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합천 청량사 보물과 삼국사기가 전하는 최치원

천부인권 2016. 3. 24. 08:29


<2011.8.21 합천 청량사 삼층석탑과 석등>



 

합천 가야면에서 해인사로 가다보면 황산리를 지나는데 이곳 가야면 황산리 973’에는 삼국유사 열전의 인물인 최치원이 즐겨 찾았다고 전하는 청량사란 절이 있다. 해인사의 유명세에 밀려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대한민국 보물이 3개나 남아 있는 유서 깊은 절이다. 3개의 보물은 대웅전에 모신 陜川 淸凉寺 石造釋迦如來坐像(합천 청량사 석조석가여래좌상)과 대웅전 앞마당에 위치한 陜川 淸凉寺 石燈(합천 청량사 석등) 陜川 淸凉寺 三層石塔(합천 청량사 삼층석탑)이다. 남향을 한 대웅전 앞으로 삼층석탑과 석등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으며, 석등 앞에서 남쪽으로 바라보는 풍경은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마당에서 보이던 첩첩산중이라는 단어를 연상케 한다. 아마도 이런 풍광이 있어 이곳에 절을 짓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해 본다.




 

신라 멸망 50년 전에 살다간 비운의 천재 최치원은 이곳 청량사의 중들과 막역한 사이로 지내다가 그들이 세상사에 개입함을 못내 아쉬워하며 푸른 산에 맹세 한다는 청산맹약시를 지었다. 최치원은 그의 청산맹약시처럼 흔적도 남기지 않았으며 어느 누구도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볼 수 없도록 신선이 되어 버렸다. 이후 많은 천재들이 그가 택한 신선의 경지를 따라 하기 위해 수도를 하였지만 뜻을 이룬 사람은 아무도 없다.

 




 

靑山盟約詩(청산맹약시)

僧乎莫道靑山好(승호막도청산호) 중아 산 좋다 말씀 마라

山好何事更出山(산호하사경출산) 산이 좋다면서 왜 다시 나오나

試看他日吾踪跡(시간타일오종적) 뒷날에 내 자취 시험해 보라

一入靑山更不還(일입청산경불환) 한 번 들면 다시는 오지 않으려니



 


 

창원시에도 최치원 선생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데 옛 고지도 地乘(지승)에 그려진 합포구의 月影臺(월영대)斗尺山(두척산)孤雲臺(고운대)가 그것이고, 진해구 가주동의 청룡대 각석이 전한다. 그리고 회원구 두척동에 위치한 두곡서원에서는 文昌侯崔先生影堂(문창후최선생영당)을 지어 선생을 배향하고 있다.




 

비운의 천재 최치원 선생에 대해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최치원(崔致遠)의 자()는 고운(孤雲)-또는 해운(海雲)이라고 한다.-이며, 서울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역사에 전하는 기록이 없어져 그 세계(世系)를 알 수 없다. 치원은 어려서부터 총찬찬하고, 민첩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 나이 12세가 되자 장차 배를 타고 당()나라에 들어가 배움의 길을 찾으려고 하였다. 그 아버지는 십 년 안에 과거에 붙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가서 부지런히 힘쓰라.”고 하였다. 치원이 당나라에 이르러 스승을 따라 공부를 부지런히 하였다. 崔致遠 字孤雲[或云海雲] 王京沙梁部人也 史傳泯滅 不知其世系 致遠少 精敏好學 至年十二 將隨海舶入唐求學 其父謂曰 十年不第 卽非吾子也 行矣勉之 致遠至唐 追師學問無怠-<중략>-





 

