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미수 허목이 노닐던 달천동과 달천구천 그리고 달천정

천부인권 2016. 9. 22. 07:57



<2015.8.14. 창원 달천계곡의 미수허목선생 유적비>

 

하늘이 무너지지 않도록 기둥이 되어 받치고 있다는 창원의 명산 天柱山(천주산 : 638.8m)은 명성황후가 3일간 기도를 하고 갔다 하여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는 산이다. 특히 봄엔 진달래가 천주산 정상을 붉게 물들이면, 수많은 등산객이 또 다시 산야를 울긋불긋 수놓는 광경을 보게 된다. 이 천주산은 북쪽사면을 따라 북면방향으로 흘러가는 급경사의 계곡이 발달되어 있다. 이 계곡을 일러 達川(달천)이라 부른다. 달천이란 이름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은 조선 숙종 때의 문신이자 학자인 許穆(허목 : 1595~1682)이 기거하여 노닐면서 바위에 達川洞(달천동)이라는 해서체의 각자를 새겨 두었기 때문이다.




<2015.8.14. 문정공미수허선생유지>

 

북면 외감리에 속하는 달천계곡은 산자락에 주차장을 만들고 2012414일에 개장한 달천계곡 오토캠핑장이 있다. 이곳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임도를 따라 가면 오토캠핑장이 나오고 여기에서 약 300m 쯤 천주산으로 오르면 임도 좌측에 허선생유적비 2기가 서있다.

 

화강암으로 만든 비석은 정면에 文政公眉叟許先生遺址(문정공미수허선생유지)라 새겼고 뒷면에는 戊寅 十月 日 達川契(무인 십월 일 달천계)라 새긴 것으로 보아 1938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크기는 앞면의 폭이 50cm, 옆면의 폭은 19cm이며, 높이는 168cm이다.

 




<2015.8.14. 문정공미수허선생유적비>

 

2008년에 세운 오석의 비 정면에는 文政公眉叟許先生遺蹟碑(문정공미수허선생유적비)라 새겼다. 비에 새긴 내용은 달천정 미수 허목선생 유적비 병서로 시작한다.

조선 현종 숙종조에 사림의 영수로서 도덕과 학문이 백세의 스승이 되고 조정에 나아가서는 명상으로서 仁義(인의)國君(국군)을 보필하여 역사에 이름을 남긴 대현이 계시니, 곧 우리 문정공 미수 허선생이시다. 선생은 1595(선조28)년 서울에서 탄생하여 1682(숙종9)년 경기도 연천에서 별세하였다. ()(), 자는 文父(문부) 眉叟는 그 ()이다. 貫籍(관적)陽川(양천)으로 고려초 허선문이 그 시조이다. 贊成(찬성) ()는 그 증조이고, 別提(별제) ()은 조부, 현감 휘 ()는 부친이다, 母夫人(모부인)은 백호 임제의 따님이다.

