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진동면 사동리 봉래정 鳳來亭

천부인권 2016. 11. 13. 23:12



<2016.11.01. 사동리 봉래정 풍경>

 

옛 문헌에 鎭東面 社洞里(진동면 사동리)에는 鳳來亭(봉래정)과 일우정이 있다고 하여 사동리를 찾았다. 사동리는 북쪽 산 경계를 따라 덕곡천이 흐르고, 서쪽에서 흘러오는 인곡천을 만나는 자리이고, 남북으로는 진동천이 흘러와 사동교 아래에서 인곡천을 만나 진해만으로 흘러간다. 사동리란 옛 진해현의 현감이 사직단을 만들고 제례를 올리던 곳이라 사동리라는 이름으로 마을이 형성 된 곳이다. 그런 만큼 하천이 마을 앞뒤로 흐르고 높지는 않지만 절벽을 이루는 산이 형성되어 천혜의 요새와 같은 지형을 이루고 있어 토성을 쌓고 마을을 방어한 흔적이 남아있다. 풍수적으로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背山臨水(배산임수), 前低後高(전저후고), 前窄後寬(전착후관)을 이룬 지형이다. 그러다 보니 삼진의 토호들과 유생들이 이곳 절벽에 봉래정을 짓고 담론과 시문을 논하던 자리를 마련했다.





두 정자를 찾아서 사동리 마을회간을 갔더니 마침 마을이장을 맡고 계신 여성분을 만나 봉래정과 일우정에 대해 물으니 일우정은 모르겠다고 하시며 봉래정은 사동교에서 마을로 들어오면 호텔이 있는데 그 곳에서 산 쪽을 보면 절벽위에 있다고 하셨다. 다시 마을 입구 쪽으로 내려와 그린파크호텔 입구에 주차를 하고 산을 보니 3m 절벽 위 나무들에 가려진 봉래정을 만났다. 주소로 찾는다면 진동면 사동리 294-32번지를 입력하면 된다.

 





절벽으로 오르는 계단을 따라 봉래정 입구에 가니 자연석 돌로 담장을 하고 좁은 철문을 달아 두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정면 3, 측면 2칸의 정자가 건설되어 있고, 정자 밖의 공간은 거의 없는 편으로 낮은 담장 밖은 절벽이다. 각 기둥마다 주련이 달려있는데 10개의 주련은 우산10경을 담고 있다.

 





창원군이 발행한 내고장의 전설에는 삼진의 牛山八景(우산팔경)에 대한 내용을 남겨 두어 여기에 소개를 한다.

 

石門朝雲(석문조운)

우산을 들어서는 입구는 험한 산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흡사 돌문을 달아 놓은 듯이 보인다. 이른 아침에 암벽사이로 구름이 피어오르는 광경은 실로 장엄하다할 것이다. 하루의 시작과 함께 아침이 열리는 순간의 풍경을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鷲峰秋月(취봉추월)

교동 뒤산에 있는 솔개봉에 티 없이 맑고 둥근 달이 걸리면 가을밤의 정취는 한결 무르익는다. 萬籟(만뢰)는 교교한데 섬돌 밑의 귀뚜라미 소리 밤을 지새는 秋夜長(추야장), 어디선가 벽오동잎 지는 소리에 묻은 어르신 큰 기침소리 한 자락이 들일 것 같은 정경이 떠오른다.

寥州落雁(요주낙안)

寥場里(요장리) 일대는 옛날 삼()밭이다. 이곳에 가을이 깊어지면 갈대가 우거져서 사람의 키를 덮는다. 바람에 끝없이 서걱이는 갈대밭 어디선가 기러기 떼 지어 날아드는 광경은 한폭의 그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요장리 일대가 완전히 변하여 그러한 광경을 보지 못함이 아쉬울 뿐이다.

廣岩滿潮(광암만조)

광암리 앞 바다는 물이 깨끗하여 옛 선인들이 즐겨 찾은 곳이고 근래까지도 해수욕장이 있던 곳이다. 만곡을 그리는 해안에 노을과 함께 저녁 물드는 광경은 금상천화 아니겠는가.

燕浦歸帆(연포귀범)

창원의 오지 섬마을 송도의 남단의 모양이 제비꼬리처럼 생겼다하여 燕尾島(연미도)라하고 연포라 불렀다. 고기잡이 나갔던 배들이 만선을 이루고 뱃노래 구성지게 부르며 연미도를 돌아 오는 모습이 어찌 정겹지 않겠는가. 해 저무는 수평선 위에 가는 듯 오는 듯 고깃배 몇 척이 가물거리는 정경을 바라보며, 갈매기 몇 마리 머리위에 띠워 놓고 유유자적 해변을 거닌다면 신선이 따로 있을까.

