 알터를 비껴 맹렬히 대가야의 도읍지 고령으로 진격했다. 대가야 군사들은 손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맥없이 스러졌다. 전쟁에 승리한 진흥왕은 점령지에 대가야군(大加耶郡)을 두었고, 망명자인 대가야의 왕족 월광을 도설지왕(道設智王)으로 옹립하고 지역의 민심을 수습한 것은 잠시이고, 대가야 지역을 완전히 장악 후에는 월광을 폐위시켰다. 이에 월광은 속세를 떠나 승려가 되어 가야산 서쪽 5'거덕사'에 몸을 두다 훗날 야로현 북쪽 5리에 터를 마련하고 '월광사'를 건립했다.


 



<2011.8.21 서쪽에서 본 서삼층석탑>




<2011.8.21 남쪽에서 본 서삼층석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