선생은 육순이 넘도록 관로에 나서지 않고, 산수간을 소요하면서, 경사에 침잠하여 자신의 경륜을 蘊蓄(온축)해 나서 만년에 뜻을 펼친 전형적인 경세유였다. 선생은 한강 정구 선생의 高足(고족)으로서 陶山夫子(도산부자)의 학통을 이은 近畿실학의 창시자요, 잘못된 방례(우리나라 예법)을 바로잡은 禮學傳家, 先秦古文의 의법을 체득한 고문의 대가이자, 書法藝術에 있었어도 古篆의 독보적인 영역을 확립한 대서법가이다. 선생의 재세시는 물론이고 선생이 떠나신 뒤로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선생을 숭모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더 간절하여, 각처에 서원과 사우를 건립하여 尸祝의 예를 거행하고 있다. 우리 창원에 이런 위대한 선생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 있으니, 바로 달천동이다. 선생은 병자호란 직후 1637년부터 1646년까지 10년 동안 경남의 의령, 창원, 사천 등지에서 거주하였다. 창원에는 선대의 田莊(전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의 생활은 가난한 선비의 신분이었는데 선생은 쉬지 않고 경사를 공독하고,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때때로 원근의 산수를 찾아 참된 정기를 길렀고 선현들의 유적을 봉심하고 선현들이 남긴 글을 정리하여, 현양하는 등, 교화를 널리 펼쳤다. 만년에 대학자로서, 대정치가로 성장한 바탕이 이 시기에 형성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로 돌아간 선생은 만년에 숙종 임금의 지우를 입어, 대사헌, 성균관제주, 이조판서, 우의정 등의 요직에 올라 국가를 일으키고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정성을 다하였다. 선생의 명망이 경향에 가득하자 선생이 우거했던 달천은 전국적인 명소가 되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방문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선현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의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도 소홀히 여기지 않는 것이 동양의 아름다운 전통이었다. 창원의 유림들도 달천의 역사적 가치를 알고 진중이 관리하였고, 마침내 계를 모으고, 기금을 마련하여 달천정을 건립하여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는 제례를 거행해 왔다.

그러나 달천과 관계된 선생의 유적을 정리하여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는 기록이 없어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하였다. 지금 사람들도 누구나 알고 후세에도 전해 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유적비를 세워야 하겠다는 결의를 달천정 유림들이 하기에 이르렀다. 유림들의 갸륵한 취지를 이해한 창원시 당국에서도 적극적인 예산지원을 하여 이 뜻있는 일을 도왔다. 이네 유림 달천정 당장 김기수, 총무 김주원, 박영창과 선생의 방손 영회, 경회 등 여러분들이 관계문적을 갖추어 不肖를 방문하여 비문을 요청해 왔다. 불초가 비롯 문장에 능하지 못하나 평소 선생이 남긴 글을 읽고 尊慕해 왔으므로 굳이 사양하지 않고 이렇게 서술하고 뒤에 ()을 붙인다.

 

온 나라가 혼탁한데, 구제할 이 그 누굴까? 미수 선생 나셨기에, 선비정신 살아났네.

경사 속에 침잠하여, 깊은 경륜 온축했고, 산 수간을 소요하며 참된 정기 길렀다오.

맑고 밝고 크고 높아, 인간세상 봉황 기린, 도덕학문 문장서법, 위대하신 스승이라.

나라님의 지우 속에, 경세제민 도모하니, 만백성이 흠앙하여, 부모처럼 의지했네.

달천동에 남긴 향기, 세월 속에 또렷하다. 후학들의 전범이니, 정신적인 양식이라.

유적 모아 비석 세워 천추만세 드리우니, 대선생의 가르침이, 우리들을 계도하리.

2008년 무자년 곡우절에

후학 문학박사 경상대학교 교수 김해 허권수(許捲洙) 근찬

 



<2015.8.14. 달천동 각자>

 

이곳을 찾았을 때는 8월이라 많은 사람들이 계곡을 찾아와 여름나기를 하며 물놀이도 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만난 나이든 부부는 달천동 글씨를 보기 위해 일부러 이곳을 찾아서 왔다고 했다. 옛 지식인의 의미 있는 행동 하나가 후대의 사람들에게 자산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알면서도 스스로는 행하지 않는다.

 





文政公眉叟許先生遺址(문정공미수허선생유지)와 불과 10m여 거리의 계곡 바닥 편평한 바위에 達川洞이란 3자의 글이 새겨져있다. 이 글은 전체 길이 174cm이고, 54cm, 54cm, 44cm인 힘이 넘치는 해서체로 새겼다. 옛 사진에는 자가 완벽했지만 지금은 훼손된 흔적이 있다. 오른쪽에는 먹을 갈았다고 전하는 장방형의 벼루 홈이 남아있다.

