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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에 따라 옷을 갈아 입는 함안 무진정

천부인권 2014. 2. 5. 16:17

 

계절에 따라 색깔을 달리하는 함안 무진정.hwp

 

 

<2011/8/19 함안 무진정 풍경>

 

 

<2009/2/25 함안 무진정 풍경>

 

 

무진정(無盡亭)은 함안군 함안면 괴산425(괴산리 547)에 위치한 경남유형문화재 제158호로 지정된 정자이다. 함안 무진정(無盡亭)은 함안의 정자들 중 손에 꼽힐 정도로 알려진 명소로 매년 4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에는 함안낙화놀이를 하고 있어 더 유명세를 타고 있는 곳이다.

함안IC를 내려 함안군청이 있는 가야읍을 통과하여 함안면사무소가 있는 여항산(餘航山 ; 770m) 방향으로 약 6km를 가다보면 도로변 괴산리 입구 좌측에 인공연못과 같이 있다.

 

 

 

<2011/8/19 무진정>

 

 

<2009/2/25 함안 무진정 풍경>

 

 

무진정은 조선조 중기의 문신 조삼(趙參, 1473~?)선생이 직접 터를 닦고 지은 정자로 선생의 자()는 노숙(魯叔)이요 호는 무진정(無盡亭)이다. 어계선생의 손자요 진산공 동호(銅虎)의 셋째아들로 성종 4(1473)에 출생하였다.

1489(성종.20) 17세에 진사(進士)시험에 합격하였으며, 1507(중종.2)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及第)한 후 함양(咸陽) 창원(昌原), 대구(大邱), 성주(星州), 상주(尙州) 등의 목사(牧使)와 부사(府使)를 역임하였으며 이어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겸 춘추관(春秋館) 편수관(編修官)을 지낸 분이다.

 

 

 

<2011/8/19 무진정 풍경>

 

 

<2009/2/25 무진정 풍경>

 

무진정은 계절에 따라 색상을 달리하는데 봄에는 청보리밭 풍경처럼 수체화가 되고 여름은 온통 푸른색으로 변하여 연못의 반영도 보이지 않는다. 가을은 누런 황금빛으로 물들고, 겨울은 창명한 하늘을 비추어 준다. 그러다 보니 많은 여행객이 계절에 따라 찾아와서 그 옛날 선조들이 즐겼던 풍류를 느껴보고 느림의 미학을 깨닫고 돌아가는 곳이다.

 

 

 

 

<2011/8/19 영송루 가는길>

 

 

<2009/2/25 무진정 풍경>

 

무진정이 있는 정자로 가려면 인공연못을 건너는 재미가 있는데 연못 가운데 만들어진 작은 동산에는 팔각정인 영송루(迎送樓)가 있어 부자쌍절각이 있는 곳에서부터 교각으로 연결 되어 있다.

 

 

 

 

 

부자쌍절각은 어계 조려 선생의 6세손이자 무진정 조삼선생의 증손인 조준남과 그 아들 조계선의 충효를 기려 만든 전각이다. 전각 옆에는 ["충노대갑지비(忠奴大甲之碑)"라 적은 조금은 특별한 비가 서 있는데 정유재란 때 노비 대갑이 주인 조계선을 모시고 전쟁에 참여하여 주인이 전사하게 되자 함께 죽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그러나 주인의 죽음을 전할 길이 없어 의주에서 돌아와 본가 5리쯤 떨어진 곳에 이르러 조계선의 부음을 전하고, “주인을 난에서 구출하지 못한 내가 혼자 살아 집에 갈 면목이 없다.”, 지금의 함안천에 투신해 죽었다.]고 하여 세운 비이다.

 

 

 

 

忠奴大甲之碑 - 충성스런 노비 대갑의 비석


陪駕赴亂 주인 모시고 싸움터 나갔는데 
主先立慬 주인이 먼저 죽어 근심 쌓이네.
哿義同死 같이 죽음이 옳고 옳으나
訃傳無緣 부고 전할 인연이 없어
散身還鄕 달아나 고향으로 돌아와서
于道報音 전장에서의 일을 말로 전 했네
曰獨何面 혼자 살면 어찌 면목 있겠습니까.
捐生投沈 생명을 검암천에 던져 잠겼네.
義哉斯奴 의롭구나! 이 노비여
俯仰無愧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봐도 부끄럼이 없다네.
今古希見 고금에 드문 일이니
書之石齒 비석에 적노라.