치원은 서쪽에서 당()나라를 섬기다가 동쪽으로 고국에 돌아온 후까지 모두 혼란한 세상을 만나 운수가 꽉 막히고[蹇屯], 움직이면 매번 비난을 받으니 스스로 불우함을 한탄하여 다시 관직에 나갈 뜻이 없었다. 산림의 기슭과 강이나 바닷가에서 자유롭게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스스로 구속되지 않았다. 누각을 짓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었으며, 책을 베개 삼고, 풍월을 읊었다. 경주의 남산, 강주(剛州)의 빙산(氷山), 합주(陜州)의 청량사(淸涼寺), 지리산(智異山)의 쌍계사, 합포현(合浦縣)의 별장 같은 곳은 모두 노닐던 곳이다. 최후에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하면서 친형인 승려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었다. 벼슬하지 않고 편안히 살다가 노년을 마쳤다. 致遠自西事大唐 東歸故國 皆遭亂世 屯邅蹇連 動輒得咎 自傷不遇 無復仕進意 逍遙自放 山林之下江海之濱 營臺榭植松竹 枕藉書史 嘯詠風月 若慶州南山剛州氷山陜州淸凉寺智異山雙溪寺合浦縣別墅 此皆遊焉之所 最後 帶家隱伽耶山海印寺 與母兄浮圖賢俊及定玄師 結爲道友 棲遲偃仰 以終老焉


 








 

陜川 淸凉寺 石燈(합천 청량사 석등) 보물 제253,

청량사(淸凉寺) 안에 3층석탑과 나란히 놓여 있는 석등이다.

네모난 지대석 위의 하대석은 8각으로 이루어졌으며, 아래에서부터 받침부분과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 지붕돌과 머리장식부분으로 구성된다. 8각의 아래받침돌은 측면에 사자상과 향로를,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기고 각 끝마다 작은 꽃을 돌출시켰다. 가운데기둥은 장고를 세워놓은 모양이며, 그 위로 연꽃모양의 윗받침돌을 올렸다. 받침부분 위로는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이 놓여있는데 네 면에 창을 내고 옆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지붕돌은 얇은 편으로 경사면은 완만하고 각 귀퉁이는 곡선을 이루며 치켜 올려져 있어 경쾌하다. 머리장식부분은 형태가 분명하지 않은 두 개의 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전체적으로 평면이 8각인 석재를 층층이 쌓아 올려 신라시대의 기본양식을 잘 따르고 있으나, 받침부의 가운데기둥이 변형된 점이나 조각수법 등으로 미루어 9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출처-문화재청]







 

陜川 淸凉寺 三層石塔(합천 청량사 삼층석탑) 보물 제266

청량사 대웅전 앞에 서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다. 청량사는 매화산(梅花山) 기슭에 있는 사찰로,삼국사기에 의하면 최치원(崔致遠)이 즐겨 찾았던 곳이라고 한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며, 바닥돌 아래에 화강석을 두른 널찍한 구역을 이루고 있는 보기 드문 모습을 하고 있다. 바닥돌 위의 아래층 기단은 가운데돌을 한 돌로 하여 4매의 석재로 구성하였다. 아래·위층 기단에는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기단부의 맨윗돌 네 모서리는 약간 치켜 올라가 있어 특색이 있고, 그 위로 2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한 돌로 구성하였으며,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아래에 5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경사진 면은 완만하나 네 귀퉁이는 경쾌하게 치켜 올라가 있다.

이 탑은 각 부분이 아름다운 균형을 이루면서 조각수법도 경쾌하고 우아하여, 통일신라시대 9세기에 만들어진 탑 가운데 대표할 만한 작품이다. 1958년 이 탑을 수리할 때 3층 지붕돌에서 사리를 두던 둥근 공간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출처-문화재청]


 






 

陜川 淸凉寺 石造釋迦如來坐像(합천 청량사 석조석가여래좌상) 보물 제265

삼단의 사각좌대 위에 결가부좌하였고, 옷을 입은 모양은 右肩偏袒(우견편단)이고, 손은 降魔觸地印(항마촉지인)을 하였다. 나발의 머리에는 육계가 뚜렷하고, 단아한 얼굴표정, 안정되고 조용한 신체 형태는 현실적 사실주의 양식으로 석굴암 불상과 함께 불상양식 전개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불상의 높이는 2.1m, 좌대 높이 75cm이다. 특히 불꽃문양의 광배 꼭대기에는 화불이 모셔져 있으며 양쪽에 구름을 타고 나는 두쌍의 비천상이 역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석불의 기단석에 보면 부처님께 차공양을 올리는 보살상이 조각돼 있어 신라시대에도 차 문화가 발달됐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게 하는 좋은 자료이다.[출처-안내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