 





<2015.8.14. 미수 허선생을 배향하는 달천정>

 

허선생의 본관은 陽川(양천)이고, 자는 文甫(문보和甫(화보)이며 호는 眉叟(미수), 台領老人(태령노인), 臺領老人(대령노인), 石戶丈人(석호장인)이다. 한성부 彰善坊(창선방)에서 抱川縣監(포천현감:1632)으로 사후 증 贈領議政(증령의정)에 추증된 許喬(허교:1567~ 1632)正郞(정랑) 白湖(백호) 林悌(임제)의 딸 임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제자백가와 경서 연구에 전념하였으며 특히 예학에 밝았다. 저서에 經說(경설)·東事(동사)등이 있다. 과거에 급제하지 않고 학행으로 천거되어 관직에 올랐으며, 정승 반열에 올라 의정부우의정겸 영경연사에 이르렀다. 당색은 남인으로, 남인 중진이며, 청남의 영수였다. 예송논쟁 기간 중 송시열의 사형을 주장하였고, 송시열에 대한 온건 처벌론을 주장하는 탁남의 허적, 권대운 등과 갈등하였다.

 

허선생이 경남을 오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丙子胡亂(병자호란 : 1636.12~1637.1)을 피하기 위해 강원도 쪽으로 피난을 갔다가 동생 허의가 어머니를 대리고 처가가 있는 의령군 행정리로 갔다는 말을 듣고 이듬해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강릉, 원주를 거쳐 상주에 들렀다가 의령에 내려 왔기 때문이다. 이때 의령의 유생들을 가르친 곳이 지금의 의령 二宜亭(이의정)이다. 허선생이 이곳 외감리 새터에 오게 되는 것은 부친이 남겨준 땅이 있었기 때문인데 창원에 머문 기간은 164247세에 와서 51세 때까지로 4년간이다. 47세가 되던 1642년에 잠시 사천에 머문 적이 있는데 사천의 유생들이 집을 지어 머물도록 하였으나 사양하고 창원에 와서 머물렀다. 그 때 달천동 각자와 경상남도 기념물 제32호로 지정된 達川龜泉(달천구천)’을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달천정>

 

달천정은 1931년 미수 허목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달천회에서 허선생의 유지 근처인 북면 외감리의 북쪽에 위치한 새터마을 입구에 건립한 정자이자 사당이다. 본당인 달천정과 대문채에 해당하는 방해문(放海門)이 나란하게 배치되어 있다. 건물의 방향은 동향이다. 정면 4, 측면 1.5칸의 홑처마 우진각 지붕이다. 평면 형태는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이 있는 중당협실형이다. 동쪽 방에는 허목의 위패를 모신 감실을 있고, 대청에는 영정이 모셔져 있다.

건물 형식은 대청 부분은 이익공(二翼栱)으로 처리하였고, 온돌방 부분에는 장여 수장으로 처리하였다. 대문채인 방해문은 평삼문 형식으로 정면 3,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중앙에 대문이 달려 있고, 좌우는 화장실과 관리인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달천정에서는 매년 허목의 기일인 음력 45菜禮(채례)을 거행하고 있다. 달천정에 딸린 위토답(位土畓)은 약 6,611.6~9,917.4라고 한다.




<달천정 출입문에 걸린 방해문 편액>

 

달천정 입구 대문채에는 放海門(방해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글자 그대로 해석을 하면 바다에 내놓는 문이란 뜻인데 아마도 달천구천에 들어 있는 돌거북이 바다를 향해 갈 수 있도록 놓아둔다는 의미인 것 같다. 아울러 달천정을 출입하는 유생들이 바다같이 넓은 세상에 나가는 문이란 의미도 숨어 있을 것이다.

이 방해문 편액은 白堂 鄭基憲(백당 정기헌:1886-1956)선생이 1938년에 쓴 글씨이다. 정선생은 1886년 현 창원시 상남면 봉림리 62번지(창원의집 뒤쪽)에서 鄭珪燁(정규엽)李根秀(이근수)23녀 중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서예가로 알려져 있지만 일제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민족의식이 투철하고 배일사상이 철저하여 어떠한 경우라도 일제에 협력이 되는 일이라면 아예 손대지 않았던 인물이다.

