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임진왜란의 처절함을 알려주는 김준민 장군 신도비

천부인권 2016. 3. 28. 18:18



<2015.3.12 발산리 김준민 장군 신도비>



2번국도인 진마대로를 따라 진주시로 향하면 진주시와 창원시의 경계지점인 마산합포구 진전면 봉암리 고개를 넘어 가게 된다. 이 고개를 넘으면 진주시 二班城面(이반성면) 鉢山里(발산리)이다. 그래서 이 고개를 발산고개라 부른다. 고개의 이름을 붙일 때에는 어느 쪽에서 그 고개를 많이 사용하느냐에 따라 지명이 생겨나는 모양이다. 아마도 창원시와 진주시의 경계지점인 발산고개는 진주 쪽 사람들이 더 많이 창원시로 이동을 하고 사용한 모양이다. 이 발산고개를 넘으면 우측에 발산못이 건설되어 있고, 여기서 발산리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발산못 둑으로부터 약 300m 아래 마을 입구인 진주시 이반성면 발산리 629에는 忠義閣(충의각)이라는 팔작지붕의 다포집이 서있고, 그 비각 안에 贈刑曹判書金俊民神道碑閣(증형조판서김준민신도비각)이 세워져 있다.





<2015.3.12 정면에서 바라 본 김준민 장군 신도비>




<신도비각 앞에 요즘 다시 세운 비>



이곳 안내판에는 이 비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대장으로 크게 공을 세우고 전사한 김준민 장군의 공적을 기록한 장군의 신도비로서 1918년 비각과 함께 세웠다.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巨濟縣令(거제현령), 합천의병장으로 있으면서 7월에는 茂溪(무계)에서, 9월엔 성주에서, 10월엔 晉州城(진주성) 1차전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렀으며, 이듬해 6월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졌다. 장군의 사후 宣武原從一等功臣(선무원종일등공신)으로 추대되고 통정대부 병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진주 彰烈祠(창열사)에 배향 되었다. 이 비각은 팔작지붕 다포집이며, 벽에는 진주성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측면에서 본 모습>




<비각 내에 들어 가기 전>




김준민 장군은 조선 선조 16(1583)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제신과 함께 군관으로서 출전하여 여진 정벌에 공을 세웠다. 무엇보다 선조 25(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제현령, 합천의병장으로 있으면서 그해 10월의 진주성 1차 전투에서 김시민 장군과 함께 왜적을 크게 무찔렀으며, 다음해 6월의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성의 동문을 사수하다가 전사하였다. 죽은 뒤에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책봉되었고 벼슬도 형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진주성내의 창렬사(彰烈祠)에 배향되었다.





<비를 보호하는 충의각>




대형의 신도비는 귀부와 비신, 가첨석으로 되어 있어 일반적인 귀부와 비신 그리고 이수로 이루어진 것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비문 내용은 장군의 충의와 행적을 담았으며, 산문체 문장으로 되어 있다. 1918년에 세운 이 비석은 忠義閣(충의각)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는 비각을 지어 보호하고 있다. 비각은 정면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다포집이며, 연꽃· 연실· 물고기· · 나비 등이 조각되어 있고, 벽에는 진주성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2001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06호로 지정된 이 비문은 1919년 파리장서사건의 주역인 면우 곽종석(郭鐘錫)1910년 지었고, 허찬이 篆額(전액)을 썼으며, 李勉宰(이면재)楷書(해서)로 썼다.








<충의각 앞에서 바라 보는 발산리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