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창원 진전면 금암리 안동권씨 열부각

천부인권 2016. 10. 15. 06:00



<2015.3.7. 진전면 금암리 안동권씨 열부각>

 

국도 1029번 도로인 의산삼일로를 따라 대정삼거리에서 고사리 방향으로 가다보면 도로변인 합포구 진전면 금암리 759번지에 화려한 공포를 자랑하는 정려각을 만나게 된다.





 

이 정려각은 돌로 담을 쌓았으며 입구인 문에는 守一門(수일문)이라는 편액을 달았다. 수일문의 지붕을 덮은 기와의 수막새에는 (누를 황)이라는 글자가 양각 되어 있고, 암막새에는 (세찰 열)자가 양각되어 있어 이 정려각이 황씨와 관련이 있는 烈婦閣(열부각)임을 암시하고 있다.

 




 

수일문에는 열쇠가 채워져 있어 안으로 들어 갈 수 없지만 문기둥 사이로 안쪽을 보면 열부각이라는 편액이 달린 정면 한 칸, 측면 한 칸인 화려한 공포가 아름다운 비각이 보인다. 이 열부각의 지붕은 기와 모양의 플라스틱 제품으로 덮여 있고, 지붕의 우측 처마 부분은 훼손이 되어 지붕의 하중을 견디기 위해 쇠파이프 2개로 활주를 설치하여 두었다.

 




 

열부각 안의 비 정면에는 烈婦安東權氏之碑(열부안동권씨지비)라 새긴 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는 黃益權(황익권)의 처 안동 권씨의 행적을 기려 유림과 향교의 通文(통문)으로 1932년 일제강점기에 건립하였다.





 

이 비의 내용은 金岩里(금암리)의 사인 황익권이 병환으로 죽자 그의 아내 안동 권씨가 당년 32세의 나이에 남편을 따라 목숨을 버렸다는 것이다. 1930년에 권씨의 남편인 황씨가 병으로 위독하자 온갖 정성을 다하여 하늘과 땅에 빌었으나 11월에 결국 남편이 죽자 슬퍼하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손수 남편을 염하고 홀로 계시는 시어머니를 위로하며 음식을 드시도록 권했다. 또한 어린 외동딸을 쓰다듬으며 사랑으로 보살폈다. 사흘 후 새벽에 남편의 시신이 있는 방에 들어가서 오래도록 기척이 없자 식구들이 급히 달려가 보니 시집올 때 입은 옷을 입고 남편 곁에 죽어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여성에게 부과된 三從之道(삼종지도)의 미덕을 실현 했다고 볼 수 있으나 노쇠한 시어머니와 어린 딸을 두고 남편을 따르는 것은 하나의 ()만 지킨 것이다. 그러나 사소한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함에 주저함이 없어 그 아름다움을 기려 이 정려각을 세웠다.





 

황익권은 창원 황씨이고 장무공의 후예이며 황우헌의 아들이다. 권씨는 안동 사람으로 월암의 후예이며 권재삼의 딸이다.

 





烈婦安東權氏之碑文
咸安郡 餘杭面 金岩里 士人 黃益權病卒 丁家其妻孺人權氏從夫判命時年三十二 咸之人士發嗟興感涕而相告曰 此可使無傳乎 儒狀峻發 校通繼之 其狀辭曰 孺人生有美質在家 而父母順及歸孝敬 無違家道肥 而令譽四聞 庚午九月其夫遘病委篤 孺人書夜調護 不遑食不交睫祈天禱地殫 竭誠力累旬如一十月十三日 其夫竟不淑 孺人無甚慟 楚手裁殮襲之具 偏故勸進食飮 拊乳孤女有倍常日 越三日曉入屍房 久不出家人趍 而親之着嫁時衣己 奄然於屍側云云 吁其烈矣議欲褒揚 而不得其便惟立碑記蹟 可以久其傳鳴呼 人之所怖者死也 雖讀書講道之士 尙患見我無勇以婦人 而乃祐爲之非 素所賦至烈其能之乎 益權叔父祐相 遣其弟祐贊甫 柚狀與通請文於余 窃以興奮之至 不可以不文辭略掇狀辭 而歸之以資觀瞻 不無振紀勵俗之萬 一云爾黃益權檜山人 莊武公后祐憲之子 權氏籍安東 月巖后載三之女也 銘曰 女子有行夫爲其綱片時舍生萬祀流芳