일본 경찰의 의심을 받아 가택수색을 받고 구인되어 고문을 당하는 곤욕에도 끝내 함구하였던 분이다. 1930년대 후반에 그를 잘 아는 사람이 창원군수로 부임해 왔다. 창원군수는 정기헌을 불러 상남면장에 취임하라고 권하였으나 그는 한마디로 잘라 거절하였다. 그에게 있어 일제와의 타협이나 그 아래에서의 관직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출처 : 네이버블로그-수원 추억박물관]




<달천정 본당>




<달천정 본당 정면>



<달천정 편액>

 

본당에 걸려 있는 이 달천정 편액도 백당 정기헌선생이 1938년에 隸書(예서)로 쓴 글이다. 達川亭(달천정)이라는 이름을 모르고 본다면 읽기가 쉽지 않은 필체이다.




<달천정기>

 

訥齋 金柄麟(눌재 김병린:1861~1940)선생이 1939년에 쓴 달천정기 일부를 소개한다. 선생은 창원시 동읍 화양리 화목마을에 살았던 사람으로 화목마을 입구에는 그를 기리는 비석이 서있다. 선생은 일찍이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晩求(만구) 李種杞(이종기)의 문하에 나아가 배웠고, 1901(광무 5) 방계 선조인 金尙鼎(김상정)의 문집인 谷川先生文集(곡천선생문집)을 간행하였다.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만년에는 龍溪書堂(용계서당)을 열어 수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원문]
達川亭記
吾州之地濱於江海者 風景固甚佳 其山谷之中 鮮佳水石 惟達川之洞 爲最可觀焉 昔 文正公眉叟許先生 於其中歲 迫於窮約 旅食嶺中 嘗以 先世別業之所在 來寓吾州 而居於是洞 自是以後 達川 頗益擅勝而非特 見重於吾州 凡過州上者 莫不訪而遊之 先賢之蹟 固可追躡起慕而地之 以人而得名 盖有如此 前年 州人士 咸以爲此地之尙無一屋 非所以盡慕賢之道 相與立契貯貨 歷多年所 而亭乃得成 雖無宏麗之制 足可以容多 士之會遊 余亦實與於是義 而諸君之殫誠竣役 有足可尙者耳旣落 咸又以爲不可無記 屬余爲之 余雖病癃不振 無以泚筆 然顧以事係於斯文 而又闔州所共爲也 則義有不可辭者 夫慕賢 美名也 契焉而亭焉 歲率一會而樂之 洵盛擧也 然事貴有本領 而要得其正体也 豈可苟焉而己哉 試思眉翁之流離寓此也 其困苦索莫之狀 必有不可形言者而人之視之 亦不過知爲落拓不遇之一窮士而己矣 及其一朝 擢於草茅之中 而處於廟堂之上 志得道行 而名聲洋溢於國中 利潤浹洽於一時歷世旣久 而尊仰彌篤 俎豆而尸祝之 儀無不備 而之其一時流寓之地 猶尙不忍其埋沒而無稱焉 嗚乎 其流芳於後世 而見崇於來徒 可謂之矣 世固有無實而得盛名 無得而躋顯位者 而至其身死時移 名湮滅不傳 不復爲人所稱者 何可勝數哉 其視實大德盛 大爵之修 而人爵自至 道誼文章 爲世標準 頌慕祖述 逮久靡極 如眉翁者 眞有雲泥之懸矣然眉翁之所以如此者 豈無其由 而致之哉 向使眉翁 當其窮厄流寓之日 徒悲其命之不亨 運之不早 而懶廢其學間 放棄其職分 德之不加修 而志之不加篤 則安可得晩暮之大達 而垂不朽之盛名 有如此者哉 傳曰 居不幽則思不深 易曰 尺蠖之屈 以求伸也 龍蛇之蟄 以存神也 由是觀之 眉翁之所爲眉翁 不在於其顯達之後 而在於其窮約流寓之日 明矣然則達川之寓 雖直謂之 爲眉翁安身立命之地 亦未爲不可也 顧吾人今日其窮厄 亦何如哉 而當知眉翁之遭必復有所加甚者焉 登於是亭者 俯仰想慕 僾然如見其風裁 肅然如承其馨欬 去其貧懦之習 勵其卓厲之操 則將無往而非是地 無居而非是亭 而志不患不立 業不患不成矣 若不此之爲 而徒致欽慕之情 但求遊賞之樂而己 則外矣 實非所以追往蹟 希前哲之意也 余故爲之備論如此 願相與勉之 且俾來者 有所省覽云爾
歲己卯仲秋後學盆城金炳璘謹書


