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14. 진해구 충무공이순신동상>
진해구 북원로터리에 세운 忠武公李舜臣銅像(충무공 이순신 동상)은 충무공 동상으로는 우리나라 최초로 6.25동란 중인 1952년 4월 28일 권력에 아첨하며 일생을 살았던 매국노 尹孝重(윤효중:1917-67년)이 제작한 작품이다. 우리가 민족의 역적이며 국가를 팔아 자신의 이익만 챙긴 매국노에게 얼마나 관대하냐면 민족을 역경에서 구한 위대한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제작케 하고, 지금도 동상 앞 안내판에 “한국조각계의 권위자인 윤효중 선생이 제작하였는데”로 찬양을 하고 있다. 우리의 역사가 이처럼 처참하기 이를 때 없이 망가져 있음은 외국의 힘으로 해방이 되면서 일본을 찬양한 매국노들이 또 다시 국가권력을 접수하였기 때문이다. 민족의 역적들이 아직도 권력의 수뇌부에서 호령하고 있는 이 나라가 정상적이 모습이라 말할 수 있을까.
매국노 윤효중은 일찍이 매국미술에 깊숙이 개입하여 부녀자들의 전쟁봉사를 미화한 「千人針(천인침)」(1943선전 특선)을 제작한 바 있다.
1944년 4월 태평양전쟁의 승리를 염원하는 『아버지 영령에 맹세한다.』로 경성일보 사장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은 군복을 입은 소년이 태평양전쟁에서 사망한 아버지의 유골을 가슴에 안고 전쟁 승리를 염원하는 형상이다.
1944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은 직후 한 신문 인터뷰에서 작품 「현명」은 “시국의 진전에 따라 조선의 여성들이 각 방면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음으로 그 자태를 그리고 아울러 조선 의복의 미를 표현하려고” 제작했다고 말했다.(매일신보, 1944.6.2.). 당시는 종군위안부의 존재가 일반에게도 알려진 상태였으므로 매국노 윤효종 역시 종군위안부의 존재를 알면서도 조선여성들의 ‘전쟁협력’을 찬양했다.
또한 민족의 역적 윤효중은 1945년 일본 자살공격대인 카미카제 장교를 기념하는 ‘아베 소위상’을 제작했다. 그 초상은 당시 조선총독의 아들을 묘사한 것이다. 이 기록은 김용철이 쓴 『‘일제의 전쟁시기에 협력한 미술가들’ “한국미술100년 1부” 2006』에 있다.
<북원로터리에 세운 이순신장군 동상 안내문>
매국노 윤효종은 일본 동경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하였다. 1948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강사로 활동했고 1949년 홍익대학교에 미술학과가 설립되면서 교수로 부임했다.
친일의 전력이 문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윤효중은 중등과정의 동문이란 이유로 대통령이 된 이승만의 비호를 받았다. 미군의 도움으로 대통령이 된 이승만 독제시대에 조각계 및 미술계의 지배자로 군림하다가 4·19혁명 후 이승만이 실세하자 매국노도 힘을 잃었다. 1966년 일본으로 이주하여 왜놈으로 활동하다 다음해 10월 7일 일본에서 결국 객사했다.
그리고 이충무공동상 뒷면에는 마산 출신임에도 3·15의거를 깎아내리며 군사독재를 찬양한 이은상이 이충무공을 찬양하는 글을 새겨 넣었다.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 우러러 찬양하는 충무공이순신장군의 모습을 재현한 동상에까지 매국노가 판을 치고 독재자를 찬양하는 더러운 자들이 입을 놀리는 꼴을 보면 이 나라 어느 한곳도 제대로 된 곳이 없음을 알게 된다.
지금 충무공이순신장군의 동상에는 예전의 나무들을 파내고 물 한 방울 땅으로 흘러들지 않는 돌과 시멘트로 바닥을 장식하는 공사를 하고 있다. 도심에는 특히 이런 로터리에는 차량의 통행이 많아 매연으로 나오는 유해물질을 부착시켜줄 나무가 많아야 함에도 있는 나무까지 파헤치는 반 환경적인 공사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환경문제가 심각하다고 스스로 떠들고 있는 창원시장이 뒤로는 이런 공사를 벌이는 진짜 이유가 궁금하다.
출처 및 참조
친일에 앞장선 조각가 윤효중-작성자 행복을 선사하는 도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장엽
충무공이순신동상 앞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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