壬申二月通政大夫前行秘書監丞兼掌禮院掌禮原任奎章閣直閣
延安 李義國 撰
咸安 趙正來 書


열부안동권씨지비문-해문
함안군 여항면 금암리의 선비 황익권이 병환으로 집에서 죽자 그의 아내 권씨 부인이 남편을 따라서 목숨을 버렸으니 당시의 나이 32세였다.
함안의 인사들이 차탄(嗟歎)¹*을 발하고 감격이 일어나 눈물을 흘리면서 서로 말하기를 「이것으로 하여금 후세에 전함이 없어서야 되겠느냐?」하고는 유림들의 서장(書狀)이 준엄하게 발송되고 향교의 통문이 뒤이어 따라오니 그 서장의 내용에 「孺人께서는 태어나면서 아름다운 자질을 갖추어 집에 있을 때에는 부모님께 순하게 하였고 시집을 와서는 효도와 공경함을 어기지 않으시니 가도(家道)가 차츰 살찌기 시작하고 아름다운 소문이 사방에 들리게 되었다.
경오1930년 9월에 그의 남편이 병을 얻어 위독하여지자 부인께서 주야로 조리하고 간호하는 일로 밥 먹을 겨를도 없고 눈썹붙일 시간도 없었다.
하늘에 빌고 땅에 기도하며 성력을 다하며 여러 달을 하루같이 하였으나 11월 12일에 그이 남편이 끝내 돌아가시자 유인께서는 심히 애통해 하지도 않고 손수 염습(殮襲)²*의 옷감을 재단하고 부드러운 말씨로서 혼자 계시는 시어머니를 위로하여 음식을 드시도록 권하였으며, 젖먹이 외동딸을 쓰다듬으며 평상일 보다 배나 사랑하시더니 삼일이 지난 새벽에 시체가 있는 방에 들어가서 오래도록 나오지 않아 집사람들이 급히 달려가 보니 시집올 때 입고 오신 옷을 입은 채로 놀랍게도 시체 곁에 죽어 있었다고 하였다.
탄식할 일이로다! 그의 열녀됨이여! 의논하여 포양(褒揚)을 하고 싶지만 그 방법을 얻지 못하고 오직 비석을 세워서 행적을 기록하여 가히 그 사실을 알려서 영원토록 하리라.
슬프다!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의 죽음이다. 비록 글을 읽고 도를 청하는 선비일지라도 오히려 의를 보고서 용맹이 없음을 걱정하거늘 부인으로서 이에 부족함이 없이 실행 하셨으니 본래부터 부여한 바의 지극하신 열녀가 아니었으면 같은 일이 능히 그러했겠나.
익권(益權)의 숙부인 우상(祐相)이 그 아우인 우찬(祐贊)을 보내어 비문을 나에게 청하거늘 내가 가만히 흥분(興奮)을 멈출 수 없지만 글쓰기가 미숙하다하여 사양하지 못하고 간략하게 상사(狀辭)를 엮어서 돌려보내어 관첨(觀瞻)³*의 자료로 삼노니 아마도 기강을 진작(振作)하고 풍속을 면려(勉勵)⁴*하는데 만분의 일이라도 도움이 된다고 하겠노라.
황익권(黃益權)은 회산인(창원 사람)으로 장무공(莊武公)의 후예(后裔)요 우헌(祐憲)의 아들이며 권씨(權氏)는 안동권씨로서 월암(月巖)의 후예요 재삼(載三)의 따님이시다. 명하여 가로되 여자에게 행실이 있나니 남편을 위한 그 기강이더라. 잠시 동안에 삶을 버림으로서 만세토록 아름다움이 흘러가리라.

임신(壬申:1932)년 2월에 통정대부전행비서감(通政大夫前行秘書監)의 승과 병하여 예원의 장례(掌禮)⁵*이며 원임 규장각의 직각
연안 이의국 짓고
함안 조정래 쓰다.


차탄(嗟歎)¹* : 탄식, 감동하여 칭찬함.
염습(殮襲)²* : 죽은이의 몸을 씻은 다음 수의를 입히고 염포로 닦는 일.
관첨(觀瞻)³* : 우러러 봄
면려(勉勵)⁴* : 스스로 힘써함. 남을 힘쓰게 함.

장례(掌禮)⁵* : 이조 말 궁내부의 한부서






<2015.3.7 금암리 안동권씨 열부각>


출처 및 참고

문화유적분포지도-경남대학교 박물관

디지털창원문화대전-박태성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2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