[해문]
달천정기
우리고을 땅 강과 바다는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 그 산골짜기 중에 맑은 물과 온갖 돌이 조화롭게 아름다운 곳으로는 달천동이 가장 볼만 한 곳이다. 옛 날 문정공 미수 허선생께서 그 중년의 나이에 궁벽한 일을 당하여 영남을 유람하실 때 일찍이 그 선대에 별장이 있었던 까닭에 우리 고을에 오게 되어 달천동에 머물렀는데 이때부터 달천동은 자못 더욱 명승지로 자리 잡아 우리 주위에서 특별히 중시해 보지는 않더라도 우리 고을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들러서 놀고 가지 않음이 없었다. 선현의 행적이 진실로 가히 그 자취를 따르고 연모하는 마음을 일으키며 땅은 사람의 일로써 그 이름을 얻는 것이 이와 같음이다.
작년에 고을 선비 모두 이 땅에 정자하나 없는 것은 현인을 연모하는 도리를 다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서로 계를 만들어 돈을 모아 몇 년의 세월이 흘러 정자가 이에 완성 되었다. 비록 크고 화려한 규모는 아니지만 족히 많은 선비들이 모여 즐길만하다. 나 또한 실재 더불어 의논하였으나 여러 인사들이 정성을 다하여 이 일을 마친 것은 족히 높이 살만하다. 이미 낙성을 하고 모두 기문이 없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나에게 그 일을 부탁하였다. 내 비록 오랜 병을 털고 일어나지 못했고 맑은 문장도 없으나 이 일이 유학에 연관되고 또 모든 고을이 함께하는 바를 생각하면 의리상 사양할 수 없는 것이다. 무릇 현인을 연모하는 것은 아름다운 명분이다. 계를 모으더니 정자가 섰다. 해마다 한번씩 모임을 하여 즐기니 진실로 성대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일은 그 본령이 있음을 귀하게 여기니 그 정체(正體)를 얻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니 어찌 구차하다고 할 뿐이겠는가. 미수옹(眉叟翁)께서 떠돌다 이곳에 우거하신 것을 생각하니 그 곤란하고 궁색한 형상이 반드시 형언할 수 없음이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또한 불과 몰락하여 불우한 일개 곤궁한 선비로 보았을 뿐이리라. 하루아침 초옥 중에서 발탁되어 묘당에 자리하게 되었다. 도가 행해지는 것에 뜻을 두고 명성이 나라안에 넘쳐나 한 시대를 이롭고 윤택하게 하고 넉넉하게 하였다. 세월이 이미 오래 지나도 존중하고 숭앙하는 것이 갈수록 돈독하고 제사를 지내고 의례가 다 갖추어졌다. 그 한 때 유랑하여 머물렀던 자리가 오히려 차마 매몰되어 이름나지 않을 수 없는 곳으로 숭상 받게 된 것이다.
아아! 후세에 아름다운 향기를 남겨 후세의 선비들에게 숭상 받음이 지극하다고 할 것이다. 세상에는 실질은 없으면서도 성대한 이름을 얻는 경우가 있고 덕이 없으면서도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경우가 있으나 그 사람이 죽은 뒤에 이름이 민멸되어 전하지 않으며 다시 사람들이 칭송하지 않으니 어찌 가히 그 운수를 이기겠는가. 그 실재 큰 덕의 성대함을 보고 하늘의 작위를 닦으면 인간의 작위는 스스로 이르는 것이다. 도의와 문장은 세상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현인을 칭송하고 염노하여 후손에게 이어주는 일이 오랜 뒤에까지 지극함이 없는데 미수옹(眉叟翁)의 경우는 하늘과 땅 차이가 있다. 미수옹이 이와 같음이 있는 것은 어찌 그 연유가 없이 이러한 데에 이르겠는가.