 

 

 

 

인공 연못에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동정문(動靜門)을 만나는데 좁은 동정문을 지나면 무진정을 마주하게 된다. 높은 단 위에 세워진 듯한 무진정(無盡亭)은 정면 3, 측면 2칸인 팔작지붕 와가로 현판과 주련은 주세붕선생이 쓴 글이다.

 

 

 

<비오는 무진정>

 

 

<2011/8/19 무진정 정면>

 

 

<무진정 내부 모습>

 

 

<2011/8/19 여름의 무진정 모습>

 

 

<주세붕선생의 글씨>

 

 

 

 

읍지의 효시가 되는 함주지(咸州誌)의 정사(亭榭)편 무진정(無盡亭)의 기록인 신재 주세붕(愼齋 周世鵬)의 기문(記文)을 옮겨 둔 것이다.

 

무진정(無盡亭)은 성산(城山)의 동쪽 기슭에 있는 옛 날 목사 조삼( 牧使 趙參)이 지은 곳이다. 신재 주세붕(愼齋 周世鵬)의 기문(記文)에 두륜산(지리산을 말함)의 산맥이 동쪽으로 삼백리를 달려와서 마치 반공중에 가로 잘라 세운 듯한 형상과 흔들리는 말갈기 같고 출렁거리는 파도같이 함안고을을 지키는 산이 여항산(餘航山;770m)이다. 그 한쪽 산줄기가 펄펄 날아 내린 듯 하다가 십리를 못미처 푹 꺼졌다가 다시 솟아 봉황새가 새끼를 품은 듯 한곳에 성()이 걸터앉아 군()이 된 것이다. 성산(城山)의 왼쪽 팔굽이 산줄기가 지렁이처럼 꿈틀꿈틀 서북쪽으로 비틀거리다가 말이 뛰다시피 일어나 군성을 옹호하여 동으로 당도하니 청주(淸州)이라 이무기가 마실 물을 얻은 것과 같이 머리를 든 듯한 그 꼭대기에 있는 집이 무진정(無盡亭)이다. 정자와 군의 관아와는 소울음소리가 들릴 만큼 가깝다. 곧 조목사(趙牧使)선생이 사시던 동고(東皐)이다. 선생이 이 두 덕을 얻어 기거하게 되었는데 이곳이 처음에는 큰길가의 거칠은 언덕에 불과 했고, 또 고을 사람들이 심하게 왕래하는 곳이다. 멀리 아라가야 개국 이후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깊이 묻혔던 곳도 아닌 이 길로 오가는 사람이 하루 천만명이라도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세울 줄은 참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오직 선생이 한번보시고 덤불을 베어내고 정자를 세웠으니 다행한 일이다. 그리고 옛 길을 옮기고 아름다운 나무를 심어 옛날 중국의 한나라 때 장후(蔣詡)가 관직에서 물러나 살면서 뜰에 세갈래 길을 열고 솔과 국화와 대나무를 심은 것과 같이 길을 열었다. 꽃과 대나무가 서로 가리고 비쳐 추녀 끝은 나러는 새 같고 시종드는 집이 언덕 밖에 펄럭이니 보는 이 마다 신선이 사는 곳 같다 하였다. 선생이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무진정이라 했으니 자네는 나를 위하여 기문(記文)을 쓸 수 없나 하였다. 나와 선생과는 매양 뵈옵고 노는 사이라 선 듯 나를 끌고 올라가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게 되었다. 그 제도는 무릇 이동(二棟)인데 서쪽은 온돌방이 있고, 동북쪽은 다 창문이다. 창밖에 단이 있어 옥경 같았고 그 아래에는 푸른 절벽인데 대천(大川)에서 흘러내린 물이 남으로 돌아 흘러 물속에 비치니 명경(明鏡) 같고 옥띠를 띈 것 같다. 다시 옥패소리가 나는 것 같으며 북으로 풍탄(楓灘)으로 흘러내린다. 냇가에는 벽오동이 가히 천여그루가 서있고, 동으로 여러 산봉우리를 바라보면 소나무와 전나무가 울창하게 십리에 뻗쳐있다. 