能島漁火(능도어화)

고기잡는 배들이 밤이면 일제히 불을 밝히고 수 없이 널어선 모습은 장관이 아닐 수 없다. 깜깜한 바다 위에 불꽃처럼 환하게 밤바다를 밝히면 신세계를 보는 듯 할 것이다. 낭만이 여기에 이르면 정자에 앉아서 싱싱한 횟거리나 장만하여 지인과 술잔을 주고받으면 그 맛 또한 오죽하랴.

竹田細雨(죽전세우)

죽전의 광활한 대밭에 진종일 시작도 끝도 없이 내리는 가랑비를 하염없이 바라보노라면 누구나 덧없는 감회에 젖을 것이다. 시야는 자욱한 안개에 가려지고 마음이 적막강산에 놓여 질 때 이 풍경 또한 운치 있지 않은가.

航山暮鍾(항산모종)

삼진과 함안의 경계를 이루는 餘航山(여항산) 깊숙한 곳 산사에서 들려오는 저녁 종소리는 까닭없이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날이 저물면 새들과 들짐승들은 집을 찾아 돌아간다. 이는 귀소본능에서 나오는 행동으로 나그네 역시 발길이 바빠지기 마련이다.

匡廬瀑布(광려폭포)

봉래정의 주련에는 匡廬瀑布(광려폭포)라는 주련이 걸려 있다. 아마도 광려산에 있는 폭포에서 물 내려오는 모습이 대단히 웅장해 보였던 것 같다.




<賢德門(현덕문)>




정자의 정면 에는 鳳來亭(봉래정)이라는 편액이 달려 있는데 글씨가 예사롭지 않아 글쓴이를 찾아보니 星坡 河東洲(성파 하동주 1879~1944)의 글씨이다. 성파 하동주는 거제에서 출생하여 아버지 河濟峰(하제봉)으로부터 추사체를 전수받아 추사체로 일가를 이룬 진주시의 대표적인 서예가이다. 그의 글이 남아 있는 곳으로는 서울 종로 선학원 법당 중앙선원 편액, 진주성 내 창렬사 편액, 통영 용화사 종루 편액, 밀양 영남루 편액, 부산 범어사 관음전과 범루 편액, 진주 의곡사 대흥루 편액, 고성 옥천사 백련암 편액, 진동 사동리 봉래정 편액 등 많은 작품이 남아 있다.

 






鳳來亭記[原文]

鎭之爲縣 小如丸而濱於海徼 雖與大都巨邑 勢若遙絶 然往往有山林水石之奇觀  而只欠臺榭之可登臨 故千百載之間 空保堅完 而爲衆目之遺弃 可勝歎哉 縣之西 數弓許 逶迤屈曲 如龍蛇之蜿蜒者 是所謂凰山 巉岩絶壁 矗矗圍立 老檜古松 㭗㭗葱蒨 滾滾寒流 繞出而注于海 足爲畸人逸士 考槃之地 歲甲戌之暮春者  余與同志五六人 風浴于石川 而攀登千仞高岡 緬想曾點捨瑟之趣 曠然有翔鳳之氣像 於是 靜對虞山 彈出南風調一曲 聞韶之鳳 宛然來儀於雲霄之間也 彼金陵之鳳凰坮 高則高矣 晉陽之儀鳳樓 麗則麗矣 何嘗有此等趣味耶 乃呼酒唱酬 不知夕陽之在山 而及其歸也 相與謀曰 盍就此搆一棟 以做吾輩風詠之所乎 乃設契鳩財 閱數個月 有亭翼然 告訖 扁之以鳳來 飮落之日 會中群賢 以余爲同事者 囑而敍之 旣述其實 繼之以詩曰
 凰山南畔水西頭
 勝景曾爲擅此州
 大野橫平恩雨潤
 碧天高逈慶雲浮
 危墟跨石居須靜
 搾逕懸崖步不留
 回憶虞庭來儀日
 韶蕭古韻亘千秋
乙亥重陽鄕 文漢奭記

 

