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임진왜란 비극의 현장 사천 조·명군총과 이총

천부인권 2016. 4. 22. 15:00

 

 


 

<2016.4.17. 사천 조·명군총 內 이총>

 

선진리왜성에서 돌아 나오면서 泗川 朝·明軍塚(사천 조·명군총)’을 둘러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피곤해하는 아들은 잠시 차량에 쉬도록 하고 홀로 비극의 현장인 조·명군총을 둘러보았다. 우선 조·명군총의 한켠에 마련된 耳塚(이총)부터 둘러보았다. 귀무덤이라는 희한한 이름을 지닌 이 비가 세워진 안내판에는 이 곳은 임진왜란 때 朝鮮(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왜적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다. 조선을 침략한 왜적은 조선인을 죽인 후 전리품으로 귀와 코를 도려내어 소금에 절인 후 이를 왜국으로 보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는 이를 승전의 표시로 교토(京都) 토요쿠니 신사 앞에 묻고 耳塚(이총)이라 칭하며 자랑스러워했다. 이를 알게된 사천문화원과 삼중스님이 합심하여 19924월 이역만리에서 떠도는 원혼을 달래고자 이총 흙의 일부를 항아리에 담아와 ()를 지내고 사천 조·명군총 옆에 안치를 했다. 2007년 사천시의 후원으로 현재의 위치로 이전을 하고 비를 세워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삼고자 한다.”고 적어 두었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80호로 지정된 泗川 朝·明軍塚(사천 조·명군총)’은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401에 위치한다. 사천 선진리왜성과 인접한 이곳은 임진왜란의 비극을 극단적으로 보여 주는 역사의 현장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당시 조선은 약 1,000만명의 인구가 있었지만 전란이 끝났을 때 400만여명이 죽거나 사라져 우리민족 역사상 엄청난 피의 대가를 치룬 비극을 겪었다. 그 죽음의 현장이 泗川 朝·明軍塚(사천 조·명군총)’耳塚(이총)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사천 조·명군총 내 삼문>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402에 위치한 경상남도 기념물 제80호로 지정이 된 泗川 朝·明軍塚(사천 조·명군총)을 소개하는 안내판은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다.

임진왜란이 끝나갈 무렵인 1598(선조 31) 진주와 곤양 등지에서 잇단 패배를 당한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은 10초하루에 왜적이 차지하고 있던 이곳 船津里倭城(선진리왜성)을 포위하고 격전을 벌였다. 전투가 한창 진행될 즈음 아군 진영에서 탄약상자가 폭발하여 전열이 흐트러졌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왜적이 기습을 가해오니 연합군은 오합지졸이 되어 많은 전사자를 남기고 후퇴를 했다. 전투가 끝난 후 왜적들은 전과를 알리기 위해 전사한 시체의 귀와 코를 베어 왜국으로 보낸 뒤 시체의 목을 베어 한데 모아 무덤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조선·명나라군의 무덤이다. 무덤은 처음엔 선진리왜성 앞에 있었으나 심한 악취로 현재의 장소로 옮겼다고 한다.

무덤은 사방 36m의 네모반듯한 형태로 일명 당병무덤이라 하였다. 무덤은 돌보는 사람 없이 약 400년 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1983년 지역민이 중심이 되어 정비하였다. 그리고 전몰 386주기가 되는 이듬해에 위령비를 세우고 위령제를 지내 원통하게 죽은 영혼들을 달래 주었다. 그 후 매년 음력 101일에 죽은 영혼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다.


 

 



 

어찌 후손된 이가 선조들의 아픈 역사를 외면할 수 있겠는가. ‘·명군총옆에는 1983114일에 朝明聯合軍戰歿慰靈碑(조명련합군전몰위령비)를 세웠는데 설창수가 글을 짓고 정명수가 글씨를 썼다. 비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朝明聯合軍戰歿慰靈碑(조명련합군전몰위령비)

새삼 덧없어라. 시간(時間)이란 무시종(無始終)의 바람결이며 그 수레바퀴에 실려가 누누(累累)한 청사(靑史)의 책장 밖에서 민들레꽃 솜털인 듯 떠돌이 구름다운 무주원혼(無主怨魂)들이 구천 어디메 오갈곳 없음인들 무릇 얼마리오.

