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구산면 심리 평산신씨 정열각

천부인권 2016. 10. 15. 13:00

 

2015.3.20.  심리 평산신씨 정열각

 

 

창원 구산면 심리 698번지에 위치한 深里 平山申氏 貞烈閣(심리 평산신씨 정열각)은 이순신로를 따라 심리마을로 가다보면 마을 입구 오르막 좌측에 있다. 정열각이라는 편액이 붙은 출입문은 나무로 된 문이 달려 있고, 전면에는 붉은 벽돌로 된 담장으로 건설되었다. 본 건물인 정려각에는 편액이 없다. 산의 끝자락에 위치한 정려각이 세워진 곳은 평면으로 흙을 파낸 후 자로 잡석을 쌓아 흙이 흘러내리지 못하도록 담장을 만들고 그 속에 건물을 지었다.

 

 

 

 

정열각은 정면 한 칸, 측면 한 칸이며, 공포는 화려하지 않는 맞배지붕을 하여 간결하다. 현판에는 故烈婦平山申氏之閭(고열부평산신씨지여)’라고 써져 있고, 命旌 乾隆 二年 重修 嘉慶 二十年 三建 庚申 六月 四建 癸巳 三月 五建 己巳 十一月(명정건륭이년 중수 가경 이십년 삼건경신유월 사건계사삼월 오건기사십일월)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에 최초 정려를 받은 때는 英祖代(영조대 1737)이고, 현재의 모습은 19895차 중수에 의해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정열각의 내용은 열부인의 관향은 평산신씨로 빈곤한 부부만 생활하던 중 어느 날 남편이 虎攫之變(호확지변)을 당하자 신씨가 칼을 들고 쫓아가 호랑이의 꼬리와 발을 자르며 사력을 다하였으나 남편은 이미 죽고 사투에 기진한 자신도 순절하였다. 이를 가련히 여긴 동민이 장사를 치룬 뒤 현감이 이곳을 지나는데 말의 발이 마비되어 움직이지 않으므로 마을 사람에게 사유를 물은 즉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감은 마을의 사림으로 하여금 倡動聯章(창동연장)을 상소케 하였다. 英廟 丙辰(영묘 병진, 1736)에 정려가 내려져 각을 건립하여 오던 중 건물이 너무 낡아 純廟 乙亥(순묘 을해, 1815)년에 중수 하였으나 光武 庚子(광무 경자, 1900)년에 俄人(아인, 러시아)이 내침하여 불 지르고, 명판을 물에 던진 방화적은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 후에 甲辰(갑진, 1904)에 뜻밖에 해조에서 그 명판이 드러남에 따라 마을 사람들이 관에 고하여 명판을 인계하여 건물을 지었으나 庚寅(경인, 1950)년에 兵火(병화)로 또 소실이 되어 4년 후 癸巳(계사, 1953)년에 동민의 힘으로 4차 건립하여 제를 올리며 마을 수호신으로 숭앙해 왔다. 세월이 흘러 건물이 훼손 되자 동민들이 己巳(기사, 1989)년에 훼손된 것을 복구하여 부인의 정열을 추모하고 있다.

 

 

2016.10.15 평산신씨 정열각

 

 

정열각 앞에는 누군가 기원을 한 흔적이 남아 있다. 바닥에 신문지를 펼치고 소주 두병과 두개의 일회용 컵이 놓여 있었으며, 배 하나와 귤 하나가 나란히 놓여 있다.

 

 

 

 



참고

창원향교지-정려편

문화유적분포지도-경남대학교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