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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군 병곡면 송평리 송호서원

천부인권 2016. 3. 18. 07:59




2016313일 마창기술봉사단의 봉사활동지인 병곡면 연덕리 덕평마을에서 봉사활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경상남도의 문화재인 송호서원을 둘러 봤다. 함양군 병곡면사무소 뒤편 병곡면 송평리 537’에는 1974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09호로 지정이 된 松湖書院(송호서원)이 위치해 있다. 松湖書院(송호서원)1829(純祖 29)에 지방유림의 공의를 모아 창건한 것으로 孤隱 李智活(고은 이지활松溪 李之蕃(송계 이지번漢南君 李棜(한남군 이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위패를 봉안하고 향사를 올리는 곳이다.


 





主 配享人物(주 배향인물) 文靖公 孤隱 李智活(문정공 고은 이지활)1434년 성주 장지촌에서 大提學 吏曹判書(대제학 이조판서) ()의 아들로 태어났다. 14세때 司馬試(사마시)에 합격하고, 문종118세의 나이로 운봉현감이 되어 벼슬길에 올랐으나, 1455년 단종이 왕위를 찬탈당하여 영월로 유배당함을 듣고는 즉시 관직을 버리고 함양의 백전으로 옮겨와서 白花堂(백화당)을 짓고 자연과 벗하며 지냈다.

이 백화당에는 壬辰倭亂(임진왜란)과 관련된 전설이 전하는데 함양 백전까지 침략한 왜구가 백화당에 불을 질렀더니 처마에서 갑자기 물이 쏟아져서 불이 꺼지자, 나무를 더 쌓아놓고 불을 지르니 지붕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이에 왜구들이 두려워서 벌벌 떨며 불을 끄고 일렬로 서서 절하고 도망하였다.” 또한 선생의 碑石(비석)에는 까마귀나 새들이 날아 앉지 않는다고 전해지고 있다. 과장된 전설이라 말할 수 있지만 백화당이 불타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그 뒤에 거창 땅에 고려에 의해 신라말 나라가 ()하자 朴儒(박유)라는 분이 고려의 건국에 불복 하여 숨어서 살았다는 朴儒山(박유산) 있음을 듣고 君臣(군신)節義(절의)는 한 가지 라며, 박유산에 들어가 산위에 望月亭(망월정)을 짖고 매일 밤 단종을 사모하며 북녘을 바라보며 통곡 하였다. 그때 지었다는 시를 후손들이 송호서원 앞에 시비를 세웠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夜夜相思到夜深(야야상사도야심)-밤마다 이슥토록 임금님을 생각하니

東來殘月兩鄕心(동래잔월양향심)-기우는 달만 임과 나를 비추이네

此時寃恨無人解(차시원한무인해)-이 원한을 풀어줄 사람 없어

孤倚山亭淚不禁(고의산정누불금)-외로이 산정에 기대어 눈물 흘리네.

 


 



두 번째 배향인물인 漢南君 貞悼公 李棜(한남군 정도공 이어)선생의 ()()이며 封號(봉호)漢南君(한남군)이요, 諡號(시호)貞悼(정도)이다. 세종대왕의 184녀중의 12남으로 혜빈 양씨(현감 의 딸로 한남군,수춘군,영풍군의 3남을 두었다) 소생으로 세종11(1429)에 출생하였고 12세에 예빈 녹사 권격의 딸과 결혼 하였으며 문종1(1451)에 한남군으로 ()하여 졌다,

세조 원년(1455)에 단종을 보호 하여 오던 모친 양빈(정조때 혜빈이라는 빈명과 민정이라는 시호를 받았음)과 함께 왕위 찬탈에 항거하다 안평대군 등과 유배 되었으며, 살던 집은 세조의 권신 권람에게 하사되었다. 14566월 금성대군과 함께 상왕(단종으로 당시에는 노산군이었음)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627일 함양군 휴천면 새우섬에 圍籬安置(위리안치) 되었다. 1456년 아들 중생을 두었으며 세조5(1459) 529일 병으로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영조18(1742)에 한남군에게 貞悼公(정도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정조15(1791)에 모친 양빈에게 혜빈과 민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을 설치하여 제향 할 것을 명 하였으니 ()은 충주에 있다. 한남군은 1832년 이곳 송호서원 및 공주 숙모전에 배향 하였다.