옛날 미수옹(眉叟翁)이 재앙을 당하여 유랑하여 정착할 때에 그 운명이 형통하지 못하고 행운이 일찍 찾아오지 않음을 슬퍼하고 게을리 하며 그 학문을 그만 두고 그 직분을 함부로 버리고 덕을 닦지 않고 뜻을 돈독히 하지 않았다면 어찌 늦은 때에 크게 통달하여 사라지지 않는 명성을 남겨 이와 같음이 있겠는가. 전(傳)에 이르기를 사는 것이 깊고 그윽하지 않으면 생각이 얕다. 또 주역에 이르기를 자벌레가 몸을 움츠리는 것은 펴는 것을 구하고 용과 뱀이 칩거하는 것은 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를 기준으로 본다면 미수옹이 미수옹(眉叟翁)이 된 까닭은 그 현달(顯達)한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궁벽하여 유랑한 그 때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달천의 우거(寓居)는 비록 미수옹(眉叟翁)이 몸을 편안히 하고 명분을 세운 곳이라고 곤바로 말하기는 불가할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늘날 궁벽한 재앙을 당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또한 어찌된 것인가. 마땅히 미수옹이 당했던 것을 알고 반드시 다시 더욱 심하게 하여야 한다.
이 정자에 오른 사람들은 굽어보고 우러르며 생각하고 연모하여 아련히 그 풍모를 볼 수 있을 것이고 숙연히 그 남겨진 음성을 이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빈곤하고 게으른 습성을 버리고 뛰어나게 근면한 절조에 부지런히 힘쓴다면 장차 가는 것이 이 땅이 아님이 없을 것이고 기거하는 것이 이 정자가 아님이 없을 것이다. 또한 뜻이 서지 않음을 걱정하지 않으며 대업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걱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 다만 흠모하는 정을 지극히 하고 놀며 감상하는 즐거움을 구하는데 그칠 뿐이라면 외형적인 것이지 실제 지나간 자취를 따르거나 앞선 철인의 뜻을 갈구하는 까닭이 아닌 것이다. 내 이러한 연유로 이와같은 논술을 갖추어 서로 열심히 노력하기를 바라며 또한 후세들이 살펴 성찰하는 바가 있기를 바란다.
기묘년(1939) 중추(가을) 후학 분성 김병린 삼가 쓰다.

 




미수 허목 영정



2015.8.14. 달천구천

 

의창구 북면 외감리 868번지에 위치한 達川龜泉(달천구천)1975212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32호로 지정되었다. 達川龜泉(달천구천)은 허목이 창원 외감리 새터에 거주하면서 손수 돌거북을 만들고 샘도 만들었다한다. 달천구천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하며, 지금까지 주민들의 식수로 이용되었지만 지금은 식수 불가판정을 받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우물 안에는 허목이 직접 조각하여 넣었다는 거북 형상의 돌이 있다.

이곳 안내판에는 우물가에는 허목이 직접 심었다는 매화나무 한 그루가 있다.”고 했는데 아무리 봐도 나무의 수령이 그렇게 되어 보이지 않는다.






허목선생이 손수 깎아 만들었다는 돌거북


출처 및 참조
창원향교지 하-창원향교(2004.11)-대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