선생이 일찍이 내가 승화할 곳이라했다. 남으로 바라보니 여러 산들이 튀어나와 있어 기둥을 하늘에 세우듯 가득한데 정자와 바로 대한 산이 파산(巴山)이다.북으로 바라보니 큰 들이 천리로 눈에 아물거리고 보리밭의 푸른 물결이 하늘을 흔드는 것 같고, 익은 보리밭엔 누른 구름이 들을 덮은 것 같다. 겨울에는 문을 닫고 좋은 날에 볕 쪼이고, 여름이면 창을 열어 더위를 물리치니 마치 삼도(三島[三神山 , 봉래, 방장, 수영산의 신산(神山)] 신선골)의 붉고 푸른 산 기운을 통한 것 같고 십주(十州[신선이 산다는 열 개의 섬])의 아지랑이 빛에 적시는 것 같다. 맑은 바람이 스스로 불어오고 명월이 일찍 오를 때 발걸음을 집밖에 내딛지 않아도 앉아서 만물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으니 실로 조물주의 무진장(無盡藏)한 힘이 다 모여 있음을 믿을 수가 있다. 선생은 다섯 고을의 원(함양·창원·대구·성주·상주)을 역임하시고 일찍 귀거래사(歸去來辭[도연맹이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지은 노래])를 읊으면서 그 가운데 누었으니 청산과 흰구름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청풍명월로 벗과 손님같이 즐겼다. 흥이 나면 시를 읊고 휘파람을 불며 떠들썩하게 깃들일 때도 있고, 고요하게 여러 날을 보낼 때도 있으며, 홀연히 즐거울 때가 있어 기쁨이 비할 때 없다. 그 즐거움은 비록 만종(萬鐘[萬鐘祿: 아주 많은 봉금])의 정승과 판서라도 바꾸지 않을 정도로 부족함이 없다. 대체로 관직은 비록 영광스럽기는 하나 도리켜 욕되는 것이 있다. 군자는 기미를 알아 용감히 물러나는 것이 으뜸이다. 여기서 우리 군을 말하면 이원수(李元帥[충무공이순신장군]) 방실(芳實)은 세상에 뛰어난 충신으로서 짓밟혔던 서울을 수복하고 전 국토를 짓밟힘에서 구제하여 그 공은 막대하여도 여생을 한가로이 보내지 못하고 뜻밖의 액운으로 끝마쳤고, 어상국(魚相國) 세겸(世謙[1430(세종 12)1500(연산군 6)])은 중국을 능가할 문장과 임금을 도리로서 받드는 신하로서 많은 선비들이 기둥같이 우러러보아 명성이 아주 높았으나 돌아간 후에 명성이 별로 나타나지 않으니 부끄러울 일이다. 이러므로 선생의 깨달은 바 있는 것인가. 또 선생은 앞산 봉우리에 죽은 뒤를 꾀하였으니 수명을 알 수 있는 도로 통달한 선생이라 하겠다. 수명을 알았으므로 용퇴했고, 능히 용퇴했으므로 영화를 누리게 되었다. 정자의 경치는 다함이 없고 선생의 즐김의 각별함이 또한 그지없다. 이러한 다함이 없는 (無盡)것이 모여 무진정(無盡亭)의 이름이 되었으니 선생의 이름도 더불어 무진(無盡)함을 알겠도다. 선생의 휘는 삼()이요, 자는 노숙(魯叔)이니, 군인칠인(郡人七人)에 삼인(三人)은 대과(大科)에 올랐고, 일인(一人)이 진사에 올랐으니 삼계일련(三桂一蓮[은 벼슬을 형용한 말])의 영화를 입었다. 영화를 나라와 고을이 다 경축하는데 나도 또한 이 정자에 이름을 붙였으니 다행이다. 그러나 지금 문장 대가가 많으니 그분들이 무진정의 무진한 뜻을 알려 줄 것이다. 몽매함을 무릅쓰고 말한 것이 넘친 일이나 사양할 수 없어 그 자초지종을 써놓고 돌아가노라.

 

 

 

계절에 따라 색깔을 달리하는 함안 무진정.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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