松湖書院(송호서원) 마지막 배향인물인 松溪公 李之蕃(송계공 이지번)은 이지활의 손자이며 縣監 文賢(현감 문현)의 아들로 1469년에 태어났다. 호는 松溪(송계),자는盛仲(성중)으로 본관은星州(성주)이다. 스승 없이 스스로 학문의 논리를 터득하여 경지에 이른 사람으로 당대의 명사들인 표연말, 유호인, 최한후 등과 교류하였다.

1492(성종23년 임자)선생이 24세 때에 재향으로 천거되어 시독관과 사간을 지낸 바 있으며, 무장(전북 고창군 무장면지역)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당시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백성의 불신 및 곳곳에 도적이 많아 민심이 흉흉하였는바 부임한지 한달만에 모든 폐단을 깨끗이 청산하여 명현감으로 이름이 높았다. 성종 23(1492)에 조정에서는 그 명성을 인정하여 遂安郡守(수안군수)로 승진시켜 지방관의 책무를 다하게 하였다, 1495년 연산군이 즉위 하여 정치가 혼란하자 조정에서 더 이상 관직 생활을 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와 위천변에 詠歸亭(영귀정)을 짖고 경서를 읽으며 후학을 길러 학문을 장려하여 여생을 보낸 분이다. 그 후 1832(순조32) 송호서원에 배향되었다.


 





송호서원의 연혁에는 1829(순조 29己丑)本鄕(본향)盧稽(노계)本孫(본손)春遇(춘우)進士(진사)敬緝(경집)과 더불어 祠宇(사우)를 세우고,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9(고종 6)에 훼철되었다가 1915년 단을 설치하여 제향을 올리다가 1936년 서원을 다시 지었으며, 1947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은 祠宇(사우)景仰祠(경앙사) 三間(삼간)南向(남향)으로 하고, 神廚(신주) 二間(이간)承事門(승사문)이라 이름하고, 祠門 三間(사문 삼간)望瘱位(망예위)設壇(설단)했다. 祠門(사문)바로 앞에 院宇(원우)四間(사간)인데 그 중에 二間(이간)講堂(강당)인데 정면에 仰止堂(앙지당) 북면에 松湖書院(송호서원)이라 계액 하였고, 좌협실을 居敬齋(거경재) 우협실을 集義齋(집의재)라 한다. 院門(원문)整容門(정용문) 三間(삼간)省牲臺(성생대) 등은 1830(순조30庚寅)봄에 서원을 완공 하고, 1830(순조30庚寅)410일에 영,호남의 유림이 모두 모여 孤隱(고은)선생의 位版(위판)을 봉안 하였다. 1832(순조 32壬辰) 225일에 漢南君貞悼公 李 (한남군 정도공 이 어)松溪公 李之蕃(송계공 이지번)追享(추향)하였다. 이후로 세 선생의 위패를 모셔셔 매년 3월 중정(中丁 : 두번째 丁日)9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게 되었다. 재산으로는 전답 2,300, 임야 4.5정보, 대지 600평 등이 있다.






1868(고종5戊辰)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이 내려 없어지고 말았다.

1914(甲寅)書院(서원)의 옛터에 遺墟碑(유허비)를 세우고,

1915(乙卯)에 유림의 공론으로 儒契(유계)을 설립 하고 서원이 있던 자리에 遺墟設壇(유허설단)에 병풍을 치고 제상을 놓고 세분의 位牌(위패)를 모시고 서원 행사와 같이 釋菜禮(석채례)를 행 하였다.

1936(丙子)에 유림의 공론과 본손들이 서원을 복설 할 것을 결정하여 동년 9월달에 서원복설공사를 시작 하여 1937(丁丑)7월 달에 祠宇三間(사우삼간),內祠問 三間(내사문 삼간)을 완료 하였다.

1937(丁丑)8中丁日(중 정일)에 유림계원과 후손이 세분의 位牌(위패)奉安(봉안)하고 秋享禮(추향례)를 행 하였다. 이때부터 매년 2월과 8中丁日(중정일)春秋享禮(춘추향례)를 지내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68년 봄에 송호서원 강당 증축 하였고,

1969년 서원 축대 보수공사를 하였으며,

1970년 서원 정문앞에 홍살문을 건립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