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청주한씨 집성촌 진주 평촌리 은헌고댁

천부인권 2016. 5. 20. 08:18



<2015.3.12 이반성면 평촌리 입구 청주한씨 비석공원>

진주시 이반성면 坪村里(평촌리) 210(오봉산로 983번길 27-8) 중도마을[丁樹]에는 대한제국시대 건설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45호로 지정이 된 隱軒古宅(은헌고택)이 있다. 이 고택은 隱軒 韓士源(은헌 한사원1860~1908)이 지은 한옥으로 현재까지 그 후손들이 살고 있는 문화재이다.

은헌고택이 있는 평촌마을 입구에는 꽤 넓은 땅을 비석공원처럼 꾸며 두었는데 이 모두가 청주한씨들과 관계가 있는 것들이다. 팔각정을 지어 안치한 朝鮮處士遯菴韓公杖屨所碑(조선처사둔암한공장구소비)’를 비롯한 4기의 비석군과 맞배지붕으로 만든 비각 속에 안치한 2기의 열녀비가 세워져 있다.

 



 

중도마을은 청주한씨(淸州韓氏)의 집성촌으로 처음 이곳으로 들어 온 入鄕祖(입향조)遯菴公 (둔암공) 韓承利(한승리1477~1496)이다. 둔암공은 연산군의 폭정을 피하여 이곳 이반성 평촌에 은거하여 청주한씨의 집성촌을 이루었다. 그 후예로는 증손 夢逸(몽일)이 형조좌랑을 지냈다. 夢參(몽참)篁岩(황암) 박제인, 寒岡(한강) 정구, 旅軒(려헌) 張顯光(장현광)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뛰어난 문장과 학행으로 이름을 알렸으며 문집으로 釣隱集(조은집)이 전한다.

 



 

둔암공의 13세손 士源(사원)에 이르러 현재의 집을 짓고 은헌공의 장손인 正愚(정우)는 이곳 이반성의 평촌에서 일제의 강압에 굴하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하여 면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는 수리시설로 못을 준설할 때 필요한 부지 3,000여 평을 무상으로 희사하고 학교를 세웠으며, 가난한 이웃을 도와주니 면민들이 마을 입구 비석공원에 송덕비를 세웠다.

 



 

은헌고택이 위치한 곳에는 500년은 족히 되는 회화나무가 담장에 의지하여 서 있는데 아마도 입향조가 심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 회화나무는 심어진 시기나 크기로 볼 때 충분히 천연기념물로 지정해도 될 정도이다. 이 회화나무의 주인에게 불어보니 문화재로 지정이 되면 재산권행사를 할 수가 없어 지정을 거부했다한다.






 

아쉬움이 남는 회화나무를 뒤로 하고 은헌고택으로 다가가니 전체적으로 안채, 사랑채, 서행랑, 동행랑, 광채, 대문채 등이 있었으나 대문채는 헐어버려 터만 남아있으며 동행랑채도 화재로 소실되어 기단만의 흔적으로 남아있고, 현재는 안채, 사랑채, 서행랑, 광채와 사랑채에 딸린 중문과 방앗간 공간이 남아있다.



 



 

이곳을 소개하는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어두었다.

은헌고택은 청주한씨 둔암공이 조선조 연산군대에 이곳으로 옮겨 터를 잡은 이후 오랫동안 살아온 곳으로 韓士源(은헌 한사원:1860~1908)이 당대에 지어 현재까지 이어 오고 있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전후에 툇간을 두었으며, 대들보 위에 종보를 든 5량가구로 부연이 없는 홑처마에 팔작지붕을 얹었다. 안채 정면이 6칸으로 구성된 것은 경남지역 민가에서 보기 드문 경우로 가장 큰 예에 속하며 전면 툇간은 부엌을 제외한 전면은 모두 툇마루로 구성하고 방부분은 후툇간까지 틔워 공간을 확보했다. 안채와 사랑체 모두 규모가 크며 가구의 기법이 치밀하고 또 세부 장식이 뛰어나 조선 후기 지주 계층의 주거문화 연구를 위한 학술적 가치가 충분하며 지속적인 관리로 보존 상태도 양호하다.

사랑체의 경우는 대청마루 외에도 또 하나의 툇마루를 독립하게 구성하여 실용성을 높였다. 이것은 근세에 이르러 전통적인 한옥이 실용적인 구조로 변해가는 과정을 알 수 있는 좋은 건축 자료이다.


 




 

은헌고택은 전체적으로 안채에서의 부녀자를 위한 공간, 사랑채에 있어서의 변화된 공간모습과 다양한 문살과 실용적인 공간구성이 전통한옥에서 근현대로 변화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다양한 건축의 특징을 갖고 있어 한옥연구에 좋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으며 대대로 지역민들을 위해서 덕행을 쌓은 가문의 내력과 어우러져 그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