봉래정¹⁾기 鳳來亭記 [해문-조여 이현호(調汝 李絃浩)]
진해(鎭海)현은 새알처럼 작고 바닷가에 둘러쌓여 있으니, 비록 큰 도읍과는 형세가 매우 다르지만 이따금씩 산림(山林)과 수석(水石)의 기이한 장관이 있다. 그런데 다만 산에 올라가 내려다볼 수 있는 정자가 없었다. 그러므로 천백년 동안 부질없이 견고하고 완전한 상태로 간직되었지만, 여러 사람의 눈에 버려진 바가 되어왔으니, 이루다 탄식할 수 있겠는가!
 현의 서쪽은 수궁(數弓)²⁾쯤 구불구불하게 굴곡진 곳이 마치 용이나 뱀이 꿈틀거리는 것과 같으니, 이곳이 황산(凰山)이라 불리는 곳이다. 황산은 가파른 암석과 끊어진 절벽이 우뚝우뚝하고 굳게 서 있고, 오래된 전나무와 소나무가 울창하게 푸르고 우거졌으며, 솟아오르는 차가운 물이 흘러나와 바다로 들어가니, 기인(畸人)³⁾과 일사(逸士)⁴⁾들의 고반(考槃)⁵⁾의 터전이 될 만했다.
갑술년(1934) 모춘(3월)에 내가 동지 대여섯 사람과 함께 석천(石川)에서 풍욕(風浴)⁶⁾하고 천 길이나 되는 높은 언덕을 등반하면서, 아스라이 ‘증점이 비파를 내려놓고 말한 뜻⁷⁾’을 상상해보니 마음이 탁 트여서 봉황이 나는 기상이 있었다. 이에 조용히 우산(虞山)을 마주보고 남풍조(南風調)⁸⁾ 한 곡을 연주하니 소악(韶樂)⁹⁾을 들은 봉황이 분명하게 ‘높은 하늘.¹⁰⁾’의 사이에 와서 춤추는 것 같았다ⁱⁱ⁾.  저 금릉의 봉황대(鳳凰坮)¹²⁾는 높기도 높고, 진양의 의봉루(儀鳳樓)¹³⁾도 아름답기는 아름답지만, 어찌 일찍이 이러한 재미가 있었겠는가!
  마침내 술을 가져오게 하고 창수(唱酬)¹⁴⁾하니, 석양이 서산으로 기울어 내가 돌아가야 하는 줄을 깨닫지 못했다. 서로 함께 의논하기를, “어찌 이곳에다가 정자 한 채를 지어서 우리들이 풍영(風詠)¹⁵⁾하는 장소로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계를 만들고 돈을 모은 지 몇 달이 지나 나는 듯이 정자를 지었다. 모두에게 알리고 편액을 봉래정(鳳來亭)로 지어서, 잔치하며 낙성하는 날에, 계회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나를 동사자(同事者)로 여겨서, 기문을 적어주기를 부탁하였다. 내기 그 사실을 적은 뒤에 이어서 시(詩)¹⁶⁾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凰山南畔水西頭 봉산 남쪽가 냇물 서쪽 초입에는
勝景曾爲擅此州 아름다운 경치 일찍부터 이 고을에 있었다네.
大野橫平恩雨潤 가로지른 평평한 한들엔 은혜로운 단비 윤택하고
碧天高逈慶雲浮 높고 아득한 푸른 하늘엔 오색 구름¹⁷⁾ 떠 있구나
危墟跨石居須靜 바위가 버틴 높다란 언덕에선 결국 조용히 쉬지만
搾逕懸崖步不留 낭떠러지에 매달린 좁은 길에선 걸음 멈출 수 없네
回憶虞庭來儀日 우정(虞庭)¹⁸⁾에 봉황이 와서 춤췄던 날을 회상하니
韶蕭古韻亘千秋 소소(韶蕭)¹⁹⁾의 옛스런 운치가 천추토록 뻗치겠구나.

을해년(1935) 중양절(9월 9일) 문한석이 기문을 쓰다.


