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조선 마지막 기호학자 살았던 월봉서원

천부인권 2016. 3. 30. 07:20


<2013.2.6 덕정마을에서 본 월봉서원>



月峯書院(월봉서원)2009312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64호로 지정된 곳으로 김해시 장유면 관동동 555-2에 위치해 있다. 이 서원은 조선 중종의 5남인 德陽君(덕양군) 문중의 강학소로서 상량문에 기록된 上之開國五百二十六年丁巳年(상지개국오백이십육년정사년)”의 내용으로 보아 1392년 조선왕조 개창 후 526년인 1917년에 처음 세운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비교적 근대의 건축물이지만 어느 듯 100년이 되었다. 월봉서원은 정면 5, 측면 3칸이며, 정면의 툇마루 및 그 뒤의 대청과 실내공간을 적절히 배분하여 공간 활용을 극대화 하고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창호로는 세살문과 아자살문 및 방과 대청 사이의 불발기분합문 등 다양한 형태를 조화롭게 배치하여 공간구성을 다채롭게 연출했다.

이 서당은 건축도 중요하지만 전통적인 공간 안에서 실제로 조선시대의 유교와 한학교육이 현재까지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으며, 특히 율곡 이이선생을 중심으로 했던 기호학파가 영남지방에서 계승 되었다는 점이 독특할 뿐만 아니라 영남과 호남의 사상적 교류와 문화적 소통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13.3.6 월봉서원 앞에 위치한 운강제>



<월봉서원 관리사와 출입문>



<앙지문과 봉양재>


월봉서원의 관리사 옆 대문을 통과하면 仰止門(앙지문)과 우측의 鳳陽齋(봉양재)을 만난다. 월봉서원으로 들어가는 앙지문의 仰止(앙지)시경小雅(소아) ‘車舝(거할)’에 나오는 高山仰止, 景行行止(고산앙지, 경행행지)’, ‘산이 높으면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에서 취한 말로 우러러 사모 한다.’는 의미이다.







華齋(화재) 李雨燮(이우섭.1931~2007) 선생은 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 간재 전우, 석농 오진영으로 이어지는 영남 기호학맥의 후예로, 평생 고향에서 월봉서원을 지키면서 한학을 가르쳤다. 또한 20055월에는 성리학 관련 글과 한시, 금석문 등을 정리한 '화재문집(華齋文集·27)'을 출간하는 등 40여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막내아들인 준규(38·부산대 한문학과 교수)씨를 통해 월봉서당을 6대째 운영하며 많은 후학을 양성했다. 화재 선생의 이 같은 업적과 정신을 기려 유족과 월봉서원, 유림 등은 지난해 화재 선생의 장례를 학문과 덕망이 높은 유학자가 타계했을 때 행해지는 유림장 형태의 유월장(踰月葬)으로 거행했으며 3년상을 치렀다.[출처:다음 백과사전]








월봉서원은 율곡의 학맥을 이은 월헌 이보림(월헌 이보림, 1902~1972)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유업을 계승하기 위하여 1984년 사당인 明輝祠(명휘사)를 세우면서 월봉서원으로 개액하고 위패를 모셨으며, 음력 320일에 향례를 올리고 있다.





<명휘사 입구인 내삼문 모습>


이우섭 선생에 대해서는 많은 일화가 전해오지만 영남지방에서 기호학맥을 이어 온다는 것은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아직도 영남지방의 영남학맥을 이어 오는 분들은 기호학맥에 대하여 좋은 시선으로만 바라보지 않는 고집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