저기 당병소(唐兵沼)와 사남(泗南) 화전(花田)의 병둔(兵屯)자리 및 왯골, 왯등 따위로 이름이 남았고 이 일대 선진신성(船津新城)터는 一五九七年 정유(丁酉) 재침(再侵) 十二月 卄二日에 준공(竣工)시킨 왜장(倭將) 도진의홍(島津義弘)여 달이나 차지했던 자취로서 어언 근 400(近 四百年)의 춘풍추우(春風秋雨)동안 이곳 선진리(船津里)의 속칭 · 댕강무데기 · 아래 무언의 흙이 된 왜군 명병과 호국전몰(護國戰歿)의 사연들을 되살려 보련다.

앞서 임계양란(壬癸兩亂)으로 이 땅 남북강산(南北江山)의 조야민생(朝野民生)을 짓밟았던 적괴(敵魁) 풍신수길(豊臣季吉)의 무엄한 도이(島夷) 강화3(講和三年) 교섭의 결렬에 이어 정유년(丁酉年)에 재침(再侵) 북진(北進)하려다가 조.명연합군(.明聯合軍)에 떠나더니 선진신성(船津新城) 안에 농성 하였기 익98(翌九八年) 무술(戊戌) 9(九月) 스무날부터 명중로군(明中路軍) 동일원(董一元)과 우리 정기룡군(鄭起龍軍)이 사납게 쳐몰아 망진(望晉), 영춘(永春), 곤양채(昆陽寨)를 차례로 빼앗고 사천읍성(泗川邑城)의 적()도 크게 무찔렀다.

마침내 十月 첫날에 선진왜성(船津倭城)을 다그쳤으나 배수진(背水陣)의 적계(敵計)에 역습당하여 분사(憤死)한 아군(我軍) 일만(一萬)내외의 수급(首級)이 여기 당병(唐兵)무덤에 적의 손으로 장사됐다.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정기용군(鄭起龍軍)의 이천이백(二千二百)과 제독(提督) 동일원군을 합쳐 36천설(三萬六千說)도 있지만 모국기선봉 75(七千五百)과 좌우익(左右翼) 4(四千)이면 만55(萬五千五百)의 실전주력(實戰主力)과 적수(敵數) 8(八千)의 대결인데 아군진중(我軍陣中)의 병고(兵庫)에서 발생한 화란(火難)에다 동제독(董提督)의 전략(戰略)이 경적(輕敵)의 허()를 범한 후평(後評)마저 있었다.

기승한 兇敵(흉적)冬至(동지)달 열여드렛날 兵船五百(병선오백)척으로 泗川(사천) 선창을 떠나더니 康州海(강주해)를 거쳐 노량나루에 이르매 서둘러 麗水(여수)서 달려 온 三道水軍統制使李舜臣(삼도수군통제사이순신)의 연합군과 海戰史上(해전사상)不朽(불후)露梁大海戰(노량대해전)을 치뤘다. 이튿날 未明(미명)觀音浦(관음포)에서 李統制使(이통제사)殉國(순국)한 격전 끝에 敗殘船(패잔선) 겨우 五十여척을 이끌고 魂飛(혼비)한 적 島津(도진)이 도망치자 猫島西(묘도서)편으로 패적장 小西行長(소서행장) 또한 탈출하므로써 惡夢七年(악몽칠년)壬亂(임난) 싸움이 船津浦(선진포)를 마지막으로 雪辱(설욕)의 막을 내린 셈이다.

일본의 古都京都(고도경도)侵寇(침구)들의 戰功貢物(전공공물)로서 묻혀있던 耳塚(이총)에서 今年九月(금년구월) 韓日(한일) 有志(유지)들이 慰靈(위령)享祀(향사)를 가졌다거니와 王政(왕정) 한때의 內憂(내우)千秋(천추)外患(외환)自招(자초)功罪(공죄)야 여부간에 疆土(강토)北半天地(북반천지)는 아직 잠겨있는 채 우리들 民主共和祖國(민주공화조국)을 세운지라 이제 鄕民(향민)徵表(징표)를 모아 먼먼 異域(이역) 땅에 不歸(불귀)恨客(한객)으로 남은 明代盟邦民(명대맹방민)의 굳은 戰友愛(전우애)를 기리며 삼가 朝明聯合軍靈(조명연합군령)들의 瞑福(명복)을 비는 도다. 어즈버 聖雄忠武公(성웅충무공)戰傷(전상)독전과 두 척의 거북鐵船(철선)까지 神出鬼沒(신출귀몰)턴 성난 船津(선진) 앞바다는 그 분들을 鎭魂(진혼)하여 길이 고요하다.



 

 

 

 

<임진왜란의 비극 사천 조·명군총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