【주석】
봉래정¹⁾ :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社洞里(진해현 사직단이 있는 동네) 294-32번지. 절벽을 보고 지은 정자로 1923년 이기범 외 22인의 유림들이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다. 편액은 星坡 河東洲(1879-1944)의 글씨. 거제출생. 부친 河濟峰의 추사체를 이어받음. 진동면은 원래 진해현鎭海縣)이었다가 일제강점기 즈음하여 진동으로 바뀌게 되었다.
수궁(數弓)²⁾ : 활쏘는 길이의 두 배의 거리 또는 100보(步) 정도의 거리를 말한다. 참고로 1보는 양걸음을 모두 말하는 것으로 현재 우리가 쓰는 1보는 규보(跬步)-반걸음-을 말한다.
기인(畸人)³⁾ : 세상과 잘 어울리지 못한 채 홀로 외로이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기인이란 사람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해도 하늘과는 서로 짝이 되는 사람이다.[畸人者, 畸於人而侔於天.]”라고 하였다.
일사(逸士)⁴⁾ : 숨어사는 선비를 말한다. 기인과 일사는 모두 은자를 지칭한다.
고반(考槃)⁵⁾ : 은자의 집을 말한다.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 “산골 시냇가에서 한가히 소요하나니, 현인의 마음이 넉넉하도다.(考槃在澗 碩人之寬)”라는 말이 나온다.
풍욕(風浴)⁶⁾ : 공자가 제자들에게 각자의 포부를 물었을 때, 증점(曾點)은 “늦봄에 봄옷이 완성되면 어른 대여섯 사람과 아이 예닐곱 사람과 함께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며 돌아오겠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고 한데서 자연과 함께 하는 무욕(無慾)의 경지를 말한 다.《論語 先進》
말한 뜻⁷⁾ : 윗 각주 6 참조
남풍조(南風調)⁸⁾ : 순(舜) 임금이 오현금(五絃琴)을 처음으로 만들어 남풍가(南風歌)를 지어 부르면서 “훈훈한 남쪽 바람이여, 우리 백성의 수심을 풀어 주기를. 제때에 부는 남풍이여, 우리 백성의 재산을 늘려 주기를.(南風之薰兮 可以解吾民之慍兮 南風之時兮 可以阜吾民之財兮)”이라고 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禮記 樂記》
소악(韶樂)⁹⁾ : 순임금의 음악을 말한다.
하늘.¹⁰⁾ : 운소(雲霄)’는 높은 하늘이라는 뜻으로, 두보(杜甫)의 시 〈봉증선우경조(奉贈鮮于京兆)〉에 “운소에 지금 벌써 가까우니, 태곤 중에 다시 뉘와 친하리오.(雲霄今已逼, 台袞更誰親?)”라고 하였다. 《全唐詩 卷224 奉贈鮮于京兆》
같았다ⁱⁱ⁾ : 《論語 子罕》편 8장 대주에 “봉(鳳)은 신령스러운 새인데 순(舜)임금 때에 나타나서 춤을 추었고, 문왕(文王) 때에는 기산(岐山)에서 울었다.(鳳 靈鳥, 舜時來儀, 文王時鳴於岐山.)”라 하였고, 《서경(書經)》 〈우서(虞書) 익직(益稷)〉에 이르기를, “소소(簫韶)를 아홉 번 연주하자 봉황이 와서 춤을 춥니다.(簫韶九成, 鳳凰來儀.)”라고 하였다.
봉황대(鳳凰坮)¹²⁾ : 금릉은 현재 남경이다. 이백(李白)의 〈등금릉봉황대(登金陵鳳凰臺)〉 에 “봉황대 위에선 일찍이 봉황새가 놀더니, 봉황은 가고 빈 대 앞에 강물만 절로 흐르네. 오나라 궁전의 화초는 오솔길에 묻혀 있고, 진나라 시대 귀인들은 옛 무덤을 이루었구나. 삼산은 푸른 하늘 밖으로 반쯤 떨어져 있고, 두 강물은 백로주에서 중간이 나뉘었네. 이 모두가 뜬구름이 태양을 가린 때문이라, 장안을 볼 수 없어 사람을 시름하게 하누나.(鳳凰臺上鳳凰遊, 鳳去臺空江自流. 吳宮花草埋幽徑, 晉代衣冠成古丘. 三山半落靑天外, 二水中分白鷺洲. 總爲浮雲能蔽日, 長安不見使人愁.)”라고 하였다.
의봉루(儀鳳樓)¹³ : 진양은 중국 산서성(山西省)에 있는 지명으로 그곳에 있던 의봉루를 말하는 듯하다.
창수(唱酬)¹⁴⁾ : 시문(詩文)을 지어 서로 주고받음
풍영(風詠)¹⁵⁾ : 윗 각주 6 참조
시(詩)¹⁶⁾ : 우(尤)평성 운목에 수구입원하였으며, 평기식 7언율시이다. 운자는 頭 州 浮 留 秋이다.
오색 구름¹⁷⁾ : 경운(卿雲)은 경운(慶雲)이라고도 하는데 오색의 채운(彩雲)을 가리킨다. 순 임금 때에 〈남풍가〉를 부르며 천하를 다스려 태평해지니 경성이 나타나고 경운이 일어났는데, 이에 백공들이 〈경운가〉를 불러 칭송하였다고 한다. 《史略 卷1 帝舜有虞氏》
우정(虞庭)¹⁸⁾ : 우정(虞庭)은 우순(虞舜), 즉 순임금의 조정을 가리킨다. 《서경》 〈익직(益稷)〉에 “소소 음악을 아홉 번 연주하니, 봉황새가 날아와 법도에 맞춰 춤을 추었다.〔韶簫九成, 鳳凰來儀.〕”라고 하였다.
소소(韶蕭)¹⁹⁾ : 순임금의 음악을 말한다.






鳳來亭 創立者稧員名錄(봉래정 창립자계원명록)
無順(무순)
이창재, 조성기, 전자실, 이기범, 이용관, 문한석, 이석현, 홍상철, 서석천, 서윤성, 손정한, 김진영, 김성종, 박태규, 박기성, 정상원, 추연기, 최재우, 최성암, 한진흔, 이복임, 이근우, 정길수, 박순조, 박오수, 김재봉, 윤상갑, 강태호





성파 하동